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이 명소로 꼽았던 '관동팔경'과 '대한팔경'을 찾아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여행을 기획하는 분들을 위해 우리 조상들이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명소로 꼽았던 '관동팔경'과 '대한팔경'을 다시 찾아 그 의의를 되새겨 본다.
각 팔경중 남쪽에 있는 곳은 관동팔경이 강릉 경포대(鏡浦臺), 양양 낙산사(洛山寺), 간성 청간정(淸澗亭), 삼척 죽서루(竹西樓), 울진 망양정(望洋亭), 평해 월송정(越松亭)의 6곳이고, 대한팔경은 해운대 저녁달, 석굴암 해돋이, 한라산 고봉의 3곳입니다.
북쪽에 있는 곳은 관동팔경이 통천 총석정(叢石亭), 고성 삼일포(三日浦)이며, 대한팔경은 금강산 일만이천봉, 압록강 뗏목 풍경, 모란봉 을밀대(乙密臺), 백두산과 천지, 부전고원(赴戰高原)입니다.
북쪽의 명소들도 백두산과 천지는 중국쪽에서 입산을 통해 여행이 가능하며 금강산지역의 명소들도 외금강구역은 최근 유람선관광이 실현되면서 국토분단 이후 처음으로 우리 나라 관광객들이 발을 디디게 되었으며, 앞으로 총석정, 삼일포, 내금강구역으로 여행도 기대되고 있다.
『다시 찾아보는 '關東八景' 및 '大韓八景' 남쪽 명소들』 및 여타 국내여행 전반에 관한 정보는 한국관광공사 관광안내부(02-757-0086)에 문의하거나 PC통신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 '關東八景'과 '大韓八景'의 유래
과거 우리 나라에서는 각 지방마다 그 지방을 대표하는 명승지를 시와 노래, 그림으로 세상에 알려왔다. 명소는 주로 12경, 10경, 8경, 6경, 3경으로 구분지어 불렀는데 이중에서도 8경을 가장 많이 채택했다.
조선시대에 8경(八景)이 처음 도입되었는데 그 유래는 중국의 유명한 자연경승지 소상팔경 (瀟湘八景)을 본 따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곳은 양자강 중류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합류하는 곳으로 주위풍경이 절경이라 이를 예찬하는 시와 노래가 많이 지어졌다. 이 소상팔경을 예찬한 시문집을 입수하여 읽거나 중국을 방문하여 이 절경을 찾아보면서 우리 선조들은 많은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금수강산이라고 지칭하는 우리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자연경관의 평가와 지정이 민간사회에서 시작되면서 평안도를 대표하는 관서팔경(關西八景), 강원도를 대표하는 관동팔경 (關東八景)이 등장하고, 각 지방마다 이에 상응하는 명소의 지정이 잇달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각 지방을 대표하는 명소와 팔경의 명칭이 무관심속에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문화민족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이 고이 물려준 아름다운 이 강산을 잘 보존하고 가꾸어 후대에 잘 전해주는 것이 우리 세대의 도리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옛 것을 되찾아보고 이를 널리 알려 모든 사람이 자연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대한팔경(일명 조선팔경)은 우리 나라 전역을 대표하는 명소 여덟 곳이며 대중 가요로 불리고 있다. 오늘날에도 애창되는 대한팔경가(大韓八景歌)의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경성(京城)방송국(KBS 전신)이 전국 시청자를 대상으로 빼어난 경승지를 추천토록 방송하고 시청자들이 추천한 많은 명소 가운데 상위 8곳을 채택하였다. 1936년 작사가 왕평(王平)이 이 여덟 곳을 가사로 짓고, 경성중학교 음악교사였던 형석기(邢奭基)가 작곡하여, 평양 기생 출신 명창 선우일선(鮮于一扇)이 노래를 불렀다. 경쾌한 폴카곡으로 작곡된 이 노래는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나라사랑과 민족정서를 반영한 노래로서 널리 보급되었다. 대한팔경가에서는 금강산을 비롯한 우리 나라 여덟 곳의 명소가 소개된다. 그러나 혹자에 따라서는 일부 달리 보기도 한다. 이 중 일부를 대신하여 평양 금수산(錦繡山)이나 지리산 운해(雲海)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가요 '대한팔경'의 가사는 4절로....
에- 금강산 일만이천 봉(峰)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후렴)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에- 석굴암 아침 경(景)은 못보면 한이 되고,
해운대 저녁달은 볼수록 유정(有情)하다.
에- 백두산 천지(天池)가엔 선녀의 꿈이 짙고,
압록강 여울에는 뗏목이 경(景)이로다.
에- 캠프의 赴戰(부전)고원 여름의 낙원이요,
평양은 금수강산 행복의 낙원이라.
〈명소 감상 요령〉
관동팔경중에는 정자 이름들이 많은데 사실상 이 정자들을 실제로 가보면 매우 실망하게 된다. 흔히 볼 수 있는 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들이 대표적 명소로 손꼽히는 이유는 정자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정자나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경치와 정자를 포함한 주변경관이 일품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 사실을 알고 감상해 보면 역시 우리 조상들이 상당한 심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될 것이다.
관동팔경 : 관동지방(대관령 동쪽의 지방), 즉 강원도의 동해안에 있는 8개의 명승지.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 또는 月松亭)이 그것이며 월송정 대신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를 넣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망양정과 월송정은 경북에,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지역에 있다. 이곳을 노래한 시가(詩歌)로는 조선 선조(宣祖)때에 정철(鄭澈)이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산수미(山水美)를 읊은 <관동 별곡>이 있고, 전설로는 신라시대의 화랑 낭도인 사선(四仙)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랑(南石郞), 안상랑(安祥郞)이 삼일포와 월송정에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총석정(叢石亭) : 강원(북한 지역) 통천군 고저읍 총석리에 있는 정자. 고저읍의 동쪽, 동해에 돌출한 해식애(海蝕崖=해안절벽) 지대에 있으며 그 아래 바닷속에 구리빛으로 그을은 6각형의 현무암기둥이 여러개 총립(叢立)하여 절경을 이룬다.(이러한 화강암 구조를 절리(節理)라 한다.)
높이가 100척이 넘는 돌기둥도 있다. 고려 공민왕 시대에 기철(奇轍, ?~1357, 원<元>나라 말기 순제<順帝>의 기황후<奇皇后>의 오라비로서 당대 고려후기의 권세가. 후에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쓴 공민왕이 즉위한 뒤 궁중에 연회를 베풀어 기철일당과 권겸일당을 불러들여 모두 주살(誅殺)하였다.)이 강릉(江陵)에 갔다가 해금강(海金剛) 총석정에 올라 화랑의 낭도(郎徒)였던 사선(四仙;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랑<安詳郞>, 남석행랑<南石行郞> 이들은 수려한 산수를 찾아 다니며 학문과 마음을 닦으며 무용도 하여 이들이 남긴 무용이 한국의 궁중무용이 되었다.)이 노닌 자취인 동해를 굽어보며 지었다는 <총석정가>라는 가요가 있으나 전하지 않으며 「고려사」 〈악지(樂志)〉에 그 유래만 전한다.
삼일포(三日浦) : 강원(북한지역) 고성군에 있는 호수. 면적 약 0.7㎢, 둘레 약 4.5km. 고성에서 온정리(溫井里)로 12km 가량 가면 북쪽 언덕너머에 있다.
석호(潟湖, 바다와 호수의 경계가 모래언덕(砂柱)으로 된 호수로 지하를 통해 해수가 섞여드는 일이 많아 염분농도가 비교적 높은 담수호이다.)로 북서쪽에 거암(巨巖)이 솟아 있고, 남쪽 호안에는 기암(奇巖)이 많은 구릉(丘陵)이 있다. 여기에서도 신라 때 화랑도인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 등 4국선(四國仙)이 뱃놀이를 하다가 절경에 매료되어 3일 동안 세상돌아가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근처에 사선정(四仙亭), 몽천암(夢天庵) 등이 있다.
