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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기

안성 석남사

by phd100 2021. 8. 8.

 

석남사(石南寺)

안성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 서운산이다.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에 위치한 석남사는 안성시에서 12km 떨어진 서운산 동쪽 기슭에 있다.

서운산 남쪽 기슭에는 청룡사가, 그 너머 북동쪽 기슭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 말사인 석남사가 있다.

 

313번 지방도로를 타고 배티고개를 넘어 호젓한 산길로 접어 들어 10여 분 올라가면, 세월의 무게와 역사의 기품을 간직한 천년 고찰 석남사가 푸근하고도 웅자한 자태를 드러낸다.

큰 절은 아니지만 곱게 매만진 흔적에 서리서리 정성이 녹아 있다.

석남사는 조그마한 사찰이지만 절 입구에서 대웅전까지 오르는 돌계단의 경관이 볼 만하다.

 

서운산의 한 기슭에 조용히 자리한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후 수많은 승려들이 머문 거찰이었다고 한다.

산정에 기댄 대웅전과 바로 아래에 영산전이 있는데, 가람 전체의 무게가 이 두 전각에 육중하게 실려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옆은 손끝에서 묻어난 정성으로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시구를 연상케 한다. 봄이면 철쭉이 환히 길을 밝힌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당대의 고승 석선(奭善)이 개산하면서 창건했다. 그 후 문성왕 18년(856) 가지산문의 2조인 염거국사(廉居國師)가 주석하면서 중수했고, 고려 광종의 아들 혜거국사(慧炬國師)가 크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다. 따라서 이들 스승을 흠모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들어 수행지도를 받았으니,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

 

이에 조선 세조는 석남사의 전통을 살리고 수행도량의 면모를 지켜나가도록 당부했다. "석남사에 적을 둔 모든 승려의 사역을 면제하니 수도에만 전념토록 하라"는 친서교지(親書敎旨)를 내렸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를 당하고 영조 때 해원선사(海源禪師)가 중수했으나 본래의 절 모습을 되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웅전과 영산전뿐이지만, 영산전(보물 제823호)은 조선 초기 건물의 특징 양식을 손색없이 지니고 있어 당시의 절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석남사에는 현재 영산전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인 대웅전, 향토유적 제11호인 고려시대 오층석탑 2기가 있고, 절 입구에 향토유적 제28호인 석종형 부도 2기가 있다.

절 왼쪽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상이 있어 만나볼 만하다.

 

석남사는 계단식으로 3단의 축대를 쌓아 대웅전과 영산전, 한 채뿐인 요사채가 있지만 넓은 공터가 많다.

삼면을 산줄기가 에워싸 다소 답답한 감이 없지 않으나 앞골이 트이고 계곡물이 절 앞으로 흘러 시원스럽다.

석남계곡은 특히 승방골·주왕골·험한골·대밭골·방아골 등 열두 굽이가 있으며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앞을 가린다. 그 뒤 산 정상으로는 서운산성이 둘러쳐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겹쳐마 맞배지붕으로 단출하면서도 당당해 보인다.

 

대웅전 바로 아래 학이 나는 듯한 팔작지붕집 인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며, 옹기종기 터를 다스린 석남사 경내는 서운산의 풍취에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풍겨난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팔작지붕집이다. 날렵한 지붕 끝이 숲속에 살포시 가려있어 단아한 운치를 더한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석탑, 부도 등 향토유적이 있다.

 

<대웅전>

지금은 대웅전을 가장 높직한 자리로 옮겨왔지만 본래 대웅전은 영산전 아래쪽에 있었다.

지금의 자리로 이건할 때 '옹정 3년기사3월일조성'(甕正三年己巳三月日造成)이라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영조 1년(1725)에 법당이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전화를 입었고, 그 후 중수를 거듭하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출하면서도 당당해 보인다. 바로 아래 나를 듯한 팔작지붕집의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며, 건물이 적어 공간이 시원스레 뚫린 경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자연석으로 주초석을 놓고 둥근 나무기둥을 세웠는데, 원목에 가깝게 다듬어 세워 천연의 아름다움을 살렸다. 창방(昌枋) 위로 평방(坪枋)을 얹었는데, 다소 약해 보인다. 공포를 짜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얹어 다포집 양식을 이루고 있는데, 고려 말기의 성격이 강하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로 지정되어 있다.

 

법당에는 목조불상에 금분을 입힌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존상 위로 조성된 닫집은 중층의 보궁형으로 매우 드문 꾸밈새다.

 

<영산전(靈山殿)>

석남사(石南寺)에 대웅전 아래쪽에 건축 연대 미상의 불전이 하나 있다..

석가모니의 팔상도를 모시는 영산전은, 보물 제82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전각의 명칭이다. 석남사의 영산전에는 16나한을 함께 모셔 놓았다.

석남사의 영산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꾸며진 크지 않은 전각이다. 석남사의 입구에 있는 금강루라는 누각 밑으로 난 입구를 지나면 계단 중간 우측에 자리한다. 그리 크지는 않은 전각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건축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영산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명종 17년인 1562년이다. 이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건축양식을 갖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막돌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위와 창방(昌枋) 위에 평방(平枋)을 놓고 공포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짜 놓은 다포식건물이다.

 

공간포는 각 간마다 1구씩 놓았고, 공포의 짜임은 내외2출목으로 주두(柱頭 : 기둥머리를 장식하며 공포부재를 받는 재)는 굽면이 사면이고 굽받침이 없으며, 첨차의 밑면은 약간 휘어진 곡면이고, 단부는 직절하였다.

 

초제공(初諸貢)과 이제공(二諸貢)의 살미첨차[山彌檐遮]들은 앙서[仰舌]로 섬약하지 않다. 삼제공의 끝은 삼분두형이다. 전체적인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접어드는 짜임새를 보여 준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대들보 위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후벽 어칸 앞에는 불단(佛壇)을 만들고 부처님 세분을 모신 상부에 닫집을 만들었다. 정면 3칸에는 정자살창호를 달고 양측면에도 정자살창호를 한짝씩 달았다.

 

<삼층석탑>

영산전을 바라보아 좌측에 동서 2기의 석탑이 나란히 건립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 탑의 현재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며, 우측의 동탑은 탑신부에 감실이 모각되어 있다.

1매의 판석으로 지대를 마련했는데, 1단의 괴임 위에 기단부를 떠받들고 있다. 기단은 양우주를 가는 선각으로 조출하고 갑석을 놓았는데, 부연도 없고 상면의 탑신부 괴임대도 없는 평평한 판석으로 이루어졌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 조성되었으며, 각 면에는 양우주가 정연하고, 1층 옥신만은 1면에 장방형의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한편, 좌측의 석탑은 1매의 판석 지대석에 3단 괴임을 각축하고, 네 귀에 우주를 새긴 기단부를 받고 있다. 옥신과 옥개석은 각 1석씩 조성되어 있으며, 1층 옥개석은 모두 아래 부분에 3단 혹은 2단씩의 받침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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