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통도사
통도사는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佛寶-통고사·法寶-해인사·僧寶-송광사)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통도사가 있는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창건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으며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다.
산문에는 영축총림(靈鷲叢林)이라고 적혀 있는데 총림(叢林)이라는 것은, 많은 수행승들이 머물러 있는 것을 나무가 숲을 이룬 것에 비유한 말로서, 많은 선승(禪僧)들이 모여서 좌선을 수행하는 도장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조계종 계통의 총림이 8군데 있는데,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백양사 5대 총림과 근간에 동래 범어사, 지리산 쌍계사, 대구 동화사 3곳이 추가지정되었다.
현재 통도사에 있는 65동 580여 칸에 달하는 크고 작은 건물들은 창건 이래 하나 둘씩 끊임없이 지어지고, 고쳐지고, 옮겨진 결과로서 역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상징하는 전각들이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건물의 독특한 형식과 건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절묘한 공간구성은 한국 전통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통도사 주위에는 선원인 극락암을 비롯하여 백운암, 비로암, 자장암 등 19개의 암자가 있다.
양산 통도사는 우리나라의 3보 사찰중 하나로서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사찰로 이름난 곳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으므로 불상이 필요 없는 것이다.
통도사의 창건정신은 바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으므로 통도사라는 절이름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1). 출가(出家)코자 하는 승니(僧尼)는 모두 이 계단을 통하여 득도(得到)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다
(爲僧者 通而度之)
2).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다
(通萬法 度衆生)
3). 통도사가 위치한 산 모습이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인도 영축산(靈鷲山)과 통하므로 통도사로 이름하였다
(比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
통도사는 워낙 규모가 크고 딸린 암자가 많아 찬찬히 둘러보려면 하루 해가 모자랄 정도라서 구석구석에 있는 볼거리를 놓치기 쉽다. 알면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어떤 볼거리들이 있을까?>
통도사는 규모가 커다보니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볼거리들이 여기 저기 숨어 있다.
1.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의 뜻은?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는 다리로서 3개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다리의 이름은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인데 삼성(三星) 반월(半月)은 '3개의 별과 반달'이라는 말로 이를 한자로 적어보면 마음 심(心)자이다. 즉 마음 심(心)자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마음의 다리'라는 말로서 이 다리는 난간도 없고 폭이 좁으니 헛된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의 마음(일심一心)으로 다리를 건너야 불국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리 이름의 표지석은 경봉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2. 일주문의 '영축산 통도사'는 흥선 대원군의 글씨이다
통도사의 3문(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가운데 첫째문인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으며, 현존하는 편액 '영축산 통도사(靈鷲山通度寺)'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興宣 大院君 李昰應 )의 필적으로 영축산에 어울릴 만큼 장중하고 기운차다.
통도사에는 유독 흥선대원군 즉 석파(石坡)의 글씨가 많이 있는데, 일주문의 편액인 영축산 통도사의 글씨와 원통방의 편액과 금강계단 편액, 대방광전 편액의 글씨 등이 모두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이다
일주문 기둥 좌우의 주련에는 ‘佛之宗家'' 國之大刹(불지종가 국지대찰)’라고 적혀있는데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로서 '부처님의 으뜸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절'이라는 뜻이다.
일주문에 들어가기 전 양쪽에 돌기둥이 서 있고 한쪽에는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泌須和睦)' 다른 쪽에는 '방포원정상요청규(方袍圓頂常要淸規)'라고 적혀있다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泌須和睦)'은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으니 서로 화목해야한다'라는 말이고 '방포원정상요청규(方袍圓頂常要淸規)'은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은 이들은 반드시 계율과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므로 통도사에서 생활하는 모든 스님들은 서로 화목하고 계율을 지켜 수행에 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
3. 사천왕의 발 아래에는 조선시대 유생들이 있다
부처님이나 보살, 천인이 앉거나 서있는 자리를 대좌(臺座)라고 하며 대좌는 불상을 조성하는데 있어 장엄뿐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 꼭 따라야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대좌는 불상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불·보살상을 받드는 대좌에 아귀, 축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바로 생령좌(마구니)이다.
생령좌는 생명이 있는 생물을 대좌로 삼고 있는데, 사찰 내에서 생량좌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천왕문 사천왕상의 대좌이다.
부처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누구든 사천왕 앞을 지나야 한다. 부처님을 수호하는 사천왕은 어떤 잡스러운 존재도 정토세계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한다.
사천왕은 대체로 갑옷을 입고 양 손에 지물을 든 체 사방을 지키는데, 발 아래에는 생령이 짓밟혀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나쁜 생령을 힘으로 항복시킨다는 의미로 선을 보호하고 악을 없애는 신중(神衆)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천왕문에 들어서면 사천왕의 발 아래에 있는 생령의 모양에는 관심이 적고 천왕의 얼굴만 쳐다보며 지나가기 쉽다.
통도사 천왕문을 지날 때에는 사천왕이 밟고 있는 생령(마구니)를 유심히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있는 것이 보통이나 통도사의 마구니는 악귀가 아니라 조선시대 갓을 쓴 양반과 유생의 모습들이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사찰이 처했던 고통과 비애를 알게 해 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이 빚은 불교의 폐해는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불교의 박해는 그 극에 달하는데, 사찰의 토지는 대부분 서원에 빼앗기고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36종이나 되는 물품울 만들어 바치게 하는 부역이 부여되었다.