관동별곡(關東別曲)조선 선조때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가사(歌辭). 1580년(선조 13년) 정철이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내외해금강(內外海金剛)과 관동팔경(關東八景) 등의 절승(絶勝)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道程)과 산수․풍경․고사(故事)등을 읊은 노래로, 조선시대 가사의 백미편(白眉篇)이다.전편(全篇)을 크게 4단으로 나누어 제1단은 관찰사로 제수된 감격과 임지로 부임하는 모습을 엮은 서곡(序曲)이고, 제2단은 내금강의 절경을 읊은 노래, 제3단은 외금강․해금강과 관동팔경을 읊은 노래, 제4단은 작자의 풍류를 꿈속에서 신선이 되어 달빛 아래 노니는 데 비유한 결구(結句)이다. |
관동 십경(關東十境)조선 영조 때 예조․호조 판서를 지낸 김상성(金尙星 1703~1755) 등 여러 사람이 강원의 명승지를 제영(題詠; 시를 지어 읊음)하였고 이를 그린 그림첩이다. 그림의 편자(編者)는 미상인데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해산정(海山亭),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月松亭)이 그려져 있다. |
청간정(淸澗亭) : 강원 고성군(高城郡) 토성면(土城面) 청간리에 있는 정자(亭子)로, 강원 유형문화재 제32호이다.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의 작은 언덕위에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풍경은 일품이다. 동해안의 모래해변을 높은 언덕위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는 경치는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는 것과는 또다른 맛이 있다.
특히 아침의 해돋이 광경과 대관령에 비치는 석양과 앞바다에 비치는 낙조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경관이라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의 심금을 울리는 곳이다.
정자의 창건 연대와 건립자는 미상(未詳), 중종 15년(1520)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 갑신정변 때 불타 없어짐, 1930년 지방민들이 재건, 1955년 보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81년 4월 해체 복원하였다.
화암사(禾嚴寺) : 청간정에서 남쪽으로 3.3km 못미쳐 ‘金剛山 禾巖寺’ 입구 안내판에서 서쪽으로 들어서면 ‘91년 세계잼버리 대회장이었던 가는 길이되고, 이 길로 계속 이 끌려 들어가면 약 10km 되는 곳에 뜻밖에도 수려한 경관과 멋진 장소를 대하게 된다.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으로 인제, 원통, 미시령을 넘게되면 다 내려와 대명콘도 입구에 큰 바위를 세워 ’金剛山 禾巖寺‘ 가는 길을 표시하고 있음.)
이 길을 따라 달리노라면 우선 산중턱에 깍아 만든 듯한 신비스런 거대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높이 70m, 둘레 150m의 계란모양의 큰 바위 위에 왕관모양의 또하나의 바위가 놓여 있어 보는 방향에 따라서 보이는 모습이 전혀 달라, 절 입구에서 보면 코끼리 형상, 화암사 대웅전 앞에서 보면 거북 모양, 신선봉에서 내려다 보면 남자의 성기(男根)와 여자의 성기(子宮) 모양으로 보여 지금도 이 수바위 앞에는 수없이 많은 아녀자의 기도자리가 있어 대구 팔공산 갓바위와는 또다른 염원을 들을 수 있다. 바위 뒷편 꼭대기에는 깊이 1m, 둘레 5m의 웅덩이에는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국내 사찰의 7대 불가사의라 불리고 있으며 이 바위를 수바위(수암:穗巖 또는 秀岩)라 한다. 가뭄이 계속 될 때 바위 꼭대기의 이 물을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이 바위 아래 화암사(禾巖寺)가 있고 빼어난 경관을 지닌 계곡과 폭포가 있다. 금강산 신선봉에서 발원한 옥수가 이 금강계곡에 와 부서져 멋들어진 암벽과 폭포가 조화를 이룬다.
‘금강산 화암사’란 표시에 의문을 가지는 이가 많은데 이곳이 금강산 맨끝자락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의문이 풀릴 것이다. 그러므로 금강산과 설악산의 경계는 미시령이 된다.
금강계곡, 여기에 걸린 석교(石橋), 계곡의 암벽과 폭포, 수바위 등의 이 비경에 취한 옛 선인들은 ‘춘택당(春澤堂)’ ‘인곡당(仁谷堂)’이라 찬탄하기도 했다.
화암사는 신라 혜공왕 5년(769)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하여 당시에 화엄경을 강의를 한 고찰인데, 인조 원년(1622)에 화재로 모두 타버린 후 1911년까지 모두 다섯차레의 화재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조선 현종 3년에 세 번째로 중수하면서 수암사(穗巖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철종 11년(1860)과 고종 원년에 또 불이나 타버리자 풍수지리상 화재의 원인으로 수암사의 ‘穗’자에서 ‘惠’자를 빼어야만 화재를 면할 수 있다는 설에 따라 절이름을 ‘禾’로 고쳐 지금까지 禾巖寺로 불러 왔지만 계속된 여러 차례의 화재로 초라한 고찰로 이어오다, 6.25때 다시 불이나 법당 2채만 남기고 모두 타버렸다. 1994년에서야 겨우 다시 중창돼 지금의 절모습이다.(경내 총 12만평,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미타암, 종각, 요사채 등)
이 절 뒤뜰에는 누가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6그루 밖에 안되는 보리수 중 한그루의 큰 보리수가 있다(대웅전 오른쪽 옆).
낙산사(洛山寺) : 오봉산(五峰山 일명 洛迦山)의 낙산사 주변과 동해안 쪽의 해안절벽 그리고 의상대, 북쪽의 설악해수욕장, 남쪽의 낙산해수욕장은 설악을 찾는이가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에 위치하는 낙산사는 설악의 한 뿌리가 바다가 그리워 동해로 뻗어내려 해안에 돌출한 오봉산의 둘째 봉우리에 세워진 해안 사찰이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3대 관음기도 도량 중의 하나이다.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 6.25로 소실. 지금의 건물은 1953년 다시 지은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의 7층석탑과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원통보전을 에워싼 원장(垣墻)과 홍예석으로 쌓은 홍예문(虹霓門)과 그위에 1962년에 지은 누각, 동종(銅鐘), 홍련암(紅蓮庵), 그리고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1977년에 건립된 동양에서 가장 큰 관음상으로 높이 16m, 둘레 3.3m로 양손에 감로수병을 받쳐 들었고, 양미간에는 백호(白豪)를 박아 광명을 뜻했다.) 등이 있다.
내려오는 구전(口傳: 입으로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 한마디, 의상(義湘)이 관음보살을 만나보기 위해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는데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如意珠)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 주면서, ‘나의 진신(眞身)은 볼 수 없으나 산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의상은 이곳에 관음 보살을 항상 만나기 위해 원통보전(圓通寶殿)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다. 그러나 지금의 관음상은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온 관세음 보살상이다. 12세기초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시대 작품으로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또 이 구전과 비슷하게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의상대사가 문무왕 10년(670년)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동해안 굴속에 산다는 말을 듣고 만나보기위해 재계(齋戒, 제<祭>를 행하거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심신을 깨끗이하여 음식․행동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고 부정을 피함.)하여 기도한지 이레만에 팔부중(八部衆=八部神將,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神將>으로 天, 龍, 夜叉, 乾達婆, 阿修羅, 迦樓羅, 緊那羅, 摩喉羅迦이다)이 의상(義湘)을 자리에 앉힌 채로 물위에 띄워 굴속으로 인도하였다. 의상이 공중을 향하여 예를 올리니 천(天)이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 주었고, 동해의 용(龍)이 또한 여의주 한알을 주므로 그것도 받아 왔다. 그리고 의상이 다시 이레동안 재계(齋戒)하여 기도하니 비로소 관음의 진신을 보게 되었다.
