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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전설

<수원·용주사>正祖의 독백

by phd100 2021. 3. 7.

<수원·용주사>

正祖의 독백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늘 가슴 아팠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뒤주 속에 넣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어린 왕세손은 울며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손수 붓을 들어 세자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저승에서나마 왕생극락하시도록 돌봐 드려야지.』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묻힌 부친의 묘를 절 가까이 모셔 조석으로 영가를 위로하기로 결심하고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게 됐다.

 

『불가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열 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 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나를 낳아 주신 은혜요,

셋째는 낳아 기르느라 고생하신 은혜요,

넷째는 쓴 것은 부모가 먹고 단 것은 나에게 주시는 은혜요,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뉘어 주시는 은혜요….』

 

설법을 다 들은 정조는 부친을 위해 절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먼저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화산으로 부친의 묘를 옮겼다.

그리고는 가까이 있는 갈양사(신라 문성왕 16년에 세운 절) 터에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능사를 세우도록 했다.

 

왕은 보경 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았다. 백성들은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위해 절을 세운다고 하자, 너도 나도 시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보경 스님은 8만냥의 시주금으로 4년 만에 절을 완성했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낙성식장에 친히 거동한 임금은 절 이름을 용주사라 명했다. 이 절이 바로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상리에 위치한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다.

 

정조는 자신에게 부모의 은혜를 새삼 일깨워주고, 용주사를 세우는데 크게 공을 세운 보경스님에게 승려로서 으뜸인 도총섭의 칭호를 주어 용주사를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제일 그림 잘 그리는 화공을 찾아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다시 경판으로 각하여 용주사에 모시게 했으니 이는 지금도 원형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또 임금은 궁에서 쓰던 명나라제 금동 향로와 야월낙안도(夜月落雁圖), 우중어옹도(雨中魚翁圖), 촌중행사도(村中行事圖), 산중별장도(山中別莊圖), 고주귀범도(孤舟歸帆圖), 산사참배도(山寺參拜圖), 강촌심방도(江村尋訪圖), 효천출범도(曉天出帆圖)와 용을 정교하게 양각한 8면 4각의 청동 향로를 하사했다.

 

임금은 능이 있는 인근 수원에 화성을 쌓아 소경(小京)으로 승격시키는 등 비명에 가신 부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기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용주사를 찾았다.

 

어느 초여름날이었다. 능을 참배하던 정조는 능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보았다.

『허허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로서 어찌 임금의 아버지 묘 앞에 있는 소나무 잎을 갉아 먹는단 말이냐.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이렇듯 독백하며 송충이를 한 마리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 이후로는 이 일대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다. 지금도 용주사 주변과 융릉 지역은 송림이 울창하여 장관을 이루며 특히 용주사 주변의 회양목은 천년기념물 제10호로 지정돼 있다.

 

어느 가을날 용주사로 향하던 임금의 행차가 수원 못미쳐 군포를 지나 고갯마루를 오르느라 속도가 좀 떨어졌다. 가마 안에서 임금은 속이 타는 듯 호령했다.

『여봐라, 어찌 이리 더디단 말이냐?』

『언덕을 오르느라 좀 더디옵니다.』

 

부왕을 그리는 정이 몹시 사무쳐 빨리 절에 다다르고 싶었던 왕의 심정을 기려 주민들은 이 고개를 「지지대(遲遲臺)」 고개라 불렀다.(遲:더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