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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남

김해 수로왕비릉

by phd100 2022. 7. 3.

 

김수로왕비릉(金首露王妃陵)

경남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의 릉으로 허수로왕릉으로도 불리운다.

사적 제74호. 지정면적 32,920㎡, 무덤의 지름 약 16m, 높이 약 5m이다.

 

왕비의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로서 서기 48년 가야에 와서 수로왕의 비가 되고 왕자 열 명을 두었는데, 그 중 두 아들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대를 잇게 했다는 것이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무덤의 밑둘레에는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방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혼유석(魂遊石)을 놓았고 아울러 묘비(墓碑)가 세워져 있는데, “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지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1647년(인조 25)에 세운 것이다.

 

능에 딸린 부속건물로서는 숭보재(崇報齋) · 외삼문 · 내삼문 · 홍살문(紅箭門)이 마련되어 있다. 이 무덤은 평지에 있는 김수로왕릉과는 달리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75호로 지정된 김해 구산동 고분군과 인접해 있어 무덤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土壙墓] 또는 돌방무덤[石室墓]일 가능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許黃玉)

허황후(33~189)는 신비의 여성이다. 그녀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로 흘러 들어와서 가락국의 황후가 됐는지는 아직도 정확한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있다. 오늘날 그녀의 후손으로 일컬어지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500만 명을 헤아린다. 이런 많은 수의 자손을 두고도 그녀의 내력이 확실하지 않은 것은 막연한 기록 탓이다.

 

김수로왕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일어난 뒤 맨 나중에 김해 일대를 중심으로 가락국을 세웠다.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탓으로 역사기록은 부실하다. 다행히 가락국의 건국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허황후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과정을 살펴보면, 이 땅에는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나라의 호칭이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윽고 아도간 · 여도간 · 피도간 · 오도간 · 유수간 · 유천간 · 신천간 · 오천간 · 신귀간 등 아홉 간(干)의 추장이 있었다. 백성 1만 호, 7만 5000명을 거느리고 산과 들에 모여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었다.

이 줄거리는 원시 공동체 부족국가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날 그들이 살고 있는 구지봉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이곳에 가서 임금이 되라고 명하셔서 강림하였다. 너희들은 봉우리 정상의 흙을 파면서 이런 노래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아니하면 구워서 먹으리. 그러면서 땅을 다지며 춤을 추면 이것이 대왕을 맞이하면서 기뻐 뛰는 것이 되느니라.”

 

그 말대로 하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가 내려와서 펴 보니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그 알을 상자에 담았다가 12일이 지난 뒤 열어 보니 모두 동자로 변해 있었다.

 

이들 중 한 동자는 10여 일이 지나 어른으로 자랐는데 아주 잘생겼다. 그리고 그 달 보름날에 즉위했는데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수로(首露)라 했고,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일컬었다.

이 나라는 곧 여섯 가야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각기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은 도읍지를 정하고 궁궐을 만들었다. 그 중 석탈해는 그 뒤 신라로 가서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도 그가 먼 곳에서 흘러 온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수로왕은 나라를 세우고 난 뒤에도 왕비를 들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들이 양가의 규수 가운데에서 왕비를 간택하라고 재촉했지만, 수로왕은 번번이 거절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국의 한 처녀가 많은 신하와 보물을 싣고 남쪽의 뱃길을 따라 가락국에 이르렀다. 그녀는 스스로 아유타국의 공주이며 성은 허가요, 이름은 황옥인데 부왕의 지시에 따라 동해 천도골에 있는 나라의 왕비가 되고자 왔다고 했다. 수로왕은 그녀를 왕비로 삼고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렸다.

 

설화에서는 공주가 처음 바다에 나타났을 때나 수로왕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통역이 끼어들지 않고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상당한 교양과 지식이 어우러져 있었다.

왕은 신랑으로서 궁궐에서 나가 신부를 맞이했고, 신부는 대등한 관계 속에서 혼례를 치렀다. 유교식 혼례절차를 밟았고 공주 신분에 걸맞은 혼수품을 가져온 것도 혼례의 의례에 맞았다. 신부가 데리고 온 종자(從者)들에 대한 후한 대우도 유교식 신행(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함)의 절차에서 보여 주는 관행이었다.

 

공주 일행이 예물로 가져온 물건은 비단이나 능라 같은 옷감과 금은보옥과 같은 보배였다. 초기 철기문화가 시작되고 후진적 농경사회가 열리고 있던 가락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던 물건들이다.

이것은 그 무렵 중국이나 인도 그리고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오던 사라센 지방의 산물이다.