그래서 승려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도 바쁜 나날이었으니 승려를 머슴처럼 여기던 조선 양반들의 만행을 생령이라는 모습으로 풍자한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으면 저렇게 사천왕에게 밟히는 생령으로 표현하였을까?
생령좌의 모습은 대개 악귀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때로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 시대의 한 단면을 반영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4. 노약자 전용문이 있다
천왕문 오른쪽의 노약자 전용문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면 천왕문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출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찰측에서는 이들을 배려하여 노약자 전용문을 천왕문 오른쪽에 만들어 두었다.
문턱이 없는 작은 쪽문으로서 항상 열려 있고 노약자들은 이곳으로 이용하라고 안내판을 붙어 놓았다.
천왕문 계단은 몇개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은 노약자전용라기보다는 장애자 전용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장애자라는 말을 피하여 노약자라고 쓴 것으로 보인다. 작은 것이지만 세심하게 배려한 사찰측의 마음이 보인다.
노약자 전용문을 들어서면 바로 반야용선도가 그려져 있는 극락전의 뒷면이 바로 보인다
5. 극락정토로 가는 배가 있다
극락전 뒷 벽면의 '반야용선접인도가 있다.
단청이 거의 사라진 극락전 벽면에는 '반야용선접인도(般若龍船接引圖)'의 그림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반야용선은 절에서 천도제를 하거나 큰 제를 지낼 때 등장을 하며, 또한 무속인들이 굿을 할때 등장 하는데, 앞머리는 용 모양으로 되어 있고 꼬리도 용꼬리라 편의상 그냥 용선(龍船)이라고 한다.
이 용선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 또는 진리나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타고 가는 배이다.
반야(般若)란 불교용어로 "진리를 깨달은 지혜" 라고도 하며 용선(龍船)이란 "용모양의 배"를 말한다. 따라서 지혜를 얻은 자들은 용모양의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배를 타고 해탈의 바다를 건너 사방정토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즉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뜻하기도 한다.
이 배는 중생들에게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지혜를 주어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함으로 누구든지 반야용선에 승선하면 지혜를 깨달아 고통 없는 부처님 나라로 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뒤돌아보고 있는 사람이 그림에 있다. 이 반야용선접인도(般若龍船接引圖)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보인다
용처럼 생긴 배의 앞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이 합장을 하고 있고 뒤에는 중생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지장보살이 고리가 6개 달린 육환장을 들고 서 있다
배에 탄 모든 중생들이 모두가 합장을 하며 다가올 극락세계를 향하여 앞을 보고 있는데 오로지 한 사람이 계속 뒤를 돌아다 보고 있다.
무엇이 아쉬워 차안(此岸)을 돌아본단 말인가? 속세에 남겨둔 재물이 아까워서인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서인가?
이 한 사람의 모습은 그림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고 재미있게 한다
우리 선조들의 예술세계에는 이렇게 여유와 해학이 생활화되어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표출되어 있는 것이 많다
사찰 중에는 반야용선을 만들어 천정에 매달아두기도 두기도 하는데 이때, 반야용선에서 늘어진 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보는 경우가 있다. 줄에서 떨어지면 서방정도(극락)으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다고 해서 악착보살이라 부른다
6. 절을 지켜주는 우리나라 토종 신(神)이 있다
천왕문의 좌측에는 종루와 마주보고 일반 사찰에는 잘 볼 수 없는 가람각이 있다.
가람각은 통도사의 가람신을 모시고 가람(절)의 수호를 빌기 위한 곳이다. 따라서 이 가람각에는 부처와 상관없이 가람을 지켜주는 이곳의 터주 신(地神)이 모셔져 있는데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만 수용된 것이다,
이 가람각은 산신각과 함께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앙과 융화를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통도사 주지로 부임을 하면 먼저 이 터신에게 제를 지내고 가람의 안녕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가람각의 내부 위쪽 모서리에 갈색의 도자기가 얹혀져 있다. 소금이 들어있는 항아리(염불화방지병)로서 화재를 막기위한 벽사의 의미로 올려놓은 것이며 전각의 바깥쪽에도 있다.
벽면 가운데 가득하게 신중탱화가 있고 예전에는 탱화 앞에 나무로 만든 신상(神像)이 놓여있었는데 지금은 목신상(木神像) 대신 불명패가 자리하고 있다
가람각은 사찰의 담장 안에 있으나 천왕문의 뒷쪽으로 물러나있어 가람 바깥에 배치되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일반 절에서는 아예 사찰 밖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7. 만세루는 누각(樓閣)이 아닌데도 '루(樓)'자가 붙어있다
범종루는 2층이나 오른쪽 만세루는 단층이다
만세루는 본래 법회(法會)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樓閣)이다. 이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644년(인조 22)에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범종루는 2층 누각이므로 '루'자를 붙이는데 만세루는 누각이 아닌 단층건물이면서도 '루'라고 한다
아마 초창기 이 건물이 만들어졌을 때는 누각의 형태였으나 중건을 거치면서 단층형태로 변하였는지, 아니면 이 건물이 원래 벽이 없고 기둥만 있었던 것으로 보여져 단층으로 지으면서 루(樓)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건물의 외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이 높고 그 간격이 넓어 훨씬 크게 보인다. 본래 누각은 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올라간 2층의 다락집으로, 기둥만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이 건물은 돌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단층건물이다.
