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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기

안성 칠장사

by phd100 2021. 9. 2.

 

칠장사(七長寺)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칠현산에 위치한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그 터가 워낙 좋아 조선대에는 인근 세도가들로부터 묘역으로 가꾸고자 하는 끝없는 요구를 받아야 했다.

11세기경 혜소국사가 7악인을 제도한 고사에 따라 산이름을 7현산(七賢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칠현인이 오래 머물다 하여 칠장사로 명하였다.

 

혜소국사(972∼1054) 정현스님이 고려 현종의 명으로 크게 중창했으며(1014) 그 후로도 왜구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기도 하고 나라의 도움으로 중수가 되기를 거듭했다.

절 일원이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경기도무형문화재 제114호), 원통전, 명부전, 나한전, 천왕문, 요사채 등이 있다.

 

동종과 석불입상(보물 제983호), 인목대비 친필족자, <금광명최승왕경> 9책(동국대 박물관 소장), 옥등(동국대박물관 소장), 석탑, 부도16기, 당간과 지주, 사적비, 벽응대사비,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 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등이 있다.

 

석불입상은 신라말 고려초에 조성된 것이고 당간과 지주는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혜소국사비는 정현스님의 것이고 나한전에 모셔진 일곱 나한은 정현스님이 교화한 일곱명의 도둑을 기려 조선 숙종 때 탄명스님이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특히,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역사 소설의 일곱 도적과 병해스님 얘기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신라 47대 협안왕 서자인 궁예가 13세까지 칠정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활연습을 한 활터가 남아있고,

고려시대 혜소국사에 의해 칠악인이 칠현인으로 제도된 일곱현인을 화신인 나한전은 어사 박문수가 기도를 드리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해지며,

당시의 과거 시제인 "몽중등과시" 의 현장이며 옛날에는 과거 시험에 장원을 꿈꾸던 선비들이 많이 찾았고,

현재도 수험생 자녀를 둔 사람들의 공양이 많이 있는 곳이다.

 

사찰 주위로 숲이 우거져 경관이 화려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특히 칠장사 주변에 있는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대나무 수공예품 만들어 왔는데 이 공예품들이 좋은 관광상품이 되고 있다.

칠현산은 높이 492m의 낮은 산인데 아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슭에는 칠장사가 있고 절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둘러싸여 있어 경치를 즐기며 가벼운 등산을 하기에 알맞은 산이며, 특히, 가을단풍이 절경이다.

 

<설화의 예>

* 신라 47대손 현안왕의 서자인 궁예가 10세까지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활 연습을 한 활터가 남아있다.

* 칠장사에서 열반하신 '여인천하' 드라마의 갓바치스님(병해대사)과 제자인 임꺽정이야기의 발원지이며, 천민으로 등용될 수 없는 사회제도를 바꾸려 했던 두 사람의 실화 이야기와 스승에게 조성해 바친 속칭 '꺽정불'이 전한다.

* 고려시대 혜소국사에 의해 7악인이 7현인으로 제도된 일곱 현인의 화신인 나한전은 어사 박문수가 기도를 드라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하며 당시의 과거시제인 '몽중등과시(夢中登科時)'의 현장이다. 시험 합격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1) 칠장사 혜소국사비 (보물488호)

승려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비문(碑文)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김현 선생이 짓고, 글씨는 전중승, 민상제 선생이 구양순체(歐陽洵體)로 썼다.

혜소 국사는 972년(고려광종3) 안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이 이씨요 이름은 정현(鼎賢)으로 10세에 삭발 입산하여 광교사 충회에게 구법하고,

17세에 영통사에서 융철(融哲)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28세에 왕명에 의하여 고승으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으며,

대사는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면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1054년(문종8)에 이 절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

 

이 비신의 높이는 3.4m, 폭은 1.28m이고, 귀부(龜趺)의 귀갑(龜甲)은 방원형, 비몸돌(碑身)의 양면에는 여의주(如意珠)를 가지고 노는 범 비슷한데,

비늘이 있다는 짐승인 이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비 몸돌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비 몸 위에 올려지는 부분인 이수에는 거북과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물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이것은 비의 주인공인 혜소 국사의 영혼을 천상세계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며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

 

2) 칠장사 철당간 (지방 유형문화재 39호)

 

3) 인목대비친필족자 (지방 유형문화재 34호)

크기는 길이 1.1m, 폭 50cm. 재료는 저지(猪指)이다.