관음보살이 의상에게 말하기를 ‘지금 앉은 자리 위쪽으로 산 정상에 한 쌍의 대나무가 있을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으라.’라고 했다. 그말을 듣고 의상은 그 자리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빚어 모시니 그 모습이 우아했으며, 그 고운 모습이 성스러웠다.
이로 인하여 의상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안 굴속에 산다는 것을 알고 오봉산을 낙산(洛山: 이는 서역에 관음이 거주하는 곳이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기 때문에 이름을 따와서 붙임. 이 보타낙가산은 지상에 여덟군데 밖에 없는 관음보살이 산다는 전설의 산이다. 그래서 지상의 여덟군데를 세계의 8대 관음 성지라 하고 불자들은 이곳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 인도의 남해안, 스리랑카의 포타란, 중국의 보타산, 티벧의 랏사, 만주의 보타락사, 일본의 기이 보타락, 또 일본의 시모노 일광, 그리고 한국 양양에 있는 보타낙가산을 세계 8대 관음성지로 꼽는다.)이라 하고 그가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원통보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홍련암(紅蓮庵) : 의상대에서 북쪽 해안선을 따라 바라보면 약500m 전방에 해안절벽의 소나무 밑에 관음굴(觀音窟=寶陀窟)과 홍련암(紅蓮庵)이 있다.
홍련암 바닥에는 관음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서, 암자와 관음굴이 관련이 있는 굴임을 볼 수 있다.
그 관련이란 의상이 이 곳에서 수도를 할 때 한 마리의 청조(靑鳥 파랑새, 관음보살의 화신)가 의상 주위를 한바퀴 휘 돌고는 석굴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 자, 의상은 관음보살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이레동안 열심히 기도를 한즉, 이레 후 별안간 홍련(紅蓮: 붉은 연꽃)이 관음굴에서 떠올라 의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이 곳에 암자(紅蓮庵)를 지어, 관음굴에 살고 계시는 관세음 보살을 늘 친견(親見)했다. 이러한 의상(義湘: 625~702 해동<海東=우리나라>화엄종 창시자, 화엄종 10사찰 건립, 낙산사에 이어 문무왕 16년 부석사<浮石寺>창건, 의상십철<義湘十哲>이라는 열명의 10대덕고승<十大德高僧>의 제자를 배출)을 흠모하기 위해서 오늘도 중생들은 의상대를 찾는다.
*의상대(義湘臺) : 그래서 낙산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의상대이다. 동해의 아득한 수평선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절벽위에 세워져 해돋이를 보는 광경에 신비를 더 해줄 수 있는 명소이다.
의상대는 천년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 않고, 지금의 육각정자는 1926년 의상대사를 기리어 지어진 것이 쓰러져 193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판은 서예가 김돈희(金敦熙,1871~1946, 검사출신)의 글씨이다.
*낙산사 칠층석탑(洛山寺七層石塔 보물499호)은 1466년(세조12년)에 중수하면서 3층에서 7층으로 늘렸고,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 의상이 관음보살로부터 받았다는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비장(備藏)하였다는 석탑이다.
지금이야 이 두보주가 있을리 없지만 ‘옛날 1254년 몽고의 침입때 절의 노비(寺奴婢)인 걸승(乞升)이 낙산사 주지 아행(阿行)이 갖고 달아나던 것을 빼앗아 땅에 파묻었다가 몽고군이 물러난 뒤 1258년 어부(御府)로 반납되었고, 계속 보관 되어 오던 두 보주가 세조에 의해 이 7층석탑에 안치 되었었다.’니 이 앞을 지날 때는 보주의 체취를 느껴 볼 만하다.
원통보전(圓通寶殿)의 앞뜰에 세워져 있어 고려말기에 전래된 라마계 탑의 영향을 볼 수 있는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홍예문(虹霓門) : 홍예문(虹霓門)은 낙산사 입구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석문(石門). 1466년(세조12년)세조가 방문하였을 때 세운 것으로 강원도 26개의 고을이 힘을 모아 26개의 화강암을 무지개 모양으로 조성하였다.
문 좌우 양쪽에 강돌(화강암)로 문높이까지 쌓아 성벽의 형태로 하여 절 안팎을 구분한 것이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 문이다. 1962년 문위에 세워진 문루(門樓)가 군사용 성벽문루를 생각키게 하여 보기에 민망스럽다.
관음신앙(觀音信仰)․보살(菩薩) ;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성자(聖者)를 일컸는 것으로 미륵(彌勒)․관세음(觀世音)․일광(日光)․월광(月光)․문수(文殊)․보현(普賢)․지장(地藏) 등 여러 보살이 있다. 그 모습은 온화한 표정에 상반신은 나신이고, 하반신은 의상을 둘렀다. 보살중 관음보살은 그 종류가 많아 별도로 구분하기도 한다.․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한다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살펴본다는 뜻으로 일찍이 한국인은 관세음 보살을 향한 기도 소리가 소원 성취를 해줄 것이라는 절대절명의 기대감에 관세음 보살 신앙으로 되어 왔으며 관음보살(觀音菩薩)로 약칭되고 있다. 갖가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그에 따라 33가지 응화신으로 나타나서 즉시 구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관세음 보살을 모신 전각은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 관음전(觀音殿) 등으로 부르고 있다.․관음신앙(觀音信仰) ; 대승불교의 수많은 불․보살 가운데서 대중들과 가장 친근한 분이라면 단연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을 신봉하는 신앙형태. 불교신앙은 어떤 형태이건 반드시 불설경전(佛說經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관음신앙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경전은 법화경(法華經)과 화엄경(華嚴經)이고, 삼국시대에 전래된 관음 신앙은 지금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고구려의 광명사(光明寺), 백제의 성덕산 관음사(聖德山 觀音寺)의 창건에 얽힌 연기설화(緣起說話)와 관음상을 조성한 공덕으로 태어났다는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출생설화등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관음신앙(觀音信仰)의 영지(靈地) ; 3대 관음기도 도량으로 일컬어 지는 곳으로 강원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경북 경주(慶州)의 백율사(栢栗寺). 전남 곡성(谷城)의 관음사(觀音寺)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관음신앙은 우리 불교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들어 보신적이 있습니까?『南舞 阿彌陀佛, 觀世音 菩薩』을 … |
※양양 공수전계곡
오대산의 뒷골 홍천 내면. 인제군에서 양양 방향 56번 국도로 구룡령 고개를 넘으면 물맑은 계곡이 많다. 오지마을인 미천골 아래쪽에 용소골과 공수전계곡이 있다. 정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흘러간다. 공수전은 용소골의 초입이다. 수심이 얕고 피라미 등 민물고기가 많아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용소골 계곡은 하얀 자갈밭이 아름답다. 송림이 깊고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와 폭포가 아름답다. 물끓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탕소도 있다. 계곡 주변에는 숙박할 곳이 많지 않다. 용소리에 있는 알터통나무산장(672-3224) 등에서 민박을 한다.
경포대(鏡浦臺) : 강릉시 저동(苧洞)의 경포호수의 북쪽에 있는 누각(樓閣). 7번 국도 군정교에서 2.2km 지점 호안 왼쪽 언덕위에 있다.
기둥 28개 팔작지붕 겹처마의 누각으로 율곡(栗谷)이 10세 때 지었다고 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판각(板刻)하여 걸었다.
그리고 숙종의 어제시(御製詩)와 기문(記文)․시판(詩板)이 걸려있고, 특히 누대(樓臺)의 전자액(篆字額 전서<篆書>글씨체로 쓴 가로 걸린 현판)은 유한지(兪漢芝)․정자액(正字額)은 이 익회(李翊會)․제일 강산(第一江山)은 주지번(朱之蕃)의 글씨라 하는데 ‘江山’ 두 자는 잃어버려 후세인이 써 넣은 것이다.