이렇게 낮게 만든 이유는 건물을 편리하게 이용하고자 한 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 산지에 위치한 절의 누각은 산지 경사로 인해 입구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본전의 마당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고, 마당에서 바로 법회장인 2층으로 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 불편함이 없으나 통도사는 평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이곳이 2층 누각이라면 많은 승려나 신도가 의식을 거행할 때 오르내리기에 크게 불편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단층으로 지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예는 청도 운문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평지사찰인 운문사의 '만세루'도 단층이면서도 누각의 형태로 벽면이 없고 기둥만 있다.
통도사 만세루는 출입문 위에 보면 잘 생긴 용두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러나 건물 안에 들어가서 꼬리부분을 보면 물고기 꼬리이다. 물고기가 법당 밖으로 나오면 용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는 중생들이 만세루 안에서 설법을 듣고 밖으로 나올 때에는 깨달음을 얻어 용처럼 되라는 의미로 새긴 것이라 한다.
만세루 어간 출입문 오른쪽 용이 물고 있는 것은?
출입구 왼쪽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이렇게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은 불국사 등 많은 사찰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오른쪽의 용이 물고 있는 것이 예사스럽지 않다.
여의주가 아닌 것은 확실한데 도끼날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옛날 벳틀의 북실 같기도 한데 처음 보는 모양이다.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일까?
사찰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만세루를 짓고 나서 웅장한 건물에 맞추어 현판을 달아야 할 때, 기골이 장대한 6세의 어린 동자가 나타나 거대한 붓으로 만세루란 세 글자를 쓰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이는 문수보살이 어린 동자로 변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만세루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세워지기 전에는 유물 전시관으로 사용이 되었으나 현재 불교용품과 기념품을 파는 매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8. 호랑이 피가 묻은 호혈석(虎血石)이 있다
통도사에는 백운암에 얽힌 호랑이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2개의 돌이 있다
이 돌을 호혈석(虎血石)이라고 부른다. 하나는 하노전의 극락전과 급수대 사이의 땅바닥에 있고 또 하나는 상노전의 응진전 옆에 있다.
호혈석은 호랑이 기를 누르기 위해 호랑이 붉은 피를 발랐다는 넓은 반석으로 피가 묻은 것처럼 붉은 색이 얼룩져 있는 돌이다.
극락전 옆의 호혈석 위에는 움푹 파인 부분이 있는데 이를 호랑이의 발자국이라고 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모래와 흙먼지로 덮혀있어 식별이 싶지 않지만 물을 부으면 자국이 뚜럿이 나타난다
<호혈석(虎血石)에 얽힌 전설이 있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백운암에는 젊고 잘 생긴 홍안의 스님이 홀로 기거하며 경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장차 훌륭한 강백(講伯:경전을 가르치는 스님)이 되기 위해 경 읽기에 매진하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기원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아느 봄날 저녁 무렵, 스님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예불을 마치고 경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젊은 여인의 곱디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한 스님이 문을 열자 아릿다운 처녀가 바구니를 허리춤에 붙인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친구들과 나물을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 멀리 불빛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왔다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스님은 난처하긴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단칸방의 아랫목을 처녀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습니다. 스님의 경 읽는 음성은 낭랑하였으며 고요한 산중에 울려 퍼지는 그 음성은 마치 신비경으로 인도하는 듯 처녀를 사로잡았고 그날 밤부터 처녀는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날이 밝자 처녀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고 스님을 사모하는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마침내 처녀는 병이나고 말았다.
마을에서 지체 있는 가문의 무남독녀인 처녀는 좋다는 약은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했고 처녀의 어머니는 딸이 마음의 병이 있음을 알고는 근심을 말해보라고 일렀다.
그때서야 처녀는 지난날 만났던 젊은 학승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고백했고,
사연을 들은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스님을 찾아가 딸과 혼인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젊은 스님의 굳은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얼마 후 처녀는 병이 악화돼 끝내 한 맺힌 가슴을 안고 눈을 감게 되었으며 죽은 처녀는 그날로 영축산의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고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해 드디어 강백이 되어 처음 강론을 열게 되었는데 저녁 무렵, 감로당 산중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더니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큰 몸집을 가진 호랑이가 감로당 지붕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문을 할퀴고 사납게 울부짖자 대중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필경 대중 속에 누군가가 저 호랑이와 사연이 있는 걸세.”
“그렇다면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보세. 그럼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이 아닌가.”
연회에 참석한 스님들은 저마다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으나 호랑이는 그냥 옆으로 밀쳐내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마지막으로 새로 취임하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면서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강백 스님은 아무래도 소승의 속세 인연인가 보다하며 합장 예경하고 바깥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고 호랑이는 스님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재빠르게 낚아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산중 모든 대중은 강백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매다가 스님이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산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는 스님을 찾았으나 이미 이 세상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상징이 보이지 않았다
미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호랑이로 태어난 처녀는 살아생전 흠모하던 스님과 그렇게라도 연을 맺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에도 호랑이의 횡포는 사그라질 줄 몰랐는데 그러던 어느 날, 통도사를 찾은 한 고승이 말하기를 '이곳은 호랑이의 기운이 넘쳐나는 곳이니 호랑이의 혈을 눌러야한다'며 붉은 피를 바른 큼직한 붉은 반석 2개를 도량에 놓게 하였다.