인목대비(선조의 왕비)가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당으로 삼아 사찰을 중건하여 친히 김광명(金光明)에게 최승경(最勝經) 10권과 친필족자 1령을 하사한 것인데, 현재는 친필 족자 1령만 보존되고 있다.

 

4) 오불회 괘불 (국보 296호)

5) 안성죽림리삼층석탑

이 탑은 전체 높이가 363cm이고, 지대석은 가로 171cm, 세로 140cm이다.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석탑으로, 중대석은 각 면을 1식으로 마감하고, 갑석은 1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면에 둥근 고리(문비)를 탑몸돌[옥신 : 屋身]에는 양쪽에 모서리기둥 [우주 : 隅柱]을 조각하였다.

2층 이상의 탑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2층과 3층 탑신석은 1층과 같이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옥개석 받침은 각 층 4단을 이룬다.

상륜부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원래 죽산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몇 개의 부재를 모아서 일죽면 죽림리 460번지 성원목장에서 복원한 것이다. 현재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 대웅전 앞에 이전 설치(2005.11.28.)되어 있다.

 

 

<칠장사의 전설>

사내는 샘을 찾고 있었다.

털부숭이 얼굴에 가득한 사내는 계곡에 머리를 들이대고 물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근처에 샘이 있을 것 같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이란 바로 지금 그 사내의 심정 그대로 였다. 한참 계곡을 거슬러 오르던 사내는 흠칫 놀라야 했다.

 

"아니 왠 빛이..."

사내의 눈에 한줄기 빛이 땅에서 치솟아 오르는 것이 들어 왔던 것인데 순간 사내는 목마른 현실 보다는 혹시 금덩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황급히 빛이 솟구치는 곳으로 달려가니 그곳이 바로 샘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물도 얻고 금도 얻는 횡재를 얻었구나."

 

속으로 잔뜩 긴장을 할 겨를도 없이 샘을 들여다 본 사내는 그 맑은 물 가운데서 찬연한 빛을 뿜는 금덩어리를 보았다. 그냥 금덩어리가 아니라 금쪽박이었다.

바가지 모양을 보는 순간 그제서야 갈증이 의식됐고 '이게 왠 금이냐'는 생각에 그 바가지로 물을 떠 마셨다.

참으로 달콤한 물 맛. 손에 들고 있는 금바가지를 기특하게 바라보던 사내는 물도 얻고 금도 얻은 기막힌 횡재수를 즐겨마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금 바가지를 허리춤에 찬 보따리에 집어넣고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무리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조용히 내쉬는 안도의 한숨.

 

사내는 도적이었다. 차령산맥을 근거지로 봇짐장수와 나그네를 노리는 도적질에 이골이 난 늙수그레한 사내들.

그 무리는 모두 일곱이었고 아미산 너머에 산채랄 수도 없고 농가랄 수도 없는 집들을 짓고 식솔을 거느리고 있었다. 남들이 얼핏 보기에는 의좋게 모여 사는 화전민 쯤으로 위장 했지만 그들의 본업은 농사보다는 도적질에 치우쳐 있었다.

 

그날 일곱의 무리는 한탕도 하지 못했다. 그날따라 지나는 길손이 없었던 것이다. 길목을 지키고 있는 일에 능란한 그들이지만 그 더운 날씨에 도적질도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참으로 이상한 날이어서 한 사람씩 물을 찾아 길목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미리 금바가지를 얻은 사내는 다른 사내에게 샘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미 그곳에서 금을 얻었고 그 남모르는 횡재를 발설하지 않기로 굳게 작심을 한 터였으므로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소록소록 맺혀 있었다. 그래서 샘의 위치라도 가르쳐 주는 아량을 베풀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루종일 일곱의 도적은 그 샘믈을 차례차례 마셨다.

