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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남

합천 묘산 묵와고가(陜川妙山默窩古家)

by phd100 2018. 9. 30.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이다. 1984년 12월 24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때 선전관을 역임하였던 윤사성이 지었다고 전하는 옛집으로 그 뒤 자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윤사성의 현손, 윤우(1784-1836)의 호가 묵와(默窩)이다.)

 

처음 지을 당시에는 집터가 600평이었고 명당의 산기슭에 의지하여 높게 지었다고 한다. 한때는 가업이 융성하여 집의 규모가 백여칸에 이르렀으며, 지금도 우람한 집이 자리잡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왼쪽으로 산기슭에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마당보다 훨씬 높게 기단을 쌓고 'ㄱ'자형으로 지었는데,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내루가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의 오른쪽으로 중행랑채가 이어지고 거기에 중문이 있어 안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안채는 행랑채보다 한단 높은 기단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ㄱ'자형이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으며, 안채 왼쪽 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사당이 있다.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는 실례이다.

 

<묵와 고가의 역사>

묵와고가가 있는 묘산면 화양리는 가야산 줄기, 달윤산 자락에 있는 산골마을이다.

화양과 나곡, 상나곡마을로 이루어졌다. 숨어 살기 좋다고 소문난 것일까. 조선전기에서 중기까지 이런저런 사연을 달고 화양과 나곡마을에 여러 명이 숨어들었다.

 

1) 먼저 540여 년 전, 윤장이 화양마을에 몸을 숨겼다. 파평윤씨 14세손으로 1380년 고려문과에 급제했으며 조선 문종 대에 사재판서(司宰判書)를 지냈다.

윤장은 김종서의 장인, 윤원부의 종형제로서 김종서(1383-1453)가 1453년 계유정난으로 희생되자 화를 피해 들어왔다.

 

2) 이어 야천 박소(1493-1534)는 1530년, 훈구파에 의해 파직 당하자, 낙향하여 이 마을에 들어왔다. 야천의 어머니는 윤장의 손자인 윤자선의 딸로 화양마을은 야천의 외가였다.

현재 나곡으로 가는 고갯마루에 야천을 기리는 신도비가, 그 아래에 재실이 남아 있다.

 

야천 신도비는 나곡마을로 접어들기 전 고갯마루에 서있다. 중종 때 문신, 야천 박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다.

3) 상나곡마을에는 오래된 묘산소나무도 있다. 마을로 가는 길처럼 구불구불하면서 꿈틀대어 살아 움직이는듯하다. 마을사람들은 당산목으로 섬기고 있다.

 

1613년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하게 되자, 김제남 6촌뻘 되는 이가 상나곡마을 소나무 아래 초가를 짓고 살았다 한다.

이 소나무가 마을사람들이 신목(神木)으로 여기는 '묘산소나무'로 다랭이논 옆에서 500년 이상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묵와고가 천천히 둘러 보기>

화양마을에 있는 묵와고가는 화양, 나곡, 상나곡마을 중에 화양마을은 윤장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파평윤씨 집성마을이 되었다. 말이 집성마을이지 집들은 산자락을 감아 돌아 성글게 들어서 집성(集姓)일지 몰라도 '집촌(集村)'은 안 되는 마을이다.

 

묵와고가는 이름처럼 조용하고 잠잠한 집이다. 솟을대문이 굳게 닫혀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대문채 아래에 있는 키 작은 굴뚝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세상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라면 화양마을은 세상 밖 마을 같아 고요하고 잠잠하다. 너무나 적막한 나머지 발걸음 떼기가 민망할 정도다. 마을경로회관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묵와고가(默窩古家)가 있다. 고가의 이름처럼 잠잠하고 고요한 집이다.

 

윤장이 터를 잡고 인조 때 윤사성이 지었다 하니 350년은 넘은 집이다. 윤사성의 현손, 묵와 윤우(1784-1836)에 이르러 가세가 번성하였다 한다.

고가 옆 육우당(六友堂)은 묵와의 여섯 아들의 뜻을 잇기 위해 후손이 건립한 제실로 묵와 이후 번창한 가세를 짐작케 한다.

