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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청도 운문사

by phd100 2021. 10. 14.

 

운문사(雲門寺)

운문사는 영남의 알프스인 가지산(1240m), 천황산(1189m), 운문산(1188m), 문복산1014m), 영취산(1059m), 재약산(1108m), 신불산(1209m) 등이 영남 알프스의 영봉들을 이루는 가운데 가지산과 운문산이 형제처럼 우뚝 선 계곡(운문천 상류) 북쪽 기슭 평지에 자리 잡은 신라 고찰이 운문사이다.(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신라 진흥왕 21년(560)에 한 도승(道僧)이 홀연히 득도하여 다섯 개의 갑사(五岬寺, 대작갑사:大鵲岬寺, 가슬갑사:嘉瑟岬寺, 천문갑사:天門岬寺, 대비갑사:大悲岬寺, 소보갑사:所寶岬寺)를 지었는데 지금은 대비갑사가 대비사로 개명하여 남아 있고(동곡리 선암서원 맞은편 산중턱), 대작갑사가 운문사로 되어 지금 까지 남아 있다.

오갑사의 중창자는 그 유명한 원광법사(圓光法師)로 가슬갑사에서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내려 주었다. 이 후 다른 오갑사는 폐사되고, 대작갑사인 운문사가 보양국사(寶讓國師)를 만나 두 번째 중창을 하게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준 분이 바로 보양국사이다. 후에 왕건은 보양스님이 대작갑사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밭을 대작갑사에 내리고, 태조 20년(937)에는 대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賜額, 임금이 이름을 지어 줌)을 내리니 지금의 운문사(雲門寺)가 되었다.

 

보양이 운문사를 중창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보양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서해를 건너던 중 해룡(海龍)인 용왕(龍王)이 보양을 용궁에 청하여 금라가사(金羅袈裟)를 선물하고 해룡의 아들 이목(璃目)에게 스님(보양)을 모시고 작갑(鵲岬)에 절을 창건하라고 했다.

귀국 후 보양은 지금의 운문산에 올라가 아래로 내려다보니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고, 그 자리가 하도 이상하여 유심히 살펴보니 그 곳이 신라 때 세워졌다가 지금은 폐허가 된 대작갑사 자리였다. 그 제사 해룡의 부탁이 생각나 대작갑사를 중건하게 되었다. 그 후 이목은 절 옆 작은 연못에 살게 되었고 이 곳을 이목소(璃目沼, 현재 절 서쪽 계곡에 위치하며 일반인은 출입금지 지역임.)라 하게 되었다.

 

이 운문사를 세 번째로 중건한 이는 고려 인종 때 왕사(王師)로 책봉된 원응국사(圓應國師, 李學一, 1052~1144)이다. 고려 개국에 일조를 한 운문사는 왕실로부터 많은 재물을 받았으니 이 때가 운문사의 사세가 전성기였다.

 

그 후 1277년 72세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이 운문사 주지로 오게 되어 5년간 재직하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그 후 일연 대선사는 왕의 부름으로 국존(國尊)에 책봉되고 이 곳 경산에 내려와 90노모를 봉양하다가 노모 타계 후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84세의 일기로 타계)

 

임진왜란으로 병화를 입은 운문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는 설송(雪松)이다.

이 후로 일제 식민시대, 8.15해방, 6.25동란을 거쳐, 1958년 비구니(比丘尼) 전문강원이 개설되고 1977년 4년제 승가대학이 설치되어 사미니계(불도를 닦는 20세 이하의 여자 僧) 200여명이 항시 공부하고 수도하는 곳이다. 졸업을 하면 비구니계(불교에 歸依한 여자 僧)를 받아 사찰로 나서게 된다.

 

운문사를 찿는 이는 다음 몇 가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 하나로 새벽 3시에 있는 아침 예불에서 200여명 이상의 비구니가 부르는 예불 song은 천상의 비파소리를 능가하는 장엄하고 숭고한 음악이다.

