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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남

담양 소쇄원.식영정.송강정

by phd100 2021. 10. 17.

 

 

潭陽

담양은 예부터 대나무가 많고 죽세공품으로 유명하다. 담양에는 그리 높지않은 추월산(697m)이 있다. 그리고 이 산을 에워싸듯 드넓은 담양호(潭陽湖)가 펼쳐져있다. 호수와 이웃한 월계리 일대를 담양호 국민 관광지 월계지구로 조성하고 있다. 담양 시내에서 담양여고앞, 용면 사무소를 지나 비호재를 넘어 추월산 터널, 용소 폭포까지 약 23km의 전 구간이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담양시내 읍사무소 옆에는 2층 빌딩으로 된 담양죽물 박물관이 있어 담양에서 생산되는 모든 竹物이 전시되고 판매되며 시가지는 죽세기념품점이 즐비하다.

호남고속도로의 백양사 I.C.에서 내려 1번 국도와 894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 담양이 된다.

이 곳 담양을 들리면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담양에서 15번 국도를 따라 광주쪽으로 가다 유산교를 지나 원강리 원유동에서 887번 지방도를 타게되면 88올림픽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밑을 지나, 고서면 지나서 담양군 남면 지곡리까지 가면 우리나라 현존하는 최고의 원림(園林: 郊外-옛날에는 성밖(城外)-에서 동산(園)과 숲(林)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해서 적절한 위치에 당우(堂宇)와 정자(亭子)를 배치한 정원(庭苑) 임.)이 있다.

 

송강정(松江亭) · 소쇄원(瀟灑園) · 식영정(息影亭) 담양(潭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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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瀟灑園): 담양군 남면 지곡리의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에 의해 지어 졌는데, 연산군 9년에 이곳에서 양사원(梁泗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산보는 어렸을 때 이곳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가 헤엄치는 대로 따라 올라 가게 되었는데 지금 소쇄원 자리에 이르러 작은 폭포와 못이 나타나고 계곡이 깊어지고 주위의 풍광이 너무도 수려(秀麗)하여 거기에서 미역도 감고 뛰놀며 언젠가는 여기에 와서 오래도록 살 뜻을 세웠다고 한다.

양산보는 15세(1517)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문하생이 되었다. 1519년 스승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급제하였고 바로 이 해에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남으로써 양산보도 낙향하여 창암촌(蒼巖村: 양산보의 호가 창암이라 소쇄원이 있는 동네를 창암이라고 부른다.)으로 되돌아 왔다.

그 해 겨울에 조광조는 사약을 받아 죽었으며 이 후 양산보는 두문불출하고 55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고향에서 은일(隱逸)생활을 했다. 그를 처사공(處士公)이라 부르게 된 것도 이런 연유였다. 훗날 송시열은 소쇄원 담벽에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일종의 문패를 써서 달게 했다.

 

소쇄원 창건 연대는 1536년 양산보 나이 34세, 낙향한지 17년 되던 해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양산보(梁山甫)는 일찍이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주무숙(周茂叔)의 애련설(愛蓮說)을 항상 서재에 두고 있었던 것도 도연명을 자기와 같은 은일처사(隱逸處士)의 선배로서, 주무숙은 恩師 조광조가 흠모한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양산보가 이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瀟灑園),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霽月堂)’, 계곡가까이 세운 누정(樓亭)을 ‘광풍각(光風閣)’이라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名筆) 황정견이 주무숙의 인물됨을 칭찬한 글에서 따온 것이다.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기대승(奇大升), 정철(鄭澈), 고경명(高敬命), 김인후(金麟厚) 등의 당대의 명유(名儒), 명문(名文), 명류(名流)가 모두 소쇄원을 찬양한 시를 남겼으니 소쇄원의 성가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알수있다.