경포대는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안무사(按撫使 재난․변란이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백성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주는 임시 벼슬) 박숙정(朴淑貞)이 현재의 방해정(放海亭)의 북쪽에 세웠던 것을 1508년(중종 3년)에 부사(府使) 한급(韓汲)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경포대를 중심으로 8경이 있는데, 녹두일출(菉荳日出 녹두리의 해돋이), 죽도명월(竹島明月 죽도에서본 밝은 달), 강문어화(江門漁火 강문의 고기잡이 배의 불빛), 초당취연(草堂炊煙 초당마을의 밥짓는 연기), 홍장야우(紅粧夜雨 홍장에 내리는 밤비), 증봉낙조(甑峯落照 증봉에서 바라보는 저녁놀), 환선취적(喚仙吹篴 환선에서 부는 피리 소리), 한사모종(寒寺暮鐘 한사에서 해그름에 들려오는 종소리)을 말한다.
지금도 경포대를 중심으로 해운정(海雲亭), 방해정(放海亭), 경호정(鏡湖亭), 취영정(聚詠亭), 금란정(金蘭亭), 호해정(湖海亭) 등이 줄지어 있어도 옛 선인들의 향기를 맡을 만 한 곳은 한곳도 없으니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는 전설속에 묻고 말아야 겠다.
하조대(河趙臺) : 조국 분단의 뼈아픈 상흔이 남아 있는 북위 38도선. 주문진에서 9km 북쪽에 돌에 새긴 ‘38선’표지와 ‘38선 휴게소’가 있고, 여기서 2km만 더 가면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소재지 하광정리(下光丁里)에 ‘하조대 입구’ 안내표지판이 있다.
하조대(河趙臺)는 조선초기 개국공신 하륜(河崙 1347~1416 최영의 요동공격 반대 양주로 귀양, 제1,2차 왕자의 란 때 이방원을 도와 태종 옹립의 일등공신, 태종 16년 70세의 나이로 함길도에 있는 선왕<先王> 이성계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과 조준(趙浚 1346~1405 고려 우왕때 강원도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이성계의 일파로 우왕의 폐위를 모의, 1392년 이성계 추대 일등 개국공신,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 주장, 1400년 태종으로 옹립, 영의정과 부원군에 진봉)이 고려말에 은거하며 지내던 곳이라 고도 하고, 만년에 같이 보내던 곳이라 고도 한다. 아무튼 이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붙인 정자이다.(현지인 들은 또다른 전설이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선 정종때 정자가 세워졌고, 조정의 한 참판이 이곳을 지나다 하륜과 조준의 얘기를 듣고 큰 바위에 ‘河趙臺’라 새겼다.고 한다. 팔각정자가 있었으나 6.25때 불타 버렸고, 지금의 육각정자는 195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바닷가 정자앞에는 기암괴석들이 죽순처럼 솟아 있어 우애있고 정감어린 바위 형제들을 보는 것 같다. 하조대는 하조대해수욕장(1976년 개장, 너비 100m, 길이1000m,약 2만 5천평 수심이 얕고 완만한 경사 배후에 송림<松林>)을 지나 언덕길 왼편으로 85계단의 계단(1km)을 오르면 된다
오죽헌(烏竹軒) :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보물 제165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양식.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우리 나라 주택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현재는 관광지로 국적없는 한옥(韓屋)모양의 집들이 꽉차있는 이곳에 수많은 관람객과 수학여행단이 쉴 사이 없이 드나들고 있어 옛 정취는 간데 없고 먼지만이 자욱하다.
栗谷 李珥(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와 정치가로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申)씨.)는 1548년(명종 3년) 1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 해 하산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했다. 그해(22세 되던 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하면서 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 졌다.
29세 때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승지직과 목사, 관찰사 등 중앙관서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선조 9년(1576) 당파싸움(동인과 서인)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 45세에 다시 대사간으로 복관(復官). 다시 48세 때 동인의 강력한 탄핵으로 관직을 버리고 율곡리로 돌아와서, 다음 해 대사동(大寺洞)집에서 죽어,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 조선 중기의 여류 서화가(書畵家).
강릉 출생.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文章)․침공(針工)․자수(刺繡)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가 전해진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이율곡(李栗谷)과 너도 밤나무 : 신사임당이 이율곡을 낳은 해에 어느 날 오죽헌 앞을 지나가던 노승(老僧)이 오죽헌에 들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갔다. ‘밤나무 백그루를 뒷산에 심어 10년 동안 잘 길러라. 10년 후에 내가 와서 밤나무 백그루를 확인 할 터이니 그때 한그루라도 죽이거나 해서 모자라면 어린 이율곡을 내가 대려 갈것이니라’그후 사임당 신씨는 율곡을 살리겠다는 일념에 뒷산의 밤나무를 지극 정성 잘 길렀다. 10년이 되던 어느 날 노승이 나타나서 밤나무를 세기 시작했다. 한그루, 두그루, 세그루, … 해서 아흔 아홉그루를 세었으나 백그루째의 밤나무가 없었다. 한그루가 그만 죽고만 것이었다.아흔아홉그루, 아흔아홉그루,… 아무리 세어도 아흔아홉그루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옆에 있던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 교목하나가 “나도 밤나무요!” 하니 노승은 “뭐 너도 밤나무냐?” “그렇소” 하니 노승은 홀연히 연기속으로 사라지면서 “어머니의 지극 정성이 산천초목이 모두 감복하구나 …”라고 하면서...이렇게되어 그후 이나무는 너도밤나무(평균높이 20m. 잎은 타원형이고 끝은 뾰족하고,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타원형으로 포(苞)속에 1~2개가 있어 흡사 밤나무와 같다.) 가 되었다. 목재는 가구재, 합판재로 쓰이고, 한국의 특산종으로 주로 울릉도에서 많이 자란다. |
정동진과 등명 낙가사 : 정동진(正東津 경복궁에서 볼 때 정동쪽으로 있는 나루터)은 이곳에 있는 기차역과 역구내의 소나무가 인기 TV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 장소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그 전에야 이곳을 아는 몇몇이 한적한 해수욕장을 찾아오거나 지나는 길에 잠깐 들리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탁트인 광할한 동해바다, 해돋이 때 해와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언덕, 6km이상 전개되는 깍아지른 해안절벽, 촌로(村老)의 숨결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은 간이역과 해풍으로 인해 휘어져 자라버린 해송 한그루, 역사(驛舍)바로 앞에는 손으로 아무리 움켜 쥐어도 손가락사이로 다 빠져버리고 마는 은빛 모래알이 깔려있는 해수욕장, 이 모두가 정동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절경이며, 밤에는 먼 바다에 뜬 수십척의 오징어배의 불빛 때문에 환상적인 밤바다를 연출하기도 한다.
여기에다 정동진역(正東津驛)은 세계에서 바다와 제일 가까운 기차역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기차역이다. 그래서 그런지 역무원들은 친절하고 관광객과도 쉽게 어울린다.
그러나 옛날 여기를 찾았던 사람이면 두 번 다시 가지 말기를 지금은 옛날의 포근함이 전혀 없고 위락시설만 들어 서있고, 숙박 음식 등이 온통 바가지 상혼만이 존재한다.
지금은 특히 해돋이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썬크루즈 리조트’(입장료를 받는다)에는 전망대, 범선 까페 등이 있다. 모래시계공원, 정종허브랜드 등이 있다
정동진에서 북쪽으로 3km정도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 울창한 계곡에 등명 락가사(燈明洛迦寺: 정동진리 산 17번지)가 바다를 굽어 보며 서있다. 락가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수다사(水多寺)라고 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지에 바다건너 외침을 막고자 수중보궁을 모셨다고 한다.
고려 초기에 등명사라고 개명하고 수많은 스님들이 참선수도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이곡(李穀)이 등명사에서 해돋이 광경을 보았노라.’라고 기록 될 만큼 유명한 절이다.