 

또 하나는 운문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늠름이 서있는 홍송(紅松, 또는 赤松 우리나라 재래 소나무, 껍질의 처음은 붉은색이고 얇지만 오래되면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된다. 그래서 한 나무에서도 아래와 위의 껍질모양이 다르다.)의 군락지이다. 그러나 노송의 상처 난 밑동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제말 ‘대동아전쟁’때 송진을 공출로 내기 위해 생긴 상처이다.

 

경내에는 금당 앞 석등(보물193호), 원응국사비(보물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317호), 사천왕석주(보물318호), 삼층석탑(보물678호), 신라 때의 구리항아리 동호(銅壺,보물208호),

 

천연기념물 180호인 늘어진 소나무(盤松, 이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는 점이 보통 소나무와 다르다. 수령이 500여년이나 되는 이 노고송(老古松)은 어느 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소나무 가지를 거꾸로 꽂아둔 것이 뿌리를 내렸다 한다. 키 6m밖에 안되지만 사방 10여m나 퍼져있는 400년 된 이 노송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고 있는데도 칡덩쿨이 노송을 감싸주어 재난을 피한 소나무)이 있다.

 

이 밖에도 작압전(鵲鴨殿) 미륵전, 오백 나한전, 수백명이 동시에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공간 만세루 등이 있다.

 

작압전(鵲鴨殿)

운문사에서 가장작은 법당이다. 예전에는 작압전이 오층탑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보물로 지정된 사천왕 석주는 당시 작압전의 돌로 된 1층 문설주에 사천왕을 새긴 것이 남아 있는 것이라 한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6각형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으로 머리는 나발(螺髮),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다. 얼굴은 평면적이며 어깨는 약하게 보이고 가슴은 밋밋하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고, 광배(光背)는 주형(舟形) 거신광(擧身光)이지만 예전에 보이던 굴곡은 없어지고 투박스럽다.

 

운문사엔 대웅보전이 둘 있다.

하나는 구 대웅보전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며 현재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두고 있어 비로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문화재청에서 보물로 지정하며 붙인 공식적인 이름이 운문사 대웅보전이었던 관계로 다시 원래의 이름인 대웅보전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대웅보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다른 하나는 훨씬 큰 대웅보전으로 근년에(1994년) 지은 것으로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어느 여행기>

4월의 청도(淸道)는 붉은 복숭아꽃 화려한 무릉도원 가는 길이다. 복숭아꽃 사잇길로 돌아서 물새 날갯짓 고즈넉한 동창천을 건너 낙동정맥(洛東正脈) 산자락으로 들어서다 보면 문득 천년의 세월을 인고해온 운문사(雲門寺)가 반긴다.

 

일주문 대신 늘씬한 소나무 울창한 숲이다. 한겨울에도 푸른 잎 드리웠던 소나무에선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오계의 그 강건함이 느껴질 듯하고, 솔향 자욱한 청정한 기운에선 1277년 운문사 주지가 된 일연 스님(1206∼1289년)이 5년 동안 머물면서 겨레의 위대한 유산인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던 묵향이 감지된다. 차에서 내려 온몸에 감겨드는 향내를 느끼며 발걸음을 옮기자 사바(娑婆) 세계에서 찌든 마음은 이내 편안해진다.

 

솔밭 아래 앙증맞게 피어난 보랏빛 제비꽃을 보며 걷다보면 신록으로 물들기 시작한 낙엽송 사이로 당우(堂宇)들이 보인다. 나지막한 돌담에 그늘 드리운 아름드리 벚나무에선 얼마 안 남은 연분홍 이파리가 봄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데, “호거산 운문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범종루에 들어서면 팔을 활짝 벌린 소나무 한 그루가 제일 먼저 나그네를 맞는다. 운문사보다 더 유명한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180호)다. 매년 4월 말 비구니 스님의 정성으로 열두 말의 막걸리를 마신다고 하는 처진 소나무의 수령은 500여년.

