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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충북

<중원 미륵 사지(中原 彌勒寺址)>

by phd100 2021. 3. 11.

 

<중원 미륵리 사지(中原 彌勒里 寺址 또는 大院寺址,彌勒寺址)>

 

충북 충주에서 남동쪽으로 33㎞ 거리의 작은 분지를 이룬 마을에 1천여 년 전인 고려시대 초 세워진 미륵사지(사적 제317호)가 자리 잡고 있다.

미륵리 사지는 석불입상과 석등, 5층 석탑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이 절터에는 이외에도 건물지의 초석을 비롯하여 사각석등, 돌거북, 당간지주, 온달장군 공기돌 등 많은 석조물들이 있다.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이 사지는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로 수안보 온천에서 약 10㎞ 거리에 있으며 사람들은 이곳에 높이 10.6m나 되는 석불입상(보물 제96호)이 있어 미륵대원지 또는 미륵뎅이라 부르고 있다.

 

이 가운데 유력한 전설로는 신라 천년사직이 고려에 넘어가자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하늘재(계립령)에 이르러 잠을 자다 꿈을 꾸게 된다.

 

태자와 공주가 동시에 꾼 꿈에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이곳 서쪽 고개를 넘으면 절을 지을만한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에 마애불을 조성하면 억조창생에 자비를 베풀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따라 마의태자는 미륵리에 머무르면서 석불입상을, 덕주공주는 마주 보이는 월악산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특히 석불의 다른 부분은 이끼가 끼거나 거무스레 퇴색됐는데 얼굴 부분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여 신비함을 자아낸다.

 

또 석불은 목조가구 속에 안치된 석굴사원으로 그 앞에 전실(前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석굴 내부 축대 돌들이 대화재로 심하게 그을린 흔적이 있는데도 미륵석불은 전혀 손상되지 않아 이 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미륵사지는 장방형 평면을 이룬 약 1만4천여㎡의 비교적 규모가 큰 절터로 지난 1976년부터 경내 마을 이전 및 4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이 진행돼 옛 절터의 주춧돌 등 배치 상태와 불상, 석등, 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단탑식(單塔式) 가람임을 알 수 있게 됐다.

 

미륵대원지는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석굴사원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천하명당 천심십도혈(天心十道穴)이라 한다.

 

이는 지귀(至貴), 지선(至善), 지격(至格)의 땅으로 미륵불 뒷산이 주산인 주흘산이고 왼쪽 신선봉이 청룡, 오른쪽 포암산이 백호, 앞으로 보이는 월악산이 조산으로 이들 사신산(四神山)을 연결하면 십(十)자가 되며 이 가운데가 천하명당인 미륵대원지로 알려져 있다.

 

또 불상 앞길을 따라 1시간 가량 오르면 삼국시대 때인 서기 156년에 백두대간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의해 처음 개척된, 우리나라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계립령)가 나온다.

 

<둘러 보기>

1.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主尊佛)로 특이하게 향해 서 있으며, 본래 석굴식(石窟式)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석불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며, 미륵리 절터에 남아 있고, 높이는 10.6m 이다.

전체적인 모양은 머리카락(나발) 위에 팔각형의 넓은 판돌 모양 갓을 쓰고 있다. 둥근 얼굴에 길게 감은 눈, 꼭 다문 두툼한 입술을 하고, 목에 세줄의 선인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었으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듯 한 인상이다.

몸체에서는 둥근 보주(연꽃봉우리 모양 장식)를 든 왼손과 가슴에 대고 있는 오른손, 얼굴 크기에 비하여 어깨의 폭이 좁으며 굴곡이 없는 원통형의 몸매를 가지고 있다.

 

2. 미륵리사지 석조보살의상 (彌勒里寺址 石造菩薩倚像)

머리에 보관을 쓴것으로 보이며 관식은 어깨까지 내려온다. 왼손은 법의자락을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배 부분에 댄 것으로 보인다. 왼발은 수직으로 내렸으며 오른발은 왼발 종아리 뒤쪽에 대고 있다.

 

3. 미륵리 사지 귀부(彌勒里寺址龜趺)

미륵리 사지에 있는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이다. 현재 사각 석등 옆에 자리하고 있다. 옮기기 힘든 대형 크기로 보아 원래 이곳에 있던 자연 암반을 이용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의 머리는 목을 앞쪽으로 내민 형상이며 눈, 코, 입 등은 뚜렷하지 않다. 발은 몸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등 부분에 거북의 등딱지 문양은 없으나 귀갑대(龜甲帶)는 부분적으로 보인다.

귀부(龜趺) 뒷부분에도 꼬리나 다리 등은 보이지 않는다. 왼쪽 등딱지 앞부분에 새끼 거북 두 마리가 조각되어 있어, 표현된 2마리의 새끼 거북은 은근한 미소를 자아내고 있다. 귀부 옆쪽에는 정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외형상 거북의 머리와 몸을 하고 있고, 윗부분에 비석을 끼워 고정하는 홈이 있어 이 절터의 사적비를 받치는 데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비석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전체적인 외형과 돌 다듬는 수법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미완성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부의 치석(治石)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로서 의의가 크다. 또 거대한 규모나 형태로 보아 미륵리 사지를 처음 조성할 당시의 면모를 알 수 있다.

 

4. 미륵리사지 사각석등(彌勒里寺址 四角石燈)

미륵리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화사석·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 수도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미륵리 사지에 이런 양식의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측면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5. 미륵리 오층석탑(彌勒里 五層石塔)

미륵리 오층 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미륵리 석불입상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위치에 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높이 6m. 2층 기단과 5층 탑신으로 되어 있으며, 네모난 자연석을 기단으로 하고 있다.

특이하게 꼭대기에는 긴 쇠고챙이 모양의 찰간(큰 절 앞에 세우는 것으로 깃대와 비슷함)이 솟아 있다.

탑의 하단부가 두텁고 상단부로 가면 급격하게 줄어 조형적인 비례감은 떨어진다. 탑의 일부분은 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어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탑을 구성하는 돌은 장식을 하거나 다듬은 흔적이 없는 자연석에 가까운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탑의 상륜부는 훼손이 심하여 거의 남아있지 않다.

 

6. 온달장군 공기 바윗돌

자연적인 바위에 약간의 인공(人工)이 가미되었으며, 바위의 생긴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 불려지고 있으며, 정상부근에 좁은 폭(幅)으로 길게 홈을 파서 그 홈을 따라 바위 밑부분 까지 물이 잘 빠지도록 되어 있다.

바위 위에 올려 져 있는 직경 1m 가량의 둥근돌(공기돌)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온달장군(溫達將軍)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고 하여 온달장군 공기돌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는 다른 곳과 다르게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지 않고 특이하게 눕혀져 있다.

 

7. 미륵대원사(彌勒大院寺)원지(院址)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 터이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조사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사찰 이름으로 대원사(大院寺)가 확인되었고, 대원사지 동쪽에 미륵대원사(彌勒大院寺)원지(院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대원(彌勒大院)’이 이곳에 있었고, 많은 출토 유물을 통하여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현재 중원 미륵리 사지의 석실 상부의 목재구조(木材構造)는 남아 있지 않고, 하부 석실 중심에 미륵대불(보물 제96호)이 위치하고 있다. 그 앞쪽엔 석등을 비롯하여 괴산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돌거북,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창건 당시의 사격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 석실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 있지 않으나 석실 구조물 중앙에는 주존 불인 미륵여래(彌勒如來)가 봉안되어 있으며 발굴 조사 때 ‘미륵당(彌勒堂)’, ‘명창삼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1192년(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였다.

 

현재 사원지로는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로서, 그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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