그러나 당대의 명문장가들이 수많은 찬시를 지었지만 어느 것 한 편도 그 아름다움 모두를 담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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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은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 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다. 그렇다고 사람의 손길이 자연을 정복한 것이 아니고 자연속에 행복하게 파묻히고자 하는 정성을 심어 놓은 것이기에 우리는 미적 규범을 그기서 배우고 감탄하게 한다.

50m나 되는 기와지붕을 얹은 긴 흙돌담이 소쇄원과 지석마을을 갈라 놓는 경계구실을 하지만 소쇄원 안에서 보면 더없이 아늑한 공간으로 감싸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원래 자연 그대로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길이 적절히 닿을 때 우리는 정서적 안정을 찿는다.

담장의 폐쇄감을 소쇄원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하나는 대문이 없는 개방공간, 또 하나는 계곡을 가로 지르는 담장 밑에 받침돌을 놓아 담장밑으로 냇물이 자연 그대로 흐르게 해놓은 것이다. 절묘한 개방성이고, 자연을 거스리지 않겠다는 인간의 겸손이 보인다.

 

 

 

양산보는 위대한 건축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어느 조원가, 설계가 보다도 탁월한 구상과 섬세한 디자인을 보여준 슬기와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것이 우리 조선 시대 사대부(士大夫) 문화의 강점이다. 士大夫는 군자로서 살아 가는 길을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확고한 도덕율을 갗추고 있으며, 전문인, 기능인이 아니라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총체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전문인, 기능인들이 잃어버린 총체성을 소쇄원에서 배워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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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영정(息影亭) : 소쇄원, 식영정, 취가정, 환벽당을 안고 지금의 광주댐으로 흐르는 증암천을 옛날에는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 자미는 백일홍이고 탄은 여울이라는 뜻이니 이 개울 양옆으로는 백일홍 나무가 빽빽히 아름다움을 뽑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이 자미탄 여울가에 있는 정자중 벼랑 끝에 위치하여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 식영정이다.

식영정 툇마루에 앉아 절벽 아래쪽 자미탄 여울을 내려다 보면 그 옛날 동네 아이들의 멱감고, 그물로 물고기 잡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식영정은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그의 스승이자 장인 어른인 석청 임억령에게 쉴수 있는 곳으로 지어 올린 정자인데,

임억령이 사위 김성원에게 말하기를 장자에 보면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림자는 이 사람이 빨리 뛰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뛰면 천천히 쫓아오며 끝끝내 붙여 다녔다. 그러다 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 나타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김성원은 사람과 그림자의 관계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나 장인 어른은 스스로 자기빛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장인에게 말했다.

이 말에 임억령이 말하기를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 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 만 한 것이 아니고 시원하게 바람타고 자연 조화와 함께 어울리며 끝없는 거친 들에서 놀고 싶고 쉬고 싶은 뜻이 있어 그런 것이네 그래서 나에게 준 이 정자도 그림자도 쉬고 있다는 뜻으로 息影이라 이름 짓는 것이 어떠하냐?라고 말했다.

이 에 김성원도 좋다고 응하여 이 정자가 식영정으로 되었다. 이 때가 1560년 명종 15년으로 임억령 나이 65세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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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정자 식영정 주인의 고매한 인품으로 인하여 호남 사림(士林)의 명현들이 여기를 찾았다.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정철 등……, 그들은 한결같이 명 문장가들이었기에 식영정에 부치는 詩를 짓고, 그 시의 운을 따서 또 詩를 지어 오늘날 모두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한 수, 김성원의 「양파에 오이 심어」를 보면,

 

남쪽 비탈에 오이를 심었지

이야말로 내 마음 진정 시키는 약이라오

아침 나절 김매고 물주고

도롱이 벗어 놓고 단잠을 잔다.

 

그런 중 식영정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송강 정철이 지은 「성산 별곡」이 었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棲霞堂)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 고

………

세월이 흘러 옛 식영정의 시인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어쩌다 지나가는 명사가 있어 옛 주인을 그리는 시를 짓기는 했으나 그것은 과객의 회포였지 자미탄 옛 사람의 정서는 아니다.

