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월광사터에 있는 2기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129호. 높이 각각 5.5m. 두 석탑은 월광사터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데, 서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월광사터는 해인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가야천과 그 지류가 합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30 합천군 불우조(佛宇條)에는 “월광사는 야로현 북쪽 5리에 있는데, 월광사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인 월광태자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고 하였다. 이 밖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두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을 따라 크기나 양식은 대체로 같다. 다만, 조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같은 시기에 함께 건립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받침 부분인 기단부(基壇部)는 규모에 비해 많은 돌을 사용하여 조립하였다.
특히 두 석탑 모두 위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을 8장의 널돌로 구성한 것은 보기 드문 수법이다.
위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에는 모두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는데, 동탑은 가운데 기둥이 하나이지만, 서탑의 가운데 기둥은 2개이다.
두 석탑의 아래층 받침돌 덮개돌의 윗면은 경사가 비교적 큰 편으로, 가운데 부분에는 2단의 굄이 있는데, 아랫단은 두꺼우면서 둥글고, 윗단은 얇으면서 각진 모습이다.
두 석탑의 윗층 받침돌 덮개돌의 처마 밑면에는 모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새겨져 있는데, 동탑의 부연은 서탑의 그것보다 빈약한 편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얕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으로, 밑면에는 5단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모난 굄이 조각되어 있다.
처마는 대체로 수평이고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하며, 네 귀퉁이가 살짝 반전(反轉)하여 경쾌한 곡선을 이루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동탑에만 노반(露盤)이 남아 있을 뿐, 서탑은 완전히 없어진 상태이다.
이 석탑은 몸돌에 비해 아래층 받침돌이 지나치게 크다는 느낌을 주지만, 전체의 균형은 잃지 않아 보인다. 각 세부의 결구(結構)가 명확하고 돌을 가지런히 잘 다듬어 쌓은 수작(秀作)의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가야 월광태자 얘기>
대가야의 월광태자와 신라의 마의태자를 비운의 태자라 한다.
모두 존망에 처한 나라와 함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인데 마의태자는 신라 경순와의 태자로 있을 때 고려 왕건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다.
경순왕은 왕건에 항복하지만, 그의 아들인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 입었던 비단옷을 벗어 던지고 고려가 주는 양식을 먹고 사느니 풀뿌리를 캐 먹더라도 끝까지 신라인으로 남아 죽겠다며 삼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다 하여 마의태자라 부르고 있다.
이와 함께 그보다 빠른 삼국시대의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태자였다. 아이러니하게 대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한다.
월광태자의 아버지는 대가야의 이뇌왕이고 어머니는 신라의 이찬 비지배의 딸로 국가를 뛰어 넘어 결혼을 했는데 쉽게 말하면 대가야와 신라 간의 결혼동맹이 이루어졌다. 이들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신라의 트집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7년 만에 깨어져 끝내는 대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월광태자와 도설지왕이 같은 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KBS 역사스페셜은 월광태자와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솔지를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동시대의 인물로서 도설은 달을 뜻하며 월광 또한, 달빛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설지는 단양의 신라적성비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아마 신라가 한강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면서 대가야의 도설지도 장군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이 왜 신라의 장수로 출전했는지 그 이유도 설명하고 있다.
당시 대가야의 정세는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이 녹록지 않았다. 우방이라 믿었던 백제가 느닷없이 창끝을 겨누며 공격해와 대가야의 영토인 남원, 임실, 하동유역까지 빼앗겨 더욱 위기감을 느낀 대가야는 마침내 신라에 혼인동맹을 제의하고 큰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들의 혼인동맹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혼 7년 만에 파탄이 난다.
그 이유를 보면 결혼할 때 신라에서 따라간 하인들의 옷차림을 모두 대가야의 복식으로 바꾸어 입게 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동맹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이에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다시 국가존망의 위기의식을 느꼈고 어느 한쪽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 나라의 존립 자체가 힘들었다. 급기야 가야 내부에서도 백제와 협력해야 한다는 파와 그래도 신라 쪽에 붙어야 한다는 파벌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백제 쪽으로 기울어졌고 어머니가 신라 사람인 월광태자는 난처한 처지에 처해 신라로 망명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역사스페셜 출연진은 추정했다.
561년경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에도 도설지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같은 인물로 보면 신라에서 혁혁한 전공을 많이 세웠던 분 같다.
그러나 국제관계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는 서로 짝짜꿍하며 힘을 합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다시 고구려와 손을 잡고 이번에는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는 관산성에서 백제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와 반대로 백제와 협력관계인 대가야는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 패하자 대가야의 몰락을 자초한다.
562년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를 총사령관에, 사다암을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 5천을 내주어 대가야를 정벌케한다.
대가야는 힘 한번 제대로 서보지도 못하고 520년 만에 멸망하여 신라에 복속된다.
그러나 신라로서는 가야 백성의 민심을 잠재우는 게 큰 문제였다. 신라는 대가야의 태자였던 월광을 왕으로 앉혀 잠시나마 내분을 수습하려 했으며 신라는 이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월광태자를 내쳤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보면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은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이라는 유추도 가능해진다.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월광은 더는 갈 곳이 없자 합천 가야산의 거덕사에서 출가해 인근에 월광사를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다.
월광태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나온 근거가 많지 않다. 그래서 조금씩 다르게 월광태자를 설명하고 있으며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으로 태어났으며 태자로서 승려가 되었고 여생을 월광사에서 보낸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월광태자가 여생을 보냈다는 월광사는 현재 옛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으며 창건 연대만 달리하는 비슷한 모양의 삼층석탑 두기만 월광 태자의 비운을 아는지 천 년의 세월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월광사지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에다 3층의 몸돌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형태의 석탑이다.
기단은 아래층과 위층 모두 각 면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우주를 조각했으며 몸돌의 모서리에도 마찬가지로 우주조각을 했다.
옥개석인 지붕돌은 밑면이 5단 받침으로 언뜻 보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동탑의 기단부는 서탑에 비해 많은 부재가 들어갔으며 서탑은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하며 여러 곳에 파손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기단석의 각 면 중앙에도 기둥을 새겼는데 서탑에는 2개지만 동탑은 1개뿐이다. 두 석탑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고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각 부분의 구성방법과 양식에서 약간씩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이를 보면 두 석탑이 함께 만들어진 게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합천 하면 생각나는 여행지가 가야산과 해인사이다.
물론 해인사는 법보사찰로서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대찰이며 최고의 여행지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대가야 비운의 황태자인 월광태자의 사연이 알알이 새겨진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만나보고 월광태자의 마음을 노래했을 시인 묵객은 아직도 없는가.
"월광사지를 바라보니
아득한 풍경 소리 어느 시절 무너지고
태자가 놀던 달빛 쌍탑 위에 물이 들어
가야천 내 맑은 물줄기 새 아침을 열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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