 

앞 사람이 가르쳐 주는 곳으로 가서 샘을 찾아 물을 마신 것인데 하나같이 물을 마시고 온 후에는 말이 없고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오늘은 수확이 없을 모양이니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즐기자"는 의견을 냈다.

그래도 더 기다리자는 사내가 있었으나 일곱이 차례로 샘을 찾아 물을 마시고 온 다음에서야 "그래 집에 가서 잠이나 자도록 하자"는 의견에 뜻이 모아졌다.

 

말할 것도 없이 일곱명의 사내들은 그 불량스런 목자에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누구도 몰래 금바가지 하나를 챙기는 비밀스런 횡재를 가슴에 묻고 있는 터에 더이상 길목을 지키는 일이 필요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횡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간 순간 더 이상 횡재가 아니었다. 분명히 잘 간수한다고 야무지게 챙겨 넣었던 금바가지가 간곳이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분명히 가지고 왔는데. 그래서 허리춤이 제법 묵직했는데 집에 오니 보이질 않다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순간적 의구심은 어떤 두려움으로 번지고 있었다. 한낱 도둑일 뿐인 자신의 처지를 생각컨데 산신령님이 큰 벌이라도 내리려는 암시일 것만 같았 던 것이다.

더구나 도적질하여 얻은 물건은 어떤 경우에라도 동료들과 공평하게 나누어 쓰는 것이 일곱 사내에게는 목숨과 같은 의리였는데 슬그머니 그 의리를 저버리고 혼자 금바가지를 챙겨버린 죄책감도 가슴을 무겁고 답답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샘을 발견했던 사내의 집으로 한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저 무료해 찾아 온 눈치는 아니었으나 누구하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투전판이라도 벌일까? 왠 놈의 날이 이렇게 더운지..."

 

딴청을 부리는 가운데도 사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처음 샘물을 발견한 사내. 그러니까 처음으로 금바가지를 챙겨 넣은 사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말일세. 내가 큰 죄를 지었네. 자네들에게 속인 것이 있어."

 

그가 입을 떼자 모두 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서 뒷말을 하라고 재촉했다.

 

"자네들에게 가르쳐 준 그 우물에서 금바가지 하나를 주웠는데 내가 순간적으로 욕심이 나서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 넣어 버렸지 뭔가. 그런데 그 금바가지가 말이야. 집에 와서 보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 내가 천벌을 받을 모양이야."

 

두려운 표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털어 내는 사내의 말끝에 다른 사내들은 하나같이 뒤로 나자빠질 듯 놀랐다. 잘못을 실토하는 사내의 일이 사실은 모든 사내들의 일이었 던 것이다.

 

"나도 그랬어. 그래서 죄 짓고 사는 놈이 기어이 천벌을 받는 것 같아. 무서워서 이렇게 온 거야."

 

일곱 사내가 다 같은 일을 겪었고 한결같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이제 천벌을 두려워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제부터라도 죄 짓지 말고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겠어. 그 이전에 천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아니야.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있는 평지에서 살 수가 없을 거야. 저 아미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할거야."

 

묵직한 분위기 속에 그런저런 말들을 주고받는 가운데 한 사내가 불쑥 이상한 제안을 했다.

 

"아미산에 들어가야 한다니까 생각이 나는 것이 있구먼. 낮에 샘을 본 그 근처에 옛날부터 절이 있지 않은가.

그 절에 요새 한 스님이 오셨는데 그 어른의 도력이 그렇게 높으시다는구먼. 내가 듣기로는 왕을 가르치는 스님이었다고 해.

그런 도력 높은 스님이 계신 절 근처에서 우리가 나그네들의 봇짐을 털려고 했으니 아마 그 스님이 도술을 부려서 우리에게 이런 두려움을 주시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밤늦도록 얘기를 하다가 내일 날이 밝으면 그 아미산의 절을 찾아 스님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로 했다.

