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손수 붓을 들어 세자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저승에서나마 왕생극락하시도록 돌봐 드려야지.』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묻힌 부친의 묘를 절 가까이 모셔 조석으로 영가를 위로하기로 결심하고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게 됐다.
『불가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열 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 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나를 낳아 주신 은혜요,
셋째는 낳아 기르느라 고생하신 은혜요,
넷째는 쓴 것은 부모가 먹고 단 것은 나에게 주시는 은혜요,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뉘어 주시는 은혜요….』
설법을 다 들은 정조는 부친을 위해 절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먼저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화산으로 부친의 묘를 옮겼다.
그리고는 가까이 있는 갈양사(신라 문성왕 16년에 세운 절) 터에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능사를 세우도록 했다.
왕은 보경 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았다. 백성들은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위해 절을 세운다고 하자, 너도 나도 시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보경 스님은 8만냥의 시주금으로 4년 만에 절을 완성했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낙성식장에 친히 거동한 임금은 절 이름을 용주사라 명했다. 이 절이 바로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상리에 위치한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다.
정조는 자신에게 부모의 은혜를 새삼 일깨워주고, 용주사를 세우는데 크게 공을 세운 보경스님에게 승려로서 으뜸인 도총섭의 칭호를 주어 용주사를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제일 그림 잘 그리는 화공을 찾아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다시 경판으로 각하여 용주사에 모시게 했으니 이는 지금도 원형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