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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충남

논산 개태사2

by phd100 2021. 4. 15.

 

개태사(開泰寺)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936년(태조 19)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

근래에 들어와 수차례 발굴 조사되었는데, 최근 법당 등을 복원한 개태사 구역과 원래의 개태사지로 구분된다.

 

개태사지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있는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개태사에 전하는 문화재로는 석조삼존불입상과 오층석탑, 철확 등이 있고 개태사지에서는 석조공양보살상과 석조(石槽) 등이 수습되었다.

개태사 마당에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인데, 원래는 석조공양보살상과 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즉 이 석탑 앞에 석조공양보살상이 탑전 공양보살상의 형태로 놓여 있었다.

현재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부근에 위치한 용화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공양보살상은 두부가 결실되어 있으며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형상이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져 있는 현재의 개태사 구역은 936년 태조의 명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여 940년 완공되었다.

개태사 북쪽에 위치한 개태사지는 태조 사후에 정비된 지역이다. 개태사지는 불전지와 진전지로 구분되며 중앙에는 출입시설이 있었다.

주요 출입구가 진전지와 불전지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보아 두 사역(寺域)은 동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개태사지는 출토된 막새를 통해서 조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출토된 기와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것은 꽃술대가 시문된 수막새 기와이다.

이 기와는 954년(광종 5)에 창건된 충주 숭선사지 초창기 기와와 매우 유사하다. 충주 숭선사지를 비롯하여 청주 흥덕사지, 안성 봉업사지 등에서도 동일한 문양의 막새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막새기와가 출토된 지역은 954년을 전후한 시기인 광종 재위 전반기에 창건되거나 중수된 사찰로 보는 것이 통상적이다. 따라서 개태사지 석조공양보살상 역시 광종 때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이 개태사의 낙성을 기념해 직접 작성한 「개태사화엄법회소」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의 신검이 마성(馬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왕건에게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고 한다.

신검이 항복을 청한 장소는 당시 고려군 지휘부가 주둔했던 왕건의 숙영지라 할 수 있는데, 현재 개태사 주변에 있는 토성이 바로 마성으로 정비되고 있다.

특히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세워진 자리가 마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이 위치가 바로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장소로 추정된다. 즉 이곳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인 셈이다.

 

개태사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과 관련하여 다시 등장한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피난에서 돌아오던 길에 공민왕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확신하기 위해 태조영전이 있는 개태사에 신하를 보내어 천도에 관한 점을 치게 하였다.

 

결국 불길한 점괘가 나와 천도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1383년(우왕 9)에는 왜구 천여 명이 내륙으로 들어와 충북 보은을 거쳐 개태사를 경유 해 계룡산에 웅거하였으며, 창왕 즉위년에는 개태사에 침범해 노략질하기도 하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해 태조 왕건이 세운 개태사는 고려 말기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하며 지역의 거점 사찰로서 기능하였지만, 고려말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

 

<개태사와 왕건>

940년 12월에 창건한 지 4년 만에 개태사가 드디어 완공되었습니다.

936년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한 그 자리였던 황산에 개태사를 창건하기 시작했고 4년 만에 대역사를 마무리 지은 것이다.

 

비록 견훤이 죽었던 사찰을 취하여 개태사를 중창했다는 시각도 있고 견훤의 추종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후백제가 멸망한 지점에 전승기념으로 세웠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당시 엄청난 공사였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분명한 것은 삼국을 통일한 것을 의미 있는 자리에 개태사를 지음으로써 오랫동안 후세 사람들에게 통일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개태사를 창건한 것이다.

 

완공되어 낙성을 축하하는 화엄법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왕건이 직접 소문(불교 용어로 부처나 명부 앞에 죽은 이의 죄복을 아뢰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개태사 발원문이다.

 

이 발원문은 개태사 안의 돌에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왕건은 이 의미 있는 개태사에 자신의 진영과 옷 한 벌, 그리고 옥대를 봉안하여 그 추억을 더욱 의미 있게 했다.

 

험난한 세상에 태어나 민족 통합을 이룬 고려의 건국자 태조 왕건은 943년 5월 죽었다.

고려를 건국한지 26년 만에 통일을 한지 7년 만에 향년 67세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왕건이 묻혀있는 현릉은 북한 개성시 송악동에 위치하고 있다.

 

죽기 한 달 전인 4월에는 박술희를 불러 든든한 외가가 없는 태자 왕무의 후견인 역할을 부탁하였고 친히 후대 임금들이 경계하고 지켜야 할 정치 지침인 '훈요십조'를 남겼다.

고려사 태조편에 훈요십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자의적 타의적 진행되었던 혼인 정책으로 부인만 29명이었기에 그의 자손들이 왕위를 넘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왕건이 죽기 전에 이미 이후 일어날 왕위 다툼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태자 왕무의 안위를 박술희에게 부탁한 것이다.

 

후삼국시대의 세 영웅 중 왕건은 비교적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나 초반에는 궁예에게 의탁하여 출세가 보장된 길을 택하여 큰 결심으로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렇게 보면 왕건은 일이 쉽게 잘 풀린 듯하나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과 포용력, 과감한 결단력, 뛰어난 감각의 용인술이 있었기에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건이 죽기 한 달 전 남겼다는 훈요십조가 위작으로 의심받기도 하는데, 가장 맹점이 되는 부분이 8번째 조목으로 백제인들을 경계하며 난을 일으킬 수 있으니 인재 등용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왕건 치세에서도 태자 왕무의 외가는 나주, 영암 출신의 최지몽, 영광 출신의 김심언,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이 자신의 왕비였고 3대 정종의 왕후인 문공왕후 박씨는 심지어 박영규의 딸일 정도로 후백제계의 인물을 중용하였다.

 

또한, 왕건이 자주 정치에 이용하고 맹신했던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도 영암 출신이었다.

 

왕건의 통일 대업에 후백제계의 인물들을 중용했음에도 죽으면서 후백제계 등용을 철저히 봉쇄하고자 했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문이 있었던 훈요십조가 다시 한번 조작 의혹을 받는 사건이 일어난다.

 

왕건이 작성한 훈요십조는 내내 보관되어 오다가 1011년 거란족의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한데 우연히 경주 출신인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종(고려 8대왕 재위 기간 1009~1031)에게 바쳐졌다고 하니 이 과정이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고려 초기에는 이미 정계에 진출했던 후백제계의 입김과 정치 활동도 활발했기에 이들을 정계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이때 조작됐을 거라는 의혹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종이 거란족의 침입을 받아 남으로 몽진할 때 전주에서 가까운 삼례역까지 왔을 때 한 신하가 '전주는 옛 백제로서 성조께서도 미워하셨으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십시오'라고 현종에게 얘기해서 더 쾌적한 전주로 가지 않고 장곡역에서 유숙한 사례가 있다.

 

만약 조작되었다면 한다면 현종이 이미 8조와 부합하는 말을 들었으니 조작되었다고는 무리가 있다.

조작설은 의혹 제기일 뿐이었고 왕건이 견훤에게 죽을 뻔 한고비를 몇 번 넘기다 보니 이미 자신의 백성이 된 후백제계 사람들을 믿지 못한 노파심의 유언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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