고려 시인 김극기(金克基)는 “불법의 높은 길이 푸른 연봉에 둘러 있고 층대위에 높은 사전(寺殿)은 겹겹이 공중에 솟아 있다. 그윽한 숲은 그늘을 만들어 여름을 맞이하고 늦게핀 꽃은 고운빛을 머금어 봄을 아름답게하여 봉오리의 그림자에 걸렸고 절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골짜기에서 불어내는 바람에 전한다.”라 하였다.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절에는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즐겨찾던 곳임을 알 수 있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이 위치하였으며, 풍수지리로 볼 때 강릉 도호부내에서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으며 이곳에 공부하는 수학도(修學徒)가 삼경(三更)에 절에와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 한다.”
또 한 전설은 문수․보현 보살이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동해로 내려와서 오대산에 모시고, 보현보살은 보현사에, 문수보살은 강릉 한송사에, 이곳 수다사(水多寺=洛迦寺)에는 오백 나한이 머물었다 한다.
조선 초기 개국공신들은 불교를 말살하고 숭유정책을 펴고자 할 때, 제일 먼저 불교말살 정책으로 정동에 있는 낙가사의 부처님에게 일월(日月)의 정기가 내렸음을 알고 온갖 누명을 씌워 절을 폐사시킬려고 했다.
마침 임금의 눈에 안질이 생겼는데 점술가에 물으니 낙가사의 쌀 뜬물이 바다로 흘러 용왕이 노하셨기 때문에 안질이 생겼다 하여 낙가사를 폐사시켜 그 후 500여년동안 등명 등불을 끄버리고 불교의 정기를 없애니 옛신라 오층탑만이 민가와 함께 외롭게 서 있었다.
그 후 1957년경 경덕(景德) 영해당(靈海堂)선사가 민가를 옮기고 작은 암자를 짓고 관음보살이 살고 있는 산의 명칭을 따 락가사(洛迦寺)로 개명하여 여러 건물을 짓고 지금에 이르렀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4교구 강릉시 정동 괘방산 등명 락가사의 극락보전(極樂寶典)은 극락정토의 주제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정토삼부경에 의하면 지금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는 곳에 극락정토가 있다 한다. 극락이란 명칭은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안양(安養)으로 번역된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천억 국토를 비추기 때문에 광명무량(光明無量), 그 수명이 한량없어 천억겁으로도 셀수 없다고하여 수명무량(壽命無量)이라고도하여 극락보전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한다. 또한 주불의 이름을 따서 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 양쪽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자리한다.) 낙가사에 유일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오층석탑(강원 유형문화재 제 37호)으로 구성과 탑신부의 건조양식으로 보아 고려전기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낙가사엔 등명약수가 있어서 오가는 길손들에게 갈증을 해소시켜 준다. 약수는 호국 등명낙가사 경내의 오른쪽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산성(ph4.1, 명반,녹반)약수이다. 경내 영산전(오백나한이 모셔진 곳)이 준공 될 때 발견된 약수로 모든 약수가 그러하듯이 만병통치용이고 피부병, 빈혈 등에는 특히 좋다.
통일공원 안보 전시장 : 북한 무장 간첩이 침투하여 좌초한 해안이 낙가사에서 북쪽으로 1km 남짓한 곳에 있다. 무장잠수함(길이 35m, 폭 3.5m, 높이 6.7m, 무게 325톤, 수중 최대속력 7.5노트, 승선인원 30명)이 지난 96년 9월 18일에 26명의 잠수함 무장간첩의 침투를 우리의 조작극이라고 우겨대는 북한 그들의 만행을 낙가사는 지켜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 안인진리 해안이 여기이다.
여기에 침투했던 북쪽 잠수함과 우리 나라 구축함을 육지위로 올려 전시하고 있는데 안보 관광지로 볼만하다. 육지 쪽 침투로를 따라 공원도 만들어서 동해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여름에는 지나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는 관광객이 모두 한번씩 들려서 가기 때문에 시장 꼭 바닥 같다. 잠수함 속을 한번 구경해 보는 것도 신기하고, 퇴역한 해군 구축함을 오라가 보는 것도 괜찮다. 어린이들을 위한 관광코스로는 볼만하다.
정동진으로 가는 길은 기차로는 토,일,월,공휴일 운행하는 청량리발(22:30) 정동진착 (익일 05:23)인 열차가 있다. 버스로는 고속버스로 강릉까지 가서 택시이용, 강릉 동부시장앞에서 정동진행 버스(1시간 간격)를 타면 된다. 정동진역 안내 0391-44-5062
북한 무장 잠수함 침투 및 좌초 안내․‘96.9.14 05:00경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장(대좌)등 26명이 남한의 전략시설 정찰 등의 목적으로 무장 잠수함에 승선하여 함남 낙원 잠수함기지 출발.․‘96.9.15 20:00경 강릉시 안인진리 전방 해상에 도착하여 정찰조 3명을 내륙으로 침투시킨 후 수중대기.․‘96.9.17 21:00경 해안에 접근하여 정찰조 복귀 시도 중 안내조장으로부터 “파도가 세니 해안 가까이 접근하라”는 무전 지시를 받고 후진으로 해안에 접근하던중 파도에 휩쓸리면서 좌초되어 복귀 포기.․같은 날 23:50경 증거인멸을 위한 잠수함의 내부를 방화하여 주요 기물과 문건등을 소각 및 파손한 후 각자 개인 화기등으로 무장하고 잠수함을 탈출하여 괘방산으로 도주, 북으로 육상 복귀 시도.․‘96.9.18~11.5(49일간) 대간첩작전을 전개하여 소탕.[전과 및 피해]․전과 : 26명(생포 1명, 사살 13명, 동료에 의한 사살 11명, 미확인 1명)․피해 : 39명(전사 11명, 부상 22명, 민간인 사망 6명) |
※강릉칠성대 : 맑다못해 유리알같이 투명한 계곡물이 산의 적막을 깨뜨리며 흘러내리는 칠성대 계곡. 안개에 싸인 정상주변 일곱게 바위는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어달리. 해발 953m, 여기가 ‘96잠수함 무장간첩소탕작전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있다.)
어달리의 주봉으로 왕산면 묵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칠성대는 ‘산(山)’이 아니라 ‘대(臺)’이다.
보통 우리는 산을 대(臺)라고 부를 때는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뛰어난 곳을 말하며, 백운대(북한산), 입석대(무등산), 문장대(속리산)등이 이렇게 불라어 진다. 산정상에 바위 일곱 개가 북두칠성 같이 놓여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칠성대에는 신라 선덕여왕 3년(704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법왕사를 갖고 있다. 법왕사앞 계곡을 지나면 등산로가 시작된다. 가파른 오르막 길을 50여분 남짓 오르면 사방이 확 트이며 일곱 개의 바위가 한눈에 들어 온다.
20여분을 더오르면 910고지에 닿고 이곳부터 정상까지 20여분 걸린다.