그러자 그 뒤부터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며 이 때 가져다 놓은 반석이 ‘호혈석(虎血石)’이라고 한다, 호혈석을 ‘호석(虎石)’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도 산신각에서 20m 남쪽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그 일부가 남아있다
9. 극락전과 약사전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다
하노전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마주보고 있다
사찰에서 전각의 배치는 지형이나 특수성 등에 의해서 세워지기 때문에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전은 동쪽,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은 서쪽에 배치한다
약사전의 위치를 동쪽에 두는 이유는 이 여래의 주로 거처하는 곳이 동방이라는 것에서 연유한다. 약사여래가 상주하는 곳이 동방만월세계이기 때문에 동쪽에 약사전을 배치하는 것이다
또한 극락전은 서방정토셰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서쪽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 통도사에는 동쪽에 극락전이 있고 서쪽에 약사전이 있어 완전히 반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10. 특이한 모양의 배례석이 있다
영산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1기가 서 있고 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다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일반 사찰에서 배례석은 장방형의 육면체로 윗면에는 큼직한 연꽃문양이 1∼3개가 새겨져 있으며 지면에서 20∼30cm 높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나 통도사의 배레석은 이와는 매우 다르다
길이 175㎝, 너비 87㎝의 낮은 판석으로 3절 되었으며, 윗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면에서의 높이도 지극히 낮아 마치 돗자리를 깔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게한다.
둘레에는 연화무늬의 돌기둥이 4개가 놓여 있는데 연결하는 둘레석이 없어 무언가 엉성한 느낌이 든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지 아니면 소실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주변의 모래가 덮히기 쉬워 관리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왼쪽 윗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의 명문은 ‘太康王一年乙丑二月日造’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太康十一年乙丑二月日造’의 위각(僞刻)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 너비 87㎝)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의 복원 시 하층 받침대 아래의 다진 흙 속에서 금동의 소형 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되어 현재 통도사의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탑기단 안에서 발견된 불상과 유물은 탑을 건립하기 전에 땅의 악한 기운을 누르며 땅을 다질 때 묻는 진단구(鎭壇具)이거나 혹은 탑의 건립과정에서 행하였던 여러 단계의 의식(儀式)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1. 통도사에도 다보탑이 있다
다보여래는 동방의 보정세계(寶淨世界)에 있다는 부처로서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땅속에서 다보탑과 함께 솟아나 소리를 질러 석가모니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명하였다고 하는 부처이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뜻하는 석가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이곳 통도사에도 다보탑이 있다. 불국사처럼 돌로 만들어진 탑은 아니지만 영산전 내에 벽화로 그려져 있다
가로 2.2m, 세로 5.4m에 달하는 대형그림으로 각종 구슬과 풍령으로 장식한 구층탑의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나란히 앉아 있는 이병불의 형태이며 탑의 좌우에는 보살과 제자가 4명씩 그려져 있다
영산전내의 석가모니와 후불탱화(영산회상도)가 다보탑 벽화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내부 벽에는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여러 내용을 담은 품격 높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는 1775년(영조 51)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불화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팔상도 아래에는 야단법석을 할 때 쓰이는 괘불을 보관하는 상자가 길게 놓여져 있다
영산전 내부에는 다보탑 벽화와 1775년에 그려진 국보급 팔상도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도' 등의 벽화가 있다
영산전 내부의 벽화들은 모두 52점으로 2011년 4월 29일 우리나라 보물 17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세기 조선 정조대왕에 그려진 우수한 불화들이다. 외벽의 벽화들은 17점이 그려져 있으나 훼손이 심해 윤곽을 알아보기 힘들다.
12. 불이문(不二門) 들보는 코끼리와 호랑이가 받치고 있다
통도사의 세번째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불리는 불이문(不二門)은 하노전에서 중노전으로 들어가는 경계에 있는 문이다. 모든 것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음을 불이(不二)라고 하며 둘이 아닌 경지로, 생사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아니하고 만남과 이별 등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으로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음을 상징하고 있는 문이다.
통도사 전체 건물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처음 지은 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짜임새가 있고 견실한 건물이며 중앙 기둥의 간격이 넓어 훨씬 웅장한 느낌을 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이문에 걸려있는 ‘원종 제1대가람’이라고 쓴 편액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원종 1대가람(源宗一代伽籃)'이란 말이 무엇을 뜻한 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석가모니의 불사리를 안치했기 때문에 원종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들이 있는 것 같다
이 편액은 1920년대까지는 일주문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응진전 뒤 스님들의 선원인 보광전에도 '원종1대가람(源宗第一代伽籃)'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불이문이란 편액은 송나라 미불(米? 호는 元章)의 필적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중앙에 대들보를 쓰지 않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로 받쳐서 지붕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구성 방식이 독특하다.
