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정림사지의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塑造人物像片)과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이다.
이는 정림사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발견된 다른 사찰에도 확인되므로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단, 정림사지는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중문 밖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 이 연못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므로,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최근 발굴 결과 드러난 강당 및 금당 좌우로 회랑과 연결된 부속 건물 배치 형식은 부여 능산리사지(567년)와 부여 왕흥사지(577년)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금강사지 등 다른 형식의 가람배치로 보고된 사지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중국 북위(北魏) 낙양(洛陽)의 영녕사(永寧寺)나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목탑의 탑내 소상 사례에 비춰볼 때 정림사지 기와구덩이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목탑 내부에 안치됐던 것들로 추정되므로 정림사지 5층석탑 건립 전에 5층목탑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 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태평팔년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된다. 이 문자와의 발견수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 중에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고려 재건시의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람배치형식(伽藍配置形式)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세워졌으며 주위(周圍)를 회랑(廻廊)으로 구획(區劃)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 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오층석탑은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 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 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