능선은 칠성대계곡을 중심으로 ‘U’자형으로 이어진다. 정상을 지나면 주인없는 무덤들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2~3분 더내려가면, 왼편등산로가 보이고 이길은 법왕사뒤로 연결되고, 오른쪽길은 20여분 내려가면 칠성대계곡에 닿는다. 총 산행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범종(梵鐘),법고(法鼓),운판(雲版),목어(木魚)에 대하여오랜 옛날 법력(法力) 높으신 조사 스님들께서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육도중생(六道衆生 : 중생들이 생전에 한 행위에 따라서 저마더 가서 살게 되어 윤회하는 6가지의 길. 즉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의 길로 가양할 중생들)을 법고로서 무상법문(無常法文)을 설하여 제도(濟度: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건지어 극락으로 이끌어 주는 일)하기 위해 만들어 졌던 것으로서법종(梵鐘)은 소리가 천상은 물론 지옥까지 울려 퍼져 가는데 천상의 하늘이 삼천(三天)이 있어 상계(上界), 중계(中界), 하계(下界)로 나뉜다.◇사시(四時=晝=낮)에 치는 상계(上界)는 욕계(欲界)로 , 18천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18번 타종한다.◇새벽에 치는 중계(中界)는 색계(色界)로 , 28천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28번 타종한다.◇저녁에 치는 하계(下界)는 무색계(無色界)로 , 33천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33번 타종한다.묵직한 종소리가 지옥 중생은 물론 천상의 중생을 제도함에 이 종을 울림으로서 자타의 사후 왕생 발원을 위함이다.법고(法鼓)는 축생의 가축으로 만들어 졌기에 법고를 울려 소리를 냄으로서 축생의 과보(課報)를 받고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운판(雲版)은 구름모양을 한 법기(法器)로서 우리의 육신을 떠나 갈곳을 찾지 못한 중음신(鬼神)을 위해 소리를 울림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목어(木魚)는 수류(水類)중생을 제도하기 위햐여 기원하는 법기이다. |
* 단경골 : 강릉 시민만 아는 심산유곡. 이곳에 외지인이 찾아들어 또 오염될까봐 걱정이 되는 이곳, 단경골은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의 군선천 상류계곡을 말한다. 해발 1035m의 만덕봉과 954m의 칠성대를 잇는 능선에서 발원한 단경골은 약 10km를 넘는 심산유곡이다. ‘96.9.18 안인진리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때 공비의 도주로 였던 이곳, 그때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 3명이 아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사살된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 계곡에는 바위 곳곳에 유탄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어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짐작케 한다.
공비의 잔당이 숨어든 곳이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 단경골은 그만큼 오지였다. 동해안에서 차로 30~40분이면 들어갈 수 있지만 시멘트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이어진다. 단경골 주민은 10여가구. 대부분 독신자들이 사는 독거촌이다. 단경골은 30년전만 해도 꽤 이름난 계곡이었다. 단경골을 넘으면 정선군 임계. 예전에는 나무를 베어다 실어나르는 산판로가 있었다. 지금도 흔적은 있지만 이젠 풀섶에 가려 차가 다니긴 힘들다. 계곡은 크진 않지만 수려하다. 길이 11㎞. 제법 가파른 절벽으로 감싸진 곳도 있고 편편한 곳도 있다. 물은 맑고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길 만한 야트막한 포인트도 여러곳 된다.
하류쪽은 아는 사람들이 많아 여름이면 입장료를 받을 만큼 붐빈다. 그러나 비포장길 5km이상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인적마져 끊긴 계곡과 처녀림이 함께 어우러진 깊은 계곡을 이룬다.
단경골 끄트머리에는 담정그레이드 농원이 있다. 원두막 한 동을 빌리면 위에 텐트를 치고 묵을 수 있다. 취사도 가능하다. 5인 가족 기준 5만원. (033)645-7007
가는 길은 강릉에서 동해고속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6km에 안인진리 I.C.(모전 I.C)에서 안인진으로 좌회전한 후 7번 국도로 700m 남진 하여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된다.
이곳이 계곡을 좋아하는 이들의 휴식처라면 바다와 해안 절경이 어우러진 정동진이 바로 이 근처이다. 단경골에서 나와 안인진리로 들어서서 남진하면 해식애(海蝕崖 : 바닷물에 의해 깍여진 해안절벽)가 정동진까지 연결된다.
죽서루(竹西樓) : 강원 삼척시(三陟市: 1986년 1월 시로 승격 영동지방에서 유일하게 중공업 지역 도시)성내동에 있는 조선 초기의 누각(보물 제213호).
정면 7칸 측면 2칸 팔작지붕(전에는 맞배지붕 건축물으나 여러번의 수리로 원형이 많이 변했음). 삼척시의 서편으로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위치한다.
고려 충렬왕 9년(忠烈王 1275년)때 간관(諫官)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266년 고려 충렬왕 원년에 서루(西樓)에서 지었다는 이승휴(李承休)의 시(詩)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403년(태종 3년)에 삼척부사(府使) 김효손(金孝孫)이 구기(舊基: 옛 터나 기초)에 의거 중창한 후 언덕위 대나무밭 동편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고, 또는 당시 삼척 명기(名妓) 죽죽선(竹竹仙)의 집이 동편에 있었고, 서쪽에는 이 루(樓)가 있었다 하여 죽서루라 이름하였다 한다.
“루(樓)에 올라 서편을 바라보면 태산준령의 기복(基伏)이 서로 연하여 그림폭과 같이 전개되고 루하(樓下) 절벽에 역사굴(力士窟)이 있으며 기암괴석(奇巖怪石) 기화요초(琪花瑤草)의 명미(明媚)와 오십천이 굽이굽이 흘러드는 응벽담(凝壁潭)에 부몰(浮沒)하는 뭇고기의 번쩍이는 풍경은 실로 관동 제일루로 옛날부터 이 승경(勝境)을 찬상(讚賞)하여 시인 묵객이 사시로 연락 두절이다.”
루상에 게시한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1837년 조선 헌종 3년에 부사 이규헌(李奎憲)의 글씨다. 또 제일계정(第一 溪亭)은 현종 3년(1662년) 부사 허목(許穆)이 쓴 것이고,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년)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썼으며, 조선 숙종․정조․율곡 이이의 시도 판에 게시되어 있다.
이 누각의 특이한 점은 오십천 층암 절벽위에 세운 이 루는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삼아 암반 높이에 따라 각기 다른 크기의 기둥을 세워, 하층 17개 기둥으로 석초(石礎)가 8개이고, 암초(岩礎)가 9개이고,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누각의 원래는 정면이 5칸이었는데 좌우 한칸씩 늘렸다. 누각안에는 당대 명인들이 남긴 편액들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관동제일루라고 호칭되는 죽서루는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두타산의 푸른숲, 오십굽이나 굽이쳐 흘러 동해로 흐른다는 오십천물이 응벽담을 이루는 절벽위 죽림(竹林)속에 세워졌다.
이 누각의 북쪽으로는 삼척 도호부 객사인 진주관과 응벽헌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연건당(燕乾堂), 서별당등의 건물이 있었다 한다.
선인들은 이곳에서 절경에 취하여 많은 시를 읊었다. 그중 송강이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가사문학의 대표작인 관동별곡을 지으면서 또 한편의 죽서루를 칭송한 한시(漢詩) 한수를 풀이하면
강하늘의 죽서루 천상누각들을 비추이고
하늘의 선녀소리 들리어 오건마는
사람은 아니 보이고 산봉우리만 강상에 있어
바닷구름 다 지나가도 달빛만이 곱게 비치네.
또 정철의 관동별곡 원전에 나오는 죽서루를 풀이하면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차라리 한강으로 향해 남산에 이르고져
관원의 발길은 한도가 있는데
경치는 보고 보아도 싫증나지 아니하니
회포도 많고 많아 나그네 시름 둘데 없다.
송강 정철의 죽서루에 대한 칠언율시(七言律詩)의 한시(漢詩)
關東仙界 陟州樓(관동선계 척주루): 관동 경치좋은, 삼척루에
虛檻憑危 夏亦秋(허함빙위 하역추): 우뚝솟은 난간 높은 곳에 기대니, 가을처럼 선선하여라
天上玉京 隣北左(천상옥경 린북좌): 하늘나라 옥황상제 계신 곳은, 북동쪽에 이웃 하고
夢中銀潢 聽西流(몽중은황 청서류): 꿈결의 은하수는, 서쪽으로 흐르는 듯 들려오네
疏簾欲捲 露華濕(소렴욕권 로화습): 성기고 엉성한 주렴 걷어 올리니, 이슬빛이 젖어오고
一鳥不飛 江色愁(일조불비 강색수):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물빛은 수심도 깊어라.