코끼리는 보현보살을, 호랑이는 문수보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문수보살은 사자등을 타고 나타나지만 옛 우리 선조들의 정서로 보아 사자보다 가까운 호랑이로 바꾸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통도사의 호랑이 전설을 관련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주 불국사의 대웅전 내부 천장에도 이와 비슷한 형상이 있다
기둥 사이 보에 걸쳐 하얀 코끼리와 용, 점박이 사자와 용이 좌우 칸에 둘씩 보에 발을 걸치고 있다.
그런데 사자라고 하는 동물의 형상이 사자라기 보다는 점박이 호랑이에 가까워 표범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불이문 건물의 특징은 대들보 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재를 삼각형으로 짠 뒤, 그 부재 위에 장혀를 걸쳐 중도리ㆍ하중도리ㆍ종도리를 얹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보기드문 건축 양식이라고 한다기둥도 통도사 건물 중에는 가장 뚜렷하게 배흘림 양식으로 처리하고 있어 건축 연대가 오래 되었음을 알게한다.
불이문의 측면 기단은 수평이 아니라 기울어져 있다.
불이문은 통도사 중심 통로중에서 가장 경사가 심한 곳으로 앞 뒤 지면의 높이 차이가 1.5m나 된다. 그래서 기단의 높이를 조정하여 경사의 차이가 적어보이도록 한 것이다.
앞쪽 기단을 뒷쪽보다 20cm정도 낮게 쌓아놓고 주춧돌과 기둥의 높이를 조절하여 지붕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불이문 뿐만 아니라 대웅전, 대명광전, 원통방 등 여러 건물에서 이와같은 현상이 보인다
13. 나도 극락에 갈 수 있는지 알아보자
불이문에는 아는 사람들은 한번씩 해보는 것이 있다. 대웅전 큰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고 절 밖으로 나가면서 불이문 문고리에 머리를 넣어본다고. . .
머리가 들어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한번씩 넣어보고 간다는데 과연 저 고리속으로 머리가 들어갈까?
어린 아이 머리라면 들어갈 수 있겠는데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까? 성경에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했는데...
웃자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절문을 나서는 보살님들의 재미있는 모습이다
열려있는 불이문의 안쪽에 있다
14. 용화전의 미륵불은 왜 흰색일까?
용화전은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1369년(공민왕 18)에 창건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725년(영조 1년) 청성대사(淸性大師)가 고쳐 지은 후 1899년(고종 3년)에 수리한 것이라고 한다.
보통의 경우 미륵불은 바깥에 모셔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용화전 안에 모시고 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으신 부처님이다.
하늘 위 도솔천에서 설법을 하고 있으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지 56억7천만년 뒤, 이 땅에 출현하여 석가모니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부처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이 희망의 부처로 삼국시대부터 폭넓게 신앙화되었다
일반 불전의 부처님들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몸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의 미륵불은 흰색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륵부처님은 후세불로서 아직 이 땅에 한번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없는 하얀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미술계에서 흰색, 검정, 회색은 색이 없는 무채색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인다 .
15. 통도사에는 손오공의 서유기가 있다
용화전 내부의 측벽에는 7세기 당나라 승려였던 현장법사의 서유기 내용이 벽화로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성보문화재연구원이 2008년 통도사 내 12개 전각의 벽화 612점을 정밀조사하여 밝혀낸 것으로, 그동안 단순한 인연설화로 알려진 이 벽화들이 현장스님과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다는 중국의 <서유기>를 표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형상화된 도상은 모두 7점으로 '서유기' 총 100회분 가운데 5회( 12회,81회,84회,87회,94회)의 내용을 7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이다.
서쪽 벽에는 '난멸가지원대각(難滅加持圓大覺)’'도고혼소우정공문(度孤魂簫禹正空門)’'흑송림사중심사(黑松林四衆尋師)’라는 화제가 쓰인 그림이 있고 동쪽 벽 측면에는 ‘일괴공회정욕희(一怪空懷情慾喜)' '현장병성건대회(玄裝秉誠建大會)' '봉선군모천지우(鳳仙郡冒天止雨)'가 쓰인 그림이 있다.
특히 12회의 내용이 동.서측면 벽 중앙에 세 장면으로 나눠 그려져 부각돼 있는데, 12회는 현장스님이 당 태종의 명으로 수륙재를 여는 장면과 수륙재를 주관할 고승을 선발하는 위징, 소우, 장도원 등을 묘사한 그림이다.
벽화가 그려진 연대는 18세기 후반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 소장돼 있는 '서유기'의 판본 가운데는 18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드문데, 이런 내용을 사찰벽화로 나타낸 것은 용화전이 최초라고 한다.
그리고 서유기가 벽화로 그려진 것은 현존하는 벽화중에서 유일한 것이다
'서유기' 12회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린 것으로 당 태종이 저승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를 주관할 고승으로 현장을 뽑아 수륙재를 성대하게 치르는 장면이다.
벽화는 제단 앞에 나아가 용을 밟고 향을 꽂는 당 태종과 더불어 줄지어 선 승려들의 가장행렬 앞쪽에 머리에 관을 쓴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서유기' 94회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린 것으로 천축국 부마로 선택된 현장(玄?)이, 손오공의 권유로 요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왕궁으로 들어간 뒤의 이야기이다.