 

조선 초기 형태의 강당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라는 만세루에도 명주실 같은 봄 햇살이 내려앉고, 대웅보전에서 새어 나오는 맑은 목탁 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그 봄볕에 몸을 맡긴 비구니 스님들의 목소리는 해맑기만 하다. 앳된 비구니 스님의 맑은 눈망울엔 운문산 마루에 걸렸다가 훌쩍 날아가는 흰 구름이 담겨 있다. 세속의 일을 뜬 구름처럼 여기고 불문에 들어섰기에 운문사(雲門寺)인가.

운문사는 남쪽의 운문산, 북동쪽의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이 이룬 높고 낮은 겹겹의 산줄기에 포근히 안겨 있는 평지 가람이다. 이 산줄기들이 운문사를 연꽃잎처럼 감싸안은 형국이라서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花心)에 비유하곤 하는데, 단아함이 넘치는 비구니 도량(道場)이라는 점과 잘 어울린다.

 

만세루 앞 아담한 작압전(鵲鴨殿)은 석조여래좌상(보물 317호)과 돌에 새긴 사천왕 석주 4개(보물 318호)를 모신 곳. 운문사에서 가장 작은 공간이지만 가장 의미 깊은 공간으로 꼽힌다. 560년 창건 이후 1400여 년을 이어 오고 있는 운문사 내력이 “작압”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다.

화랑오계를 지은 원광국사가 608년에 첫 번째 중창을 한 뒤인 930년에 보양국사가 두 번째 중창을 할 때 작압전이 유래한다. 창건 당시 작갑사(鵲岬寺)였던 운문사는 보양국사가 작갑사의 옛터를 찾아 절을 지을 때 까치떼의 도움으로 옛 절터를 확인하고 거기서 나온 벽돌로 탑을 세운 뒤 까치떼를 기념하기 위해 “까치 작(鵲)”에 “오리 압(鴨)”을 쓴 작압전을 지었다. 보물로 지정된 사천왕 석주는 당시 작압전의 돌로 된 1층 문설주에 사천왕을 새긴 것이 남아 있는 것이라 한다.

운문사의 해질녘. 저녁 예불시간이 되자 범종루에선 가죽짐승을 깨우는 법고(法鼓) 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의 엄숙한 예불 광경을 몸소 느끼려면 아침예불(03:30)이나 저녁 예불(18:15) 시간에 맞춰 가면 된다. 운문사홈페이지(www.unmoonsa.or.kr), 종무소(054-372-8800).

 

 

사리암(邪離庵)

호거산 중턱에 있는 운문사의 말사로서 많은 불교도들이 기도를 하러 찾아오는 곳이다. 아래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이 비탈길을 제외하고, 계단만 1,000여개를 지나야하니 꽤 많이 올라간다. 30여분이 족히 걸린다. 그러나 쉬엄쉬엄 가면서 뒤돌아보면, 아름다운 운문사 계곡이 지나온 우리의 인생을 생각게 한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나의 일생을 위해 기도하러 가는 걸까...

사리암(邪離庵)은 고려 초의 고승 보량(寶樑) 국사가 930년에 창건하였고, 1845년(헌종11)에 정암당(靜庵堂) 효원대사가 중창하였다.

이곳은 특히 나반존자(那畔尊者: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사람) 기도처로 널리 알려졌는데, 나반존자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우고,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며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았다고 한다.

나반존자는 법당인 관음전 바깥쪽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천태전에 봉안되었다.

천태전 밑에 있는 사리굴은 운문산 4굴의 하나로서 이곳에 머무는 사람 수만큼 먹을 쌀이 나왔다고 한다. 어느 날 더 많은 쌀이 나오게 하려고 구멍을 넓히자 그 뒤부터는 쌀 대신 물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암자치곤 유일하게 점심공양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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