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용마루를 용으로 장식한 사찰, 장유사>
우리나라의 실제 불교의 전래는 고구리보다 훨씬 앞선 『가락국(금관가야)』으로 밝혀지고 있다.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는 가야사의 《삼국유사》 「가락국기」 기록을 신화로 믿지 않는다. 황당한 한국 역사학계다.
서양의 신화는 역사로 인정하면서 배달민족의 전래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하는 역사학계의 이중잣대를 바로 잡아야 한다.
금관가야의 장유화상은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가야 땅으로 올 때 같이 온 허보옥(許寶玉)으로 허황옥의 오빠이다.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김해 불모산에 들어가 부귀를 뜬구름 같이 보고 불도를 설명하면서 산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 부른다. 그의 흔적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김해 용지봉 장유사>
조선 초기 주세붕이 쓴 시문집인 『무릉잡고』 속에 서기 1544년에 쓴 「장유사 중창기」가 있다. 그 속에 장유사를 처음 창건한 사람은 장유화상이라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한 김해읍지 「비판」 조에 보면, 서기 1708년에 명월사의 승려인 증원(證元)이 찬술했다는 「김해 명월사 사적비」에도 장유화상이 등장한다. 이 비문에서는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전하여 가락국에 불교의 신봉이 융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장유화상을 기리기 위해 처음 지은 장유사는 원래 왕후사 경내에 있었다. 장유화상을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입증하는 사찰이다.
장유사를 품고 있는 불모산의 이름도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불모(佛母)라는 뜻은 불교에서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는 부처의 생모인 마아 왕비를 뜻하고 두 번째는 불상을 만드는 사람, 세 번째는 불교가 처음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다.
현재의 장유사는 김해시 불모산 용지봉 아래에 있다. 김해시 남서부에 있는 장유2동 포장된 대청 계곡 길을 약 4km 올라가면 장유사 주차장이 반긴다.
바로 커다란 일주문이 나오고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는 황금빛을 발산하는 커다란 지장보살이 있다. 지장보살은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자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주문은 절 마당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마당에는 온통 잔자갈로 깔려 있어 다른 절과는 색다른 느낌이다. 잔자갈은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거린다. 성급한 내 마음이 저절로 속도가 느려진다. 대웅전을 바라보니 화려하고 웅장하다. 합장하고 기도하는 순간 저절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대웅전 안 오른쪽에는 장유화상의 초상이 있다. 이역만리 가야 땅까지 와서 불도를 전하다니 고개가 숙어진다. 자기 몸을 불살라 남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성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웅전 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장유화상 사리탑」과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가 평온한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리탑 속에 있는 장유화상의 사리를 생각하니 불심의 정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장유사의 가장 큰 볼거리는 장유사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신선당에 온 느낌이다. 시야가 확 트여서 바다 같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세상구경이다. 배롱나무에 핀 핑크빛 꽃 속에서 가지런한 기와 담장 너머보이는 경치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한다.
장유 3동에 형성된 율하 신도시는 물론, 맑은 날에는 부산 사상을 지나 해운대까지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내가 선 이 자리가 바로 극락’이라는 문구를 이곳에 남겼나 보다.
<김해 임호산 흥부암>
김해 시가지로 들어서면 서쪽 편에 우뚝 솟은 산이 보인다. 임호산이다. 멀리서 바라보니 이 산의 형상이 호랑이 머리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김해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안함을 느껴 수로왕이 장유화상에게 시켜 그 입을 막아 주려고 흥부암을 지었다고 전한다. 흥부암은 김해를 번성하게 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흥부암은 풍수 지리적으로 창건됐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기 1989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의 주춧돌이 호랑이 모양의 석상이다. 흥부암 자체가 호랑이 입을 막으려고 창건했는데 주춧돌도 호랑이 모양으로 했다니 호랑이를 꼼짝 못 하게 짓누르고 있는 형상이다. 그런데 호랑이 목덜미 위로 바쳐진 기둥이 호랑이를 한없이 짓누르고 있어 호랑이는 영원히 힘을 못 쓸 것 같다.
흥부암은 오랫동안 폐사됐다가 서기 1700년에 중수했다. 그 후 서기 1997년에는 주지 혜운 스님에 의해 부설 불교대학도 운영하고 있다. 김해인의 중심 기도처이고 가야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흥부암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한‘흥부암 석조 보살 좌상’이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돌로 만든 보살상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이 서서 협시하고 있다.
흥부암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가슴을 확 트이게 하여 모든 번뇌가 달아난다. 흥부암에서는 김해 시가지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감해 신어산 은하사>
서기 1812년, 조선 순조 12년에 중수한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에는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빠로 기록되어 있고, 허왕후와 같이 왔다고 했다. 은하사에는 1915년, 일제강점기 때 장유사에 건립한 「장유화상 기적비」도 있다.
<김해 만어산 만어사>
『삼국유사』「가락국기」조에 보면, 수로왕이 수도를 정하면서, “이 땅은 십육 나한이 살 만한 곳” 이라고 했다거나, 수로왕은 만어산에 있는 독룡의 횡포를 막기 위해 부처님을 청해 설법을 들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가야 땅에는 남방불교가 일찍 들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6월에 중국 진(秦)나라 순도(順道)아도가 고구려에 불상과 불경을 전했다.
서기 384년, 백제 침류왕 원년 9월에는 호국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했다.
신라는 서기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었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북방불교가 전래했다고 한국역사학자들은 믿고, 그렀게 전하고 있다.
그러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남방불교는 서기 42년 수로왕부터 서기 532년 제10대 양왕까지 491년 동안 존재했고 계속 이어져 왔다. 꼭 규명되어야 할 가야 불교역사다.
<하동 지리산 칠불사>
장유화상은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와 함께 하동 칠불사에 등장한다. 일곱 왕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수도하여 칠불사 운상원에서 성불하게 된다. 당시 칠불사는 칠불암이였다. 김수로왕은 부처님의 보은으로 칠불암을 사찰을 크게 짓고 칠불사로 명명했다. 왕이 사찰을 창건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장유화상은 승려였으므로 가락국에 불교를 제일 처음 전한 승려가 된다.
<장유화상과 관련된 현재 사찰>
장유화상과 관련된 현재 사찰은 용지봉 장유사, 임호산 흥부암, 지리산 칠불사, 신어산 은하사, 분산의 해은사·성조암, 무척산의 모은암,, 동림사(동림사는 수려한 경관을 가진 신어산에 있는 사찰이다. 장유화상이 신어산에 들어와 고향인 아유타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며 수행하던 사찰로 신어산 동쪽에 있어 동림사라고 전해지며 신어산 서쪽에는 서림사(현 은하사)가 있다.) , 영구암, 불조사 등 여러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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