벽화는 공주로 변신한 요괴가 손오공 등이 방해할까 두려워 왕에게 손오공 일행을 성 밖으로 내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왼쪽 그림은 서유기 12회 내용을 소재로 했으며 재상 소우(蕭禹)가 불교의 바른 이치를 말하여 수륙재를 열 수 있었음을 그린 것으로 벽화는 당 태종의 명으로 수륙재를 주관할 고승을 선발하는 위징과 소우, 장도원 등을 묘사한 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서유기 12회 내용을 소재로 했으며 재상 소우(蕭禹)가 불교의 바른 이치를 말하여 수륙재를 열 수 있었음을 그린 것으로 벽화는 당 태종의 명으로 수륙재를 주관할 고승을 선발하는 위징과 소우, 장도원 등을 묘사한 것이다.
흑송림삼중심사도(黑松林三衆尋師圖). 서유기 81회 내용 중 선림사에서 쉬다가 요괴에 잡혀간 현장을 찾던 손오공이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로 변해 광분하는 모습을 그렸다.
16. 봉발탑의 둘레석이 주변 건물 축선과 맞지 않는다
발우(절간에서 스님들이 공양할 때 사용하는 밥그릇)를 의미하는 봉발탑이다. 사각형의 간주석 위에 발우가 올려져 있다.
봉발탑의 주변에는 윗면이 삼각형모양인 긴 장대석으로 경계를 이루었는데 경계석이 옆의 관음전이나 용화전의 건축선과 일치되지 않는다. 아마 무슨 의미가 있을텐데 알 수가 없다
17.통도사 세존비(世尊碑)의 도깨비 문양
이 비각은 1706년(숙종 32) 계파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를 세우면서 건립한 것으로 비석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시고 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불사리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봉안하여 보관하였으며 그 후 한 개의 함은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토록 하였고, 또 다른 한 개의 함은 태백산 갈반사에 봉안되었음을 석비의 전면에 기록하여 놓았다.
비문은 수사간 채광윤(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 도승지 이진휴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가 짓고 보윤대사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의 행적과 함께 각자의 시주 내용을 적고 있다. 석비의 건립은 숙종 32년(1706)이다.
이 비석의 기단부가 특이한데 안상문이 많이 그려지는 기단석과 달리, 앞면을 3등분하여 세로선으로 구분하고 양쪽에는 꽃문양을 새겼으며 가운데에는 도깨비의 얼굴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석받침의 조각으로는 드문 예가 아닐까 한다
도깨비의 얼굴모습을 보면 험상궂으면서도 결코 무섭지 않고 웃음을 띠고 있어 친근하면서도 포근하게 다가오는 우리의 도깨비이다. 이런 모습을 비석의 받침대에 새겨놓을 수 있는 우리 선조들의 해학을 또 한번 발견할 수가 있다
도깨비 문양의 근원설은 여러 가지로, 중국 청동기의 도철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영웅의 얼굴이라는 설, 사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용의 얼굴이라고 강우방교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어느 주장이 맞는 지 확실하지 않지만 맹수의 얼굴에 순한 동물을 뿔을 가진 동물과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 한 것 같다.
기단의 뒷쪽과 옆쪽은 흙으로 덮혀 있어 형태를 알 수가 없다
18. 금강계단의 진신사리탑을 열어본 적이 있을까?
사찰에서 계단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당시 누지보살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가 허락하여 기원정사의 동남쪽에 단(壇)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금강계단은 사찰 경내에 현존하는 석조물로는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다. 통도사 창건의 이유가 바로 이 계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불사리 계단이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많은 기록이 전해 오고 있는데,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 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1235년(고종 22)에는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에 의하여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왕이 하사한 기旗)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僧)이 그 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마침 수정함(水晶函)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三國遺事 卷3 前後所將舍利條)에 기록된 내용으로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다가 1379년(우왕 5년) 고려 말에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빈번히 왜구들이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惟政)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休靜)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戒)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으니 갈반지는 곧 지금의 정암사(淨巖寺)이다. 그 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정인(淨人)이, 1705년에는 성능(性能)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에도 영조·순조·헌종·고종 대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중수와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 총높이 약 300㎝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方壇) 위에 석종(石鐘)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면 돌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금강계단 주변에는 층계의 소맷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역사상이 있다.
금강계단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마음대로 출입이 가능하였으나 이제는 신발도 벗고 들어가야 하고 사진촬영도 금지되었다. 또한 개방시간도 오전 9:30 부터 오후 2:30 까지로 제한되어 있어서 참배를 원할 때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19. 통도사 창건 설화를 담고있는 구룡지(九龍池)
대웅전의 서쪽 삼성각 사이에는 구룡지(九龍池)라고 하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신라시대 자장스님이 이 통도사를 짓게 된 계기가 이 연못(구룡지)과 연관되어져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史蹟略錄)'에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문수보살은 승려로 현신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 과, 불두골과 손가락 뼈,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들은 나의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영취산의 옛 이름) 기슭에 독룡이 거쳐하는 신지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보안하면 삼재(세 가지 재앙 - 물, 불, 바람)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래도록 머물러 천룡이 되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7년 만에 귀국한 자장은 절을 세울만한 명당을 직접 찾아 다녔으나 여의치 않아,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날려 보내니 얼마 후에 나무오리가 입에 칡꽃 한 송이를 물고 돌아왔다.