 

공주는 스스로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했다. 이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그 실체를 두고 많은 추측과 논란이 일었다. 아유타국은 인도 갠지스 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라는 고을로 추정되기도 한다.

아요디아는 인도 태양왕조의 옛 도읍지로서 서기전 5세기쯤에 그 나라 왕자가 태양신의 화신으로 숭배됐다고 한다. 이들 왕가는 다른 왕조에 점령당해 도읍지를 잃고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인도 쪽의 기록이 전한다. 이 시기는 공주가 김해로 오기 28년 전에 해당한다.

 

태국에도 아유티아라는 고도(古都)가 있다. 이 나라는 메남 강 언저리에 있었는데 아요디아가 건설한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아요디아가 망할 때에 사람들이 이곳으로 망명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추정도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공주는 파사(婆娑) 석탑을 배에 싣고 왔다. 이 돌은 김해 지방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약돌이며 인도와 중국의 남해 연안에서 산출된다. 이 탑은 지금도 구지봉의 허황후릉 옆에 보존되어 있다. 왜 그 무거운 돌을 싣고 왔을까? 파사석탑은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파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고 한다. 또 ‘가락’ 또는 ‘가야’라는 이름도 고대 인도어의 ‘물고기’라는 말과 음이 유사하다.

 

1792년 처음 세워진 수로왕릉의 정문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양과 연꽃 봉우리 등이 그려진 도형이 있다. 이런 문양은 지금도 아요디아 고을에서 큰 건축물에 쓰이는 조각과 장식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허황후와 관련된 이야기는 인도와 관련이 깊다. 다만 그녀가 올때에 아요디아가 망했으며, 또 6월의 풍향과 물흐름은 역풍과 역류여서 두 달 만에 김해에 닿을 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도가 아닌 태국의 아유티아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이와 다른 추정도 있다. 허황후가 죽고 난 뒤에 올린 시호가 보주(普州)태후인데, 보주는 중국 사천성 가릉 강 유역에 있었다. 허황후는 바로 이곳에 살던 소수민족인 파족(巴族) 출신일 것이라는 견해이다.

허황옥을 파족의 중심 세력인 허씨 가문의 딸로 보는 것이다. 허씨들이 한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다가 실패하여 강제로 이곳으로 추방됐다는 것이다. 이 허씨들의 뿌리가 인도였고, 허황옥 일행은 양자강을 따라 상하이 지방에 이르렀으며 이어 해류를 타고 김해에 왔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한편 아주 색다른 주장도 있다. 인도의 어떤 상인 세력이 가야와 무역을 활발히 벌이기 위해 어떤 여자를 아요디아의 공주로 위장해 수로왕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수로(首露)도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수라’에서 따 온 말로 본다. 수라는 초인간적인 권력을 지닌 사람이나 통치자, 영웅이라는 뜻이다.

 

가락국 설화를 중심으로 보면 수로왕과 그 추종자들은 유교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로왕의 자질을 말할 때에도 중국 고대에서 신성시하는 인물을 끌어대고 있다. 수로왕의 통치방식도 유교적 도덕관을 물씬 풍긴다.

 

허황옥은 한 달 보름 정도 걸려서 김해에 도착했다. 그녀는 도교에서 이상의 나라에 있다는 천도복숭아를 가져왔고, 불교의 탑을 들여와서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하려고 했다. 그녀가 가져온 물건들은 중국 제품이고, 혼인의식도 중국식으로 치렀다. 아마도 허황옥은 인도의 전통을 익힌 가정에서 성장해 보주 지방에서 왔으며, 수로왕도 허황옥과 같은 지방에서 자랐을 것이다.

 

이런 배경 탓인지 가락국은 삼국과는 개성이 전혀 다른 고대국가로 출발했다. 이 가락국은 남방불교를 들어와 이어오고, 들판이 적은 환경을 딛고 바다로 진출해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했다.

 

그 결과 후기에 와서 가락국은 철기문화를 고급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백제, 신라, 왜국을 잇는 바닷길의 통로가 되었다. 오늘날의 김해평야는 조선시대와 일제시기에 개간을 해 넓은 평야로 만든 것이다. 그 당시에는 구지봉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다.

 

허황후의 능은 김해 구지봉 아래에 자리를 잡고 2000여 년의 신비를 안고 있다. 특히 그녀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 허씨들은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성바지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허황후를 신비에 묻어 두지 않고 역사 인물로 부각시키는 하나의 시도가 될 것이다. 또한 허황후의 이야기를 통해 고대 한반도 남쪽지방 사람들이 바다로 중국 남쪽 또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와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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