 

육우당은 1960년대까지 서당으로도 쓰였다. 독립운동가 만송 윤중수(1891-1931)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만송은 1919년 파리장서 서명운동 당시 함경도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2차유림단의거 때 수천석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묵와고가는 한창 때 600평대지에 집채만 여덟 채, 칸수는 100칸에 이르렀다. 지금은 솟을대문채, 사랑채, 안채, 중문채, 중문행랑채, 사당채만 남아 있다.

독립자금을 댄 것과 연관이 없지는 않을 터, 건국훈장애족장이나 겸손하게 대문에 달려 있는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 마을회관 앞에 있는 공적비로는 이 집안을 위로하기에 부족해 뵌다.

 

묵와고가는 산자락을 다듬어 지은 집으로 기단은 막돌로 허튼층쌓기로 높게 쌓고 그 위에 사랑채와 안채를 올렸다.

사랑채는 내루(內樓)가 돌출된 'ㄱ' 자형 집으로 처마에 '묵와고가' 현판이 달려 있다. 홑처마에 남쪽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누마루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단아한 가운데 다채로운 맛이 난다.

 

묵와고의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앉아 있다. 남쪽지붕은 맞배지붕, 내루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특이하다. 내루의 덤벙주초와 기둥, 토방 위 섬돌은 모두 거칠고 막 생겨 우락부락한 사내를 보는 것 같다.

 

고가의 남측에 있는 안채지붕은 맞배지붕이나 남쪽에서 보면 한쪽은 맞배지붕, 다른 쪽은 우진각지붕처럼 보여 사랑채 지붕같이 다채롭다.

 

우락부락한 사랑채 누마루의 덤벙주초와 주춧돌 결 따라 들어앉은 휘어진 기둥이 멋스럽다. 잘 다듬은 뽀얀 화강암 주초나 여러 번 대패질한 매끈하고 곧은 기둥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자연미가 있다.

그랭이법으로 다듬어 맞추긴 했어도 애초에는 이리 잘 맞지 않았으리라 짐작되건만 무거운 세월이 내려앉은 겐가, 이제 나무기둥 밑동과 주춧돌이 한 몸이 되었다.

 

묵와고가의 굴뚝은 세 개다. 대문채와 안채의 키 작은 굴뚝과 사랑채의 기단굴뚝이다. 대문채 굴뚝은 눈구멍을 크게 뜨고 오는 이를 지켜보며 경계하고 있다.

황토를 주물러 암키와로 굴뚝 몸을 만들고 수키와로 연기 구멍을 냈다. 귀여운 모습에 솟을대문 위세가 누그러질 만하건만, 지금은 염(殮)하듯 종이로 두 구멍을 막아 애처로워 보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사랑채 기단굴뚝은 숨어 살기로 작정한 묵와고가 선조의 생각이 담긴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마루 밑에서 토방을 거쳐 기단까지 내굴길(煙道)을 내고 굴뚝 몸은 만들 생각 없이 기단에 연기구멍만 내었다. 연기구멍에 거미줄이 쳐 있어 안타깝게 보인다. 더 이상 연기를 뿜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채 기단굴뚝 마루 밑에서 기단까지 내굴길을 내고 굴뚝 몸 없이 기단에 연기구멍만 내었다.

 

안채굴뚝 대문채굴뚝보다 더 키가 작다. 대문채나 사랑채 굴뚝과 달리 연기구멍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어 아직 ‘살아있는’ 굴뚝으로 보인다.

 

안채는 살림하는 공간이어서 보여줄 수 없다는 집주인의 야속한 말에 안채 마당은 둘러볼 수 없다. 내가 때를 잘못 잡은 거겠지. 집주인은 오늘 몸이 안 좋아 보였다. 야속하다고 한 내 속말이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안채 굴뚝은 대문채굴뚝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키는 안채굴뚝이 더 낮다. 집 밖에서 본 안채굴뚝은 다행히 구멍은 막혀 있지 않고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멀리서 보아 거미줄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히려 잘 된 건지 모르겠다.

 

거미줄이 없다면 혹시, 군불연기가 안채 뒷마당에 자욱하고 600년 묵은 모과나무 허리를 휘감는 저녁풍경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