이때가 엄동설한이었는데 칡꽃이 필 정도라면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무오리가 날아갔던 방향으로 찾아가서 영취산 자락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큰 연못이 하나 있고 주위에 있는 칡덩굴에는 꽃이 2송이 피어있었고 한 곳에는 나무오리가 꽃을 따 간 자리가 분명히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영취산은 진산(鎭山)으로 서북쪽은 막히고 동남으로 터졌는데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좋은 절터로 보였다.
그런데 못 속에는 용이 아홉 마리나 살고 있어 용을 그대로 두고 절을 지을 수는 없었다.
자장율사는 용들이 순순히 물러가도록 정성을 다해 경을 외고 빌었으나 용들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장율사는 흰 종이에다가 불 화(火)자를 써서 진언을 외며 못 속에 던지고 지팡이로 못을 휘저었더니 잔잔하던 연못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못속에 있던 8마리의 용들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중 3마리는 바위에 떨어져 죽고 5마리는 영취산 골짜기로 달아났다.
당시 떨어진 바위에는 용의 피가 낭자하게 묻게 되어서 후세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혈암(龍血岩-지금도 통도사 들어가는 입구 무풍교다리 근처에 있다고 함)이라 하고, 5마리 용이 달아난 골짜기를 오룡곡(五龍谷)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9마리 용 중에서 한마리는 달아나지 않고 자장율사에게로 와서는 살려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자세히 보니 그 용은 눈이 멀었다. 자장율사는 이를 불쌍히 여겨,
'눈까지 먼 너를 쫓아낼 수가 없구나. 너는 이 못에 살면서 절을 수호하도록 하라.’고 하니 눈먼 용은 감사하다는 표시로 머리를 두어 번 끄덕인 후 다시 연못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부터 이 연못을 아홉마리의 용이 있었다고 하여 구룡지(九龍池)라고 부르고 연못에 가로놓인 다리는 용의 항복을 받았다 하여 항룡교(降龍橋)라 부른다고 한다
이 못은 아주 작은 못이기는 하나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데, 이는 눈먼 용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구룡지는 전설과 상관없이 조경 목적 이외에 방화수(防火水)의 용도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런 연못은 영산전 앞에도 있는데, 대부분 목재건물인 사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불이기 때문에 유사 시 소화용(消火用)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통도사 건물 여러 곳에서 큰 물항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에 물을 담아 두는 목적 역시 화재발생시를 대비하여 소화용(消火用)으로 준비해두는 것이며, 조선 왕궁에 있는 '드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두는 쇠 그릇으로 물을 채워두면 불귀신(火神)이 불을 내려고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기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스스로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으며 화재발생시 소화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20. '대방광전'이라는 현판이 2곳에 있다.
대웅전은 하나의 건물이 4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동쪽면에는 '대웅전' 남쪽면에는 '금강계단' 북쪽면에는 '적멸보궁'이라고 적혀 있고 서쪽에는 흥선 대원군이 쓴 '대방광전(大方光殿)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대방광전(大方廣殿)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다른 이름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말한다.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빛이 온 만물을 비추듯이 우주의 일체를 비추는 부처님이다. 비로자나불은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설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통도사에는 '대방광전'이라는 편액이 2개이며 각각 대웅전과 설법전에 따로 걸려있다.
금강계단의 맞은 편 건물이 설법전(說法殿)이다. 설법전은 정면 9칸, 측면 1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화엄산림법회 같은 큰 법회를 열 때 강당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이 건물의 동쪽 정면 어간문 위에는 '설법전(設法殿)'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으나 북쪽 금강계단쪽에는 '국지대원(國之大院)', 불지종전(佛之宗殿)', '대방광전(大方廣殿)' 이라는 3개의 편액이 달려있다
대웅전의 서쪽에 걸려있는 것과 똑같은 '대방광전'의 편액이 설법전에도 걸려 있다. 두 곳에 똑같은 편액이 걸려있는 것이다.
설법전의 '대방광전'이라는 편액의 글씨 역시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대원군의 낙관이 선명한데 글씨 형태가 똑같아 한 개의 글씨로 두 개의 편액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왜 똑같은 편액을 2개를 만들어 서로 다른 건물에 붙였는지 그 이유를 알수가 없다.
대웅전 사방에 걸려 있는 편액의 위치가 옛날과 현재가 서로 다르다.
아래 도표를 보면 금강계단이라는 편액만 같은 장소에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을 통하여 대웅전의 편액이 원래 동쪽면에 걸려있었는데 서쪽면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동쪽면으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21. 노주석의 용도는?
약사전과 개산조당이라는 솟을삼문 앞에는 사각 또는 팔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받침이 있는 화반(花盤)을 올려 놓은 형태의 돌이 있다. 이를 노주석(爐柱石)이라고 하는데 “노반지주(露盤之柱)”, “광명대(光明臺)”, “화사석(火舍石)”, “정료대(庭燎臺)” 등 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 말로는 '불우리'라고 부르는데 사찰의 야간법회시 관솔(소나무 송진이 베인 가지)에 불을 붙여 올려놓아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주로 쓰였으며. 추운 겨울에는 피운 숯불을 올려 주변을 따뜻하게 하기도 하는 용도로 쓰였다.
