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강원

평창 오대산 상원사

by phd100 2021. 9. 3.

 

상원사 上院寺

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다. 705년(성덕왕 4)에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하였으며,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

 

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

 

세조도 상원사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유물이 나와서 보물 제79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되어 있는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되어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으며,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으며,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 平昌 五臺山 中臺 寂滅寶宮>

 

보물 제1995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 건물이다.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건물로, 불사리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므로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공통적인 형식을 지닌다. 우리나라에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강원도 인제의 봉정암(鳳頂庵), 영월의 법흥사(法興寺), 정선의 정암사(淨巖寺), 오대산 월정사 등 5대 적멸보궁이 전해온다. 이 가운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귀국 직후 직접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다른 적멸보궁의 경우는 사리를 안치한 장소가 분명하여 방등계단(方等戒壇)이나 사리탑(舍利塔)이 조성되어 있지만, 오대산의 경우는 어느 곳에 불사리가 안치되어 있는지 그 정확한 장소가 알려지지 않아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자장은 신라를 불국토로 재편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귀국하면서 부처의 정골(頂骨)과 불사리 100과를 가져왔다고 전하며, 당시 신라 영토 각지에 불사리를 나누어 봉안하면서 보궁들을 창건했다.

 

적멸보궁은 상원사(上院寺)를 지나 중대(中帶) 사자암(獅子庵) 위쪽에 위치한다. 사자암은 적멸보궁의 관리와 예불을 위한 노전[爐殿 : 대웅전과 그 밖의 법당을 맡아 보는 임원의 숙소]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보궁의 노전승이 거처하는 곳이다.

 

적멸보궁 건물의 네 벽 모두는 널빤지로 꾸며진 판장벽(板張壁)이며, 정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달고 양 옆 칸에는 높은 들창을 달았다. 지붕은 청기와를 덮었으며, 용마루와 합각마루에 용두(龍頭)를 올렸다.

 

최근의 조사에서 이 건물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점은 평면의 구성에서 고대의 내외진 이중형식 금당을 연상시키는 외진부와 감실형 내진부가 확인되었으며, 외부의 기둥 위에 설치된 이익공과 달리 내진부의 기둥에는 2출목의 다포가 짜여져 있어 구조상의 차이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내진부로 변경되어 있는 원 건물의 외부공포는 조선전기에 유행한 다포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없는 내부에서 뒷벽에 뚫린 창을 통해 뒤쪽 어딘가에 묻혀있을 불사리를 예배하게 된다. 건물 바로 뒤에는 84㎝ 높이의 지붕석을 얹은 비석이 서 있다. 비석면에는 5층 목탑의 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으며, 사리탑의 상징물이라 보여진다.

 

 

'여행-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해 천곡황금박쥐동굴  (0) 2021.09.03
평창 오대산 사자암적멸보궁  (0) 2021.09.03
강릉 소금강금강사  (0) 2021.09.03
강릉 소금강  (0) 2021.09.03
강릉 백운사  (0)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