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원관(鵲院關)
작원관(鵲院關)터(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73호)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낙동강 본류와 응천강이 합류하여 휘도는 절벽(絶壁) 위에 있다.
낙동강에 뿌리를 박은 바위산 한구비의 돌을 깨고 길을 열어 한양 쪽으로 통하게 했다.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하여 까치작(鵲)자를, 여행하던 관원(官員)이 쉬어가던 역원(驛院)이 있어 ‘院’을 따 작원관이라 이름하였다.
작원은 공무로 출장 중인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작원관은 왜적의 침공을 방어하던 요새지이며, 낙동강 가의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를 오르내리는 사람과 화물도 검문하였다.
공무로 여행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院,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關이라 하였으므로 작원관은 院, 關, 津을 겸한 곳이었다.
작원관은 고려 제23대 高宗(1123~1259 재위) 때 창건한 것으로 이후 고려 ․ 조선시대에 걸쳐 동남의 육로와 남북 간 수로의 요충지로서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영남대로의 2대 관문 중 하나이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상 국방상의 2대 관문이다.
<작원잔도>
경부선 터널 위 봉우리 강변 쪽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작원 잔도(棧道)가 있었다. 천태산 벼랑을 따라 이어진 이 棧道는 매우 험하여 내려다보면 낙동강의 소용돌이치는 짙푸른 물빛이 두려움을 더하게 한다. 예전에 이곳을 지나던 한 수령이 발을 헛디뎌 떨어져 물에 빠져죽은 일이 있어 원추암리라고도 부른다. 한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사람도 당하기 어려운 우리나라 제일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우리 조상들은 벼랑길을 지나는 방법으로 잔도(棧道)를 만들었다. 잔도는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매어 낸 길이다. 영남대로의 3대 잔도, 즉 황산잔도(물금), 작원잔도(삼랑진), 관갑천잔도(문경) 중 2개가 낙동강 하류에 있었다.
작원관과, 작원잔도를 포함한 영남대로 이 구간은 경부선 철도부설과 함께 파괴되었다. 일제는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총 444.5㎞)를 개통하였다. 경부선 철길 삼랑진~물금 구간은 영남대로 위에 놓여졌다. 영남대로는 이때부터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덤불 속에 묻혔다. 작원잔도 입구에는 철조망과 함께 '외인 통행금지'라 적혀 있다. 작원관은 원래 자리에서 밀려나 현재의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작원 원우(院宇)는 잔도에서 5~6리쯤 북쪽에 있었다. 院에서 남쪽에 위치했던 험한 한 구비의 棧道는 자연적인 검문소의 구실을 하였다. 원우의 구조와 건물 규모에 대하여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밀주증신록> 鵲院題詠 條에, “門曰捍南樓曰拱雲이라 한 기록이 있고 <밀주승람> 작원조에도 “有捍南樓四浦橋”라는 기록이 있는 ‘捍南門’과 ‘拱雲樓’란 扁額이 걸린 누각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한남문(捍南門)과 공운루(拱雲樓)
한남문(捍南門)은 <밀주승람>에 따르면 “壬亂後府人築院門扁之以捍南正郞安濤詩雲”이라 하였다. 조일전쟁이 끝난 뒤 고을 사람들이 원의 문을 새로 짓고 한남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당초의 구조인 누각건물을 복원했다.
한남문(捍南門)은 최근까지 남아 있었으나 1936년 7월 대홍수 때 휩쓸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경운 송만술(耕雲 宋萬述)이 노력하였으나 복원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1939년에 밀양군에서 그 전 한남문이 있었던 자리에 작원관문기지라는 석비(石碑)를 건립하여 유허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후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198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1995년에는 작원관 성문을 복원하여 세웠다. 작원관 옛터에서 뒤로 물러나와 철도 건너에 있다.
■ 공운루에서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작원관 임란순절용사 위령비(鵲院關壬亂殉節勇士慰靈碑)가 서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 17일 소서행장이 동래성을 함락한 후 이곳으로 침입해 왔다. 동래에서 패퇴한 이각(李珏)과 밀양부사 박진(朴晋)은 군관민(軍官民) 300여 명을 이끌고 왜적 1만 8천 7백 명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벌여 모두 전사했다.
매년 음력 4월18일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 비각 안에는 가운데 대리석으로 만든 작원관문기지비(鵲院關門基址碑)라는 비와, 왼쪽에 붉은 색깔의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와 오른쪽에 대교비(大橋碑)가 있다. 작원관문기지비 왼쪽면에 “昭和十四年十月(1939)”이라는 건립명이 있으며 높이 144cm, 두께 21cm이다.
작원진석교비는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104cm,폭 46cm 두께 17cm이다. 비 왼쪽 측면에 “康熙二十九年庚午九月日安台里二百戶”라는 陰記에 의하면 조선 숙종 16년(1690)에 안태리에 거주하는 주민 200호가 협력하여 건립하였다. 이것은 <밀주구지> 작원 조 말미에 “員墜岩前有四浦橋”라 한 기록과 같이 작원진 나루 앞에 있었던 사포교의 유지를 기념한 듯하다.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는 마모가 심하나 내용 판독은 가능하다.
橋當大路而自古以 木隨補隨毁人不堪其勞 安泰居同知 吳仁發 慨然自當
爲化主經當數年石橋乃成財□之賞人 力之入有不暇 論之 不但爲一時居民之所無事
非亦爲 萬歲行客之所 永□者故略記□未處後所旅同主者則吳弘健輿□□兵
□其人也□……
□施主 朴世男等 83명
康熙 29년 庚午9月立安泰里二百戶爲始役□
八月至七朔終畢
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강희 29년(숙종 16년, 1690)에 세웠다. 橋는 대로에 위치했고, 본디 목교였다. 목교는 훼손에 따른 보수시 많은 노력이 동원되었으며, 오인발 등이 주동이 되어 안태리 주민 약 200호의 인력 동원과, 박세용 등 83명의 재물을 희사하여 석교를 세웠으며, 만세행객지소가 되었다.
우측에도 소비가 서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문자의 판독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