欄下孤舟 將入海(난하고주 장입해): 난간 아래 외로운 배, 바다로 향할 때
釣竿應拂 鬱陵鷗)(조간응불 울릉구): 낚싯대 힘껏 던지니, 울창한 언덕에서 갈매기 우네
※삼척 덕풍계곡
삼척 덕풍계곡 역시 3~4년 전만해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산골이었다. 그만큼 원시의 계곡과 때묻지 않은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계곡 물소리에 물소리처럼 맑은 선율을 보태던 피아니스트 가족, 서울에서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다며 더덕주․석류주를 잔뜩 권하던 칠순노인…. 사람들은 순박하고 계곡에는 오염원 하나 없었다. 덕풍마을 주민은 11가구. 한국전쟁도 모르고 지났다고 한다. 하지만 삼척시가 계곡 초입을 개발하면서 요즘은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출렁다리도 없어졌다. 그래도 상류에는 옛 모습이 남아 있다. 마을에서 3㎞를 오르면 용소골. 이곳에서부터 먹물같이 깊은 소가 이어진다. 덕풍계곡은 응봉산으로 이어지고 응봉산을 넘으면 덕구온천이다. 7번 국도를 타고 삼척 원덕까지 간다. 원덕에서 태백 방향 416번 지방도로 가곡천을 따라간다. 모전 바로 앞 3거리에서 풍곡초등학교 쪽으로 들어가면 덕풍계곡이다. 풍곡리에 풍곡 통나무집(573-0777), 우리슈퍼(573-1146), 돌집민박(573-9196) 등이 있다. 가곡 자연휴양림이 가깝다. 통나무집 7평형 4만원, 10평형 6만원, 15평형 8만원. 573-4657
釣 WHHHHH조간 환선동굴(幻仙洞窟, 일명 대이동굴<大耳洞窟>, 천연기념물 제178호) :
삼척 시내에서 서쪽으로 38번 국도를 따라 4km정도 가면 태백시와 동해시를 잇는 영동선 도경역을 만나고,
계속 태백시쪽으로 내려가 삼척군 신기면 신기리 신동국교앞에서 안내표지판(⇒환선동굴)에 따라 우회전하면 8.6km 지점에 삼척의 가장 오지인 신기면 대이리 대이동굴(환선동굴)주차장이 나타난다.
내려 10분 정도 올라가면 굴피나무집(참나무 껍질을 굴피)이 있는 동네(3가구)가 있다. 여기서 30분가량 만만치 않은 큰길을 따라 올라가면 철구름다리가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계곡 물위를 가로질러 폭포위에 걸려있다.
여기를 지나 2~3분 정도가면 300계단의 엄청난 철계단을 만나게 된다. 계속오르면 환선동굴에 도착하게 된다.(이 지역은 통천석회암 층에 속하는 석회암 지대로서 분포되어 있는 환선굴(총연장 4km), 관음굴(총연장 1.2km), 제암풍혈, 양터목 세굴, 덕발세굴, 큰재세굴 등을 총칭하여 대이리 동굴지대라 하며 부근에는 카르스트지형이 산재해 있다.)
아마도 삼척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38번 국도 좌우에 전개되는 오십천(五十川)계곡의 무릉도원을 보고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幻仙洞窟은 덕항산 해발 730m 지점 중턱에 위치한 것 부터가 우리나라의 알려진 다른 굴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大耳里), 아직도 강원도 두메 산골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곳, 그기다 산수와 기암괴석이 중국 북경의 용경협을 연상케 한다.
첩첩 산중의 때묻지 않은 자연이 사계절 저마다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이곳을 찾으면 맨 처음 반겨주는 것이 환선굴에서 흘러나와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 부어주는 폭포를 만나게 된다.
동굴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지하도시의 광장처럼 1000여평의 넓은 공간을 만난다. 이곳 동굴천정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의 장관은 거대한 샤워기를 연상케 한다.(이 물줄기는 비가 올 때만 볼 수 있으므로 행운도 따라야 함)
환선굴은 중국 심양의 본계수동을 축소한것과 흡사하여 물이 풍부한 것이 그 특징이다.(본계수동은 자연 그대로를 입구로 했지만, 여기는 동굴 입구를 인조 바위로 출입구를 만들어 조잡하기가 이를 대 없다. 한말로 말해 전형적인 자연훼손 현장이다.) 그러나 내부에는 한국의 본계수동이다. 엄청난 물과 수많은 폭포가 있어, 우리는 동굴내에서 또 하나의 자연계를 만날 수 있다.
이 동굴은 4억5000만년 전에 생성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생성과정이 진행되는 석회암 동굴로 현재까지 발견된 동굴 길이는 6.2km, 높이 30m에 달하지만 일반에 공개되는 코스의 길이는 1.2km 정도로 1시간 30분정도면 관람할수 있다.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알려진 어느 동굴보다도 크기가 방대하다. 서식하는 생물도 눈이 퇴화된 귀뚜라미, 도룡룡등 34종이 발견되어 다른 동굴보다도 월등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종유석의 모양과 색깔도 다양하고 아기자기 하면서도 웅장함이 느껴진다. 10여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6개의 폭포가 있는 환선굴은 동굴의 생성, 성장, 퇴화과정이 모두 있어 동굴의 윤회(輪廻)도 알 수 있다. 성모마리아상과 딱다구리, 옥좌대 등 수많은 형상을 한 종유석과 석순이 즐비하다.
특히 옥좌대는 4억5000만년 전부터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이 옥좌대를 만들고 있어 이 것이 환선굴의 생성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나무로 말하자면 나이테와 같음)가 된다. 동굴내의 기온은 10℃정도로 거의 일정하다.
이 곳의 또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참나무 껍질을 벗겨 포개고 이어서 지붕을 만든 300년이 넘은 굴피집 (300년전 아래동네 대이리 너와집(나무판으로 지붕을 한 집)에서 분가해서 세운집으로 1930년경부터 너와채취가 어려워져 그 대신에 굴피를 사용해서 지붕을 만들었다. 굴피는 3년주기로 지붕을 다시 덮어야 하는데 굴피는 여기서 일부가 나지만 대부분 외지에서 사와야 한다.)이 있다.
옛날에는 화전민들이 간이형태의 집으로 이용하여 왔었는데, 화전민이 사라진 지금은 굴피집이 간이형태의 집이 아닌 영구주택 형태의 집으로 여기에 남아 있어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 12대째 살고있는 굴피집(민속자료 223호)에는 토종벌꿀, 장뇌, 옥수수 등 먹거리 뿐만아니라, 토속음식과 황토방(황토흙으로 벽을 바른방) 민박도 한다. 신동초등교 대이분교 앞 평지말에는 너와집이 있어 민속가옥으로 지정되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 환선동굴로 가는 길은 강원도 최남단 원덕에서 가곡면 태백, 도계로 이어지는 416번 지방도, 427번 지방도, 38번 국도는 환상의 계곡이다.
삼척 시내에서 26km, 30분 가량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삼척과 원덕읍 임원항과 함께묶어 산과 바다를 묶은 페키지 여행도 해 볼 만하다.(문의: 환선굴 관리 사무소 039-770-3255)
삼척 가곡천 : 아마존 밀림이 없으면 지구상의 생물이 과연 이만큼 살수 있을까? 그래서 아마존은 세계의 심장이다.
한국인이 그래도 천세만세 누릴 수 있는 영광도 강원도 태백산 준령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강원도를 한국의 ‘심장’이고 ‘허파’라고 하며 강원도를 사랑한다. 이미 설악 동해지역은 서울 사람들로 인해 시장바닥이 된지가 오래전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직도 때묻지 않고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원북에서 가곡천을 따라 416번, 427번 지방 도로 변의 계곡과 태백, 도계, 삼척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가곡천 계곡은 골짜기가 깊어 인적이 드물다. 해발 1200m가 넘는 응봉산의 깊은 계곡은 천렵과 물놀이에 더 없이 좋은 여울과 폭포, 호소(湖沼)가 있어 여름에는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이다.
바로옆 덕풍계곡은 응봉산의 용소골과 음지골 등 몇줄기의 지류가 모여 형성된 곳으로 초입부터 원시림이 무려 15km나 이어 진다.