 

아미산의 절에 있다는 스님은 정현(鼎賢)이라는 노장으로 일찍이 광교사(光敎寺)로 출가하여 공부를 했는데 그 영민함이 남달라 스승들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정현 스님은 아미산 칠장사(漆長寺)에서 융철(融哲) 노장으로부터 유가학(瑜伽學)을 정통으로 배웠을 뿐 아니라 미륵사의 승과 오교대선에도 합격해 이름을 떨쳤다.

거기에 현종 덕종 문종으로 이어지는 왕가의 존경을 받아 지금의 문종대에는 왕사를 거쳐 국사를 지내다가 나이 들어 이승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그가 유가를 공부한 칠장사로 돌아와 있는 참이었다.

 

미륵보살이 짓고 무착보살이 엮었다는 1백권의 <유가사지론>을 밥먹 듯이 달달 외우고 그 17지(地) 행법을 익혔던 인연 깊은 도량 칠장사. 정현은 이승 인연을 매듭짓고 본래 온 바도 없이 왔던 그 자리. 말하자면 본래의 자기 자리(本處)로 돌아가기 위해 젊은 시절 시퍼렇게 밤을 밝히며 마음속의 어둠을 헤쳐 냈던 정든 도량으로 돌아 와 있었던 것이다.

 

"스님. 스님 계십니까?"

 

일곱의 시커먼 사내들이 더위를 훠이 훠이 털어내며 조심스럽게 스님을 찾아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긋한 눈길로 맞이하는 노스님 앞에 엎드린 일곱 사내는 한 입인 듯 어제의 기이한 사건을 털어 놓고,

"그저 한 번만 자비를 베푸신다면 다시는 못된 짓 아니하고 착하게 살겠습니다"라며 말꼬리를 낮췄다.

 

"그래. 자네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니 내 보건데 부처님의 자비가 이미 그대들 가슴을 넘치도록 충만해 있음 일세."

 

뜻밖의 말을 들은 사내들이 동시에 노스님을 쳐다보는 순간 노스님은 벽력같이 소리쳤다.

 

"이 사람들아. 잘못된 과거를 다 내게 주고 나가거라. 어서 그 잘못된 과거를 꺼내 봐."

 

그 우렁찬 요구에 질린 사내들.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여운이 아미산을 휘감는 듯한 침묵 속에서 사내들은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과거생의 깊은 불연(佛緣)이 한꺼번에 열렸던 것일까. 일곱 사내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다.

 

그리고 노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수행하여 마침내 나한의 경지에 들어섰다. 일곱의 도둑이 과거생의 인연을 돌이켜 드디어 도를 이룬 일을 기려 사람들은 아미산을 칠현산(七賢山)이라 불렀고 절 이름도 칠장사(七長寺)라 고쳐 썼다. 노스님은 입적 후 나라로부터 혜소국사(慧炤國師)란 시호를 받았다.

 

<또 다른 일화>

1. 혜소국사비에 얽힌 일화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 가토기요마사가 이곳 칠장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가토는 부하들을 시켜 절을 뒤지게 하는 등 무례한 행동을 마구 하고 있었다.

이때 한 노스님이 나타나 신성한 법당을 더럽히지 말고 빨리 나가라고 가토에게 꾸짖었다.

이에 화가 난 가토는 칼을 빼어 들어 노스님을 내려 쳤는데 스님은 간 곳이 없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가토는 혼비백산해 도망가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의 가운데가 갈라져 있다.

 

2. 임꺽정과 갖바치에 얽힌 전설

임꺽정은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당시에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백정으로 태어나 온갖 천대를 받던 임꺽정은 자신과 같이 많은 수탈과 차별을 받는 사람들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의적 활동을 벌이다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스승 갖바치가 숨어 있던 곳이 바로 이곳 칠장사다.

때문에 임꺽정은 안성 땅을 자주 찾게 되었고 갖바치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갖바치란 가죽신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임꺽정의 스승 역시 이 가죽신을 만드는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이곳 칠장사에 은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을 깁는 법을 가르쳐 주며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병해대사라 부르면서 존경했다.

85세에 세상을 떠난 병해대사 갖바치를 기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칠장사에 병해대사의 목상을 만들어 바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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