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포항은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92)의 고장이다.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는 그의 본가가 있었던 곳. 곧 그의 본향이다.
그의 어머니 고향(친정)이 영천이었는데, 해산 때가 되어 친정에서 그를 낳았다.
정몽주는 유년시절을 영천 외가에서 보내고 오천 문충리로 왔다. 문충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청년기에는 외가인 영천으로 이거했고, 과거급제 후에는 서울(개경)로 옮겨 살았다.
포은의 본가 자리인 문충리는 포은의 시호 ‘문충(文忠)’에서 나온 지명이며, 오천읍 구정리의 ‘구정(舊政)’ 또한 ‘옛 정승이 살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역시 포은과 연관된 지명이다.
문충리와 가까운 오천읍 구정리에는 1634년(인조 12) 유생들이 건립한 鄭夢周 遺墟碑閣 이 있다.
1980년대 유허비각을 중수할 당시 땅에 묻혀있던 정몽주 유허비가 발견됐고, 발견된 유허비는 이후 오천읍 원리 오천서원 내 유허비각으로 옮겨졌다. 오천서원은 정몽주를 제향하고 있다.
오천읍 지역은 정몽주와 관련된 곳이 많은 데다 그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온갖 일에 그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바람에 오천읍에 들자마자 온통 정몽주만 떠오르는 듯하다.
오천읍의 주요 도로 중 하나가 ‘정몽주로’이며, 학교 뜰에는 정몽주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음식점 등 상점의 이름으로 정몽주의 호 ‘포은’을 붙인 집들이 자주 보인다.
최근까지만 해도 포항에서는 뜻 있는 이들이 포은문화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이 연구회 주관으로 포은문화축제를 열기도 했다.
포항시가 전문기관에 의뢰했던 생가 터 복원 용역 결과보고서가 얼마 전 나오기도 했다. 정몽주는 여전히 그렇게 오천읍에서 살아있는 존재로 생성되고 있다.
정몽주는 어릴 적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이름마저 세 번이나 바꿀 정도였다. 처음에는 ‘몽란(夢蘭)’이라 했다. 어머니 영천이씨가 임신했을 때 난초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린 꿈을 꾸었다 하여 그렇게 지은 것이다.
9세 무렵에는 ‘몽룡(夢龍)’으로 바뀌었다. 하루는 영천이씨가 물레질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를 감고 올라 배를 따 먹으며 자기를 향해 빙그레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놀라 깨어나 뜰에 나가보니 아들이 배나무에 올라가서 어머니를 향해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고쳤다. 관례를 치를 즈음에는 아버지가 꿈을 꾸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주공이다. 그대의 아들은 후세까지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다. 잘 길러라”라고 했다. 그 꿈에 따라 이름을 다시 ‘몽주(夢周)’라 한 것이다.
오천읍 문충리 등 지역에서 노인들의 구전으로 전해오는 그의 출생에 관한 얘기는 보다 재미있다.
포은의 아버지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갑자기 부인과 합방을 하라고 다그쳤다. 이어 해가 입 속으로 들어왔다. 해가 입 밖으로 새 나올까봐 입을 꼭 다문 채 문충리 집에 조랑말을 타고 급히 돌아왔다.
부인은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와 급히 들어오라고 손짓을 해도 부인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베 짜는 일에만 골몰할 뿐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 마당에는 말 한 쌍이 교미를 하고 있었다. 이를 가리키며 아버지가 손짓으로 부르자, 사대부 집안에서 대낮에 무슨 해괴한 일이냐고 무시를 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입을 열자 해가 밖으로 새어나와 타고 온 조랑말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서야 부인이 알아차리고는 베틀에 놓인 칼로 조랑말의 배를 갈라 해를 마셨다. 그리고 나서 포은이 탄생했다는 것.
그래서 어릴 적 포은이 지나가면 마을 어른들은 우리나라 시조 왕들이 다 알에서 태어났는데, 안타깝다고 하기도 하고, 당나귀가 간다며 놀리기도 했다.
특히 정몽주 출생설화에 등장하는 해가 유독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포항은 본시 해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랬다.
이곳 포항은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이 깃든 고장이기도 하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고려 때 ‘삼국유사’에 채록되어 전해온다.
서기 157년(신라 아달라왕 4) 동해안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는데, 어쩌다 물길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日官)은 우리나라에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버려서 생긴 괴변이라 했다. 왕이 일본에 사자를 보냈다.
연오랑에게 사연을 얘기 한즉, 연오랑은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었다.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라 했다. 신라에서 그 말대로 했다. 바로 해와 달이 빛을 찾았다. 이에 왕은 그 비단을 국보로 삼았다.
비단을 넣어둔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했다는 설화다.
이 설화는 내용도 그렇고, 주인공의 이름과 지명 등으로 미루어 태양신화로 본다. 영일은 ‘해맞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영일만이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陽烏)전설’의 변음이며, 세오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고 풀이된다.
오천(烏川) 용덕리의 일월지(日月池)가 그 제사를 지내던 현장이며, 이 지역을 도기야(都祈野)라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지역을 일월향(日月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 침략 전까지 이 부근에는 신라시대부터 해와 달에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있었다.
매년 9월 중양절에 제사를 드렸다. 일제 침략 후 철거하였다 한다.
또 일월지 앞둑 중앙에 일월지 사적비가 있는데, 이곳도 일제 침략 후 일제가 철거했던 것을 1992년 3월 영일군의 지원으로 주변을 정화하면서 다시 건립했다.
현재 일월지는 군부대 내에 있다. 포항시는 일월사당을 복원하고 매년 10월에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낸다.
그러니까 정몽주의 탄생 이야기에서 해가 나오는 것은, 예부터 있어온 해의 고장으로서의 정기를 이곳 태생인 정몽주가 담뿍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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