427번 지방도를 따라 가곡천을 끼고 도계읍 신리에 이르면 참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이어 돌로 눌러 놓은 너와집을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민속유물 신리너와집) 이 동네를 빠져나와 약 10여km를 가면 미인폭포를 만난다. 높이 50m의 낙차를 자랑하는 이 폭포는 거대한 암벽사이로 물줄기를 뿜어 내는 한 마리의 용이다. 보기만해도 시원하다. 폭포입구에는 작은 암자 혜성사가가 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가봐도 좋다. 숙박지로는 가곡자연휴양림(0397-73-4657)에서 방갈로나 야영지를 이용할 수 있다.
망양정(望洋亭) : 경북 울진(蔚珍)에는 구산리 삼층 석탑 등 고색창연한 문화재가 많은 고장이다.
그 중에도 가장많이 알려진 망양정(望洋亭)은 망정정(望淨亭)이라고도 불리는데 울진군 근남면 삼포리 망양해수욕장과 같이 있다.
해수욕장 주차장에서 정자로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올라서면 동해의 망망대해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누각이 나타난다. 그윽한 숲속에 싸여있어 은밀한 곳을 찾는이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망양정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철종 10년(859년)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그 후 조선 숙종대왕은 「關東第一樓」라는 편액을 시와 더불어 하사했다.
흔히 들 망양간월(望洋看月: 하늘에 걸린 달)의 명승지로 망양정과 함께 월송정(月松亭, 평해면 월송리), 연호정(蓮湖亭, 울진읍 연지리)을 꼽고 있는데 특히 월송정은 관동팔경에도 들어 갈 만큼 절승이다.
월송정(越松亭) : 경북 울진군 평해읍(平海邑) 월송리(月松里)에 있는 정자(亭子)로 신라시대의 화랑들(永․述․南石․安祥)이 이 곳의 울창한 송림에서 달을 즐기며 선유(仙遊)하였다는 정자이다.
때로는 ‘月松亭’이라고도 하며 명승을 찾는 시인․묵객들은 하나같이 탄복한 곳이라 한다.
원래 이 정자는 고려시대에 이미 월송사(月松寺)부근에 창건 된 것을 조선 중기 연산군때의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혹은 그가 창건하였다고도 함)하였다고 하며 오랜 세월에 퇴락한 것을 향인(鄕人)들이 다시 중건 하였으나 한말에 일본군이 철거해 버렸다.
1969년에 재일교포들이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아서 해체하고 1980년 7월 현재의 정자(정면 5칸, 측면 3칸, 26평)로 복원하였으며, 현판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崔圭夏)의 휘호로 되어 있다.
관동 8경을 꼽을 경우 월송정 대신 강원 통천군 흡곡(歙谷)에 있는 시중대(侍中臺)를 꼽는 이도 있다. 어떻던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엔 절경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성류굴(聖留窟) : 성류굴은 근남면(近南面) 구산리(九山里)에 위치. 처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된 석회암 동굴로 탱천굴(撑天窟)․선유굴(仙遊窟)이라고도 한다. 입구가 선유산(仙遊山) 절벽밑의 왕피천(王避川)가에 있는 좁은 바위 구멍으로 들어 간다.
한국에서 가장 유서깊고 처음 알려진 동굴로, 고려말의 학자 이곡(李穀)이 성유굴에 대해 언급한 『관동유기<關東遊記>』는 한국 최초의 동굴탐사기이다.
동굴은 남서쪽에서 북서쪽으로 향해 전개되고 굴내부에는 9개의 동방(洞房)과 5개의 호소(湖沼)가 있으며, 동양제1의 각양각색의 석순, 석탑, 석주, 종류석군으로 이루어 져 있다.
특히 제3동방은 직경 50여m에 달하는 큰 동방으로 물의 깊이가 8m에 이르는 ‘마(魔)의 심연(深淵)’이라는 동굴호가 있어 벽면에 발달한 종유석이 수면에 잠기는 절경을 보인다.
동굴안의 평균기온은 16℃로 거의변함이 없고, 한국의 석회암 동굴중 최남단에 위치한다는 지형학적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동굴이다.
많은 관광객에 의해 오염되고 더러는 훼손되었으며 종유석을 떼어간 흔적들이 보이긴 하지만 오밀조밀한 맛과 멋이 있어 자연학습장이나 천지조화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주굴 길이 약 470m로 옛날에는 피난굴로도 쓰여 곳곳에 그을음이 묻어 있어 주방으로 쓰인 토굴을 연상케 한다.
황지(黃池): 황지는 현재 황지시 황지3동의 시가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위의 고층건물에 둘러 싸여 있어 옛스러움은 없지만 공원으로 서의 기능은 다하고 있다. 시가 중심이라서 찾기전에 선입견으로 황지는 생활 폐수, 오수 등으로 지저분할 것 같지만 얼마나 맑은 물이 흐러는지 심심산골의 맑은 샘물과도 같다.
황지의 크기는 둘레가 100m, 깊이 4m인 상지(上池), 50m인 중지(中池), 30m인 하지(下池)로 된 세 개의 못으로 나뉘며, 상지 남측에 깊이를 잴 수 없는 수굴(水窟)이 있어 수원(水源)이 된다. 수량은 일일 약 1000t이 용출되며 수온은 항상 10℃~15℃를 유지하는 해발700m 고지대에 있다. 이 지역주민들의 상수도 취수장으로 사용할 만큼 오염되지 않은 곳이다.
고지도(古地圖)인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옛 문헌에 의하면 이곳은 옛신라와 가야의 문화를 꽃피우며 한민족과 숨결을 같이한 낙동강 천삼백리의 첫 여울이 울리는 발원지라 하였다.
이못이 불가사의한 것은 가뭄이나 장마시에도 수량(水量)이 일정하여 영지(靈池)라고도 불리며
전설에 따르면 옛날 황씨 성을 가진 한 부자(富者)의 집터였는데, 황부자는 돈이 많아 풍족하게 살았지만,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 노랭이였다.
어느 봄날 황부자가 외양간에서 소 거름을 쳐내고 있었는 데, 옷차림이 남루한 노승이 시주를 청했다.
인색한 황부자는 시주하기를 거절했으나 노승은 물러나지 않고 거듭 염불을 외며 시주를 청했다. 이에 그만 화가난 황부자는 시주대신 쇠똥을 한가래퍼서 시주바랑에 넣어 주며 이거나 받아가라고 하였다.
노승은 조금도 노하지 않고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서는 데, 마침 아기를 업고 방아를 찧던 며느리가 이를 보고 부끄러히 여겨 시아버지 몰래 자기가 찧던 쌀 한 바가지를 퍼, 시주를 하며, ‘시아버님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용서를 빌자, 노승이 말하기를 “ 이 집은 운이 다했으니 아기를 업고 속히 소승의 뒤를 따라오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라는 말에 며느리는 곧 노승을 따라 나섰다.
송이재를 넘어 구사리(지금의 도계읍) 산마루에 이르렀을 때, 뇌성벽력과 땅이 갈라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에 며느리는 깜짝 놀라 노승의 당부를 잊은 채 뒤돌아 보는 순간 아기를 업은 며느리는 돌이 되어 버렸고, 황부자의 집은 땅이 꺼져 버려 집터는 연못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삼척군 도계읍 구사리 산마루에는 황지쪽을 뒤돌아 보며 아기를 업은 채 서 있는 돌미륵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함께 따라간 강아지도 돌이되어 그 앞에 있다.
또한 그때의 집터는 상지이고, 방앗간 자리가 중지, 변소터가 하지로 변했다. 황지라는 지명의 유래도 뇌성벽력과 함께 황부자집의 옛터가 연못으로 변했다는 전설에서 온 것이다.
아무래도 하늘은 이 노랭이 황부자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작정하고, 지금도 바닥나지 않은 재산, 즉 맑고 맑은 식수를 주어 천삼백리 낙동강변의 영남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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