 

 

서하당(棲霞堂),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식영정 돌계단을 내려다 보면 왼쪽 깊숙한 곳으로 연못에 바짝 붙여 지은 부용당이 보인다. 이 정자는 1972년에 지은 것이고, 그 뒤편 주춧돌이 널려 있는 곳이 서하당 터였으니 곧 김성원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김성원이 바로 이 자리에서 서하당을 지은 것이 자미탄을 중심으로 한 호남가단(湖南歌壇)의 진원으로 된 것이다.

옆 동네 지실마을에서 살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송강 정철은 서하당 김성원에게 글을 배웠다. 서하당은 송강과 처가의 외가 재당숙이니 먼 친척이다.

그리고 서하당에서 자미탄 건너 마주보이는 곳에는 김성원의 사촌의 종질(從姪)인 김윤제(金允悌)가 을사사화 때 벼슬을 버리고 여기로 와서 서재를 짓고 칩거한 곳이 환벽당(環碧堂)이다. 서하당과 환벽당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옛날에는 무지개 다리를 놓아 수시로 오갔다고 한다.

 

자미탄을 건너 환벽당 입구로 돌아서 가면 낚시하기 꼭 알맞은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성산별곡」에 나오는 조대(釣臺)이다. 그리고 환벽당 현판은 훗날 송시열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쓴 것이다.

 

취가정(醉歌亭)은 환벽당에서 5분거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후손인 김만식(金晩植)이 1890년에 장군의 덕을 기리며 지은 정자이다.

취가정이란 이름은 송강의 제자였던 권석주(權石洲:1569~1612)의 꿈에 김덕령장군이 나타나서 취시가(醉時歌)를 불렀다는 얘기에서 따온 것이다. 이 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했던 김덕령이 결국은 옥사를 하고 마는 원한의 노래다.

취가정 바로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두팔을 벌리고 춤추듯, 요염한 여인의 몸매 같기도 한 이 소나무의 위치는 취가정 설계의 극치이다. 어쩌면 취가정은 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멋이 넘치는 소나무를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할 수 있다.

 

취가정에서 자미탄을 건너다 보면 성산, 장원봉, 효자봉, 열녀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한 가운데의 작은 산줄기 아래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마을 집들이 보인다. 거기가 담양군 남면 지촌리 지실마을이며 송강 정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지실마을에 들어가 보아도 별 구경거리는 없다. 하지만 오랜 연륜의 동네에는 집집마다 돌담장이 정감어리고 서정적인 우리 농촌의 내음을 흠씬 느낄 수 있다.

송강의 15대손 정하용(75세)씨 댁에 들르면 아마 송강의 일대기를 들려주실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지도상에는 나와 있는 명소이지만 누구도 찾는 이 없어 안내자 없이 갈 수 없는 곳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의 명옥헌(鳴玉軒), 소쇄원에서 몇굽이를 돌아 산길을 넘어야 명옥헌이 나온다. 그래서 한가로히 찾기엔 가장 좋은 곳이다. 명옥헌의 호수와 백일홍, 고목이된 백일홍이 늘어선 명옥헌은 한여름 꽃이 필 때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松江亭), 봉산면 제월리 마항마을 뒷산에 있는 송순(宋純)의 면앙정(俛仰亭)도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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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정(松江亭)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정철이 동인(東人)들의 압박에 못이겨 대사헌의 자리를 그만두고 하향하여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라고 하여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하여 1770년(영조 46)에 세운 것인데, 그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정자는 남동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이 꾸며져 있다. 지금도 정자의 정면에 ‘松江亭’이라고 새긴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竹綠亭’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수려하다. 정철은 이곳에서 <사미인곡 思美人曲>을 지었다 하며, 현재 정자 옆에는 그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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