조성 시기가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는 노주석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조선시대 중후기 시대가 대부분이다.
※ 통도사 사천왕상 명호변경에 대하여 변경하게 된 이유
1), 신라,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은 방위는 바뀌지 않고 지물만 변경 된 것임.
2), 석굴암 및 고려불화 등, 고려시대까지 나타나는 사천왕은 지물이 일정하지 않지만
동북쪽 북방 다문천왕은 항상 보탑을 들고 있어 다문천왕을 기준으로 방위를 결정하였습니다.
3), 조선시대가 되면서 비파, 용, 보주, 보당을 든 사천왕상이 등장하나 방위가 바뀐 것이 아니라 지물만 변경되어 원래 위치에 배치된 것입니다.
4), 현재의 사천왕도상은 조선초기 불교도상집 (중국의 판본) 의 전래와 천왕문이 본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방위와 명호는 바꾸지 않고 각 사천왕상의 지물만 바뀐 것입니다.
* 조선시대 불화와 최근 발견 된 사천왕상에 써 넣은 명호와 일치
1), 1673년 장곡사 괘불탱화, 1687년 마곡사 괘불탱화, 1776년 천은사 아미타후불탱화 등에는 사천왕상 옆에 명호가 쓰여져 있는데 비파를 든 상이 북방 다문천왕으로, 탑과 보당을 들고 있는 상이 서방 광목천왕으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2), 최근 보물로 지정된 승주 송광사 사천왕상의 경우 비파를 들고 있는 사천왕상 하단에 제작당시 묵서로 북방천왕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3), 통도사 사천왕상도 이번 소제작업을 통해 보검을 든 사천왕상(진입방향 우측 첫번째상) 내부에 동방 지국천왕이라는 묵서가 발견되었습니다.
4), 이와같은 내용과 별도로 현재 학계에서는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명호에 대한 변경을 추진하고 있으며 그간 잘못된 사천왕상의 명호를 바로잡고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명호를 변경하였습니다.
22. 대웅전 지붕에 찰주가 있다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은 옆면이 앞면보다 긴 장방형의 건물이며 지붕도 T자형의 합각(合閣)지붕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대웅전의 가로 지붕과 세로지붕이 만나는 지붕의 정점에 쇠로 된 둥근 받침 위에 쇠기둥이 솟아 있다.
석탑의 찰주와 보주를 형상화 한 것으로 마치 탑의 상륜부처럼 보인다.
피뢰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우주의 신성한 기운을 한 곳으로 모아달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쇠기둥이라고 한다.
23. 전각의 처마 밑에는 소금단지가 있다
대웅전, 명부전 등 중요한 전각의 지붕 밑 평방에는 '염불화방지병'이라고 불리는 소금단지가 고이 모셔져 있다
소금은 정화를 의미하며 액을 막고 화재를 막기 위한 벽사물로서 바닷물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문밖에 큰 바다가 있으면 화재를 막아 상스러움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어 바다를 상징하는 소금을 항아리에 담아 건물의 각 모서리에 올려놓고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이 불에 타지 않도록 기원하였다.
통도사에서는 매년 5월 단오날에 구룡지 옆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의 중요 의식은 대웅전 등 주요 전각의 모서리 평방 위에 모셔져 있는 소금단지를 내리고 새 소금을 담은 단지를 올려 매년 한번씩 새로운 소금으로 교체해 주는 행사이다.
단옷날에 이 의식을 치르는 까닭은 일년중 염도가 가장 강한 날이 단오 무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광명전의 천장 밑 도리에는 다음과 같은 부적시(符籍詩)가 묵서로 적혀 있다
오가유일개 吾家有一客 (우리 집에 손님이 한 분 있는데)
정시해중인 定是海中人 (틀림없는 바다의 사람이라)
구탄천창수 口呑天漲水 (입으로 하늘에 넘치는 물을 뿜어)
능살화정신 能殺火精神 (능히 불의 귀신을 죽일 수 있으리)
※천창수-'하늘에 넘치는 물'을 말하는데, 이는 곧 비를 의미하며 용왕이 비를 내려 화재를 막아낸다는 뜻이다
합천 해인사에서도 매년 단옷날이면 해인사 스님들은 매화산 남산제일봉에 올라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곳에 소금 단지를 묻는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이는 사찰 화재를 막고자 소금 단지를 묻는 것으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풍습이다. 즉 삼재팔난을 퇴치하고 바닷물로 해인사 화마를 쫓는다는 풍수지리학적 속설에 따라 행하는 의식이다,
24. 가장 큰 돌밥그릇(발우)이 있다
보물 4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발탑(通度寺 奉鉢塔)은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전 앞에 있는 석탑이다
고려시대에 재작된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처님의 발우모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조물이다
3m 정도의 높이의 밥그릇에 뚜껑이 덮여있는 이 돌그릇을 석조봉발(石造奉鉢)이라 부르며 이런 형태의 문화재로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불교문화재이다
발우(鉢盂)란 스님이 밥을 얻으러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그릇, 또는 사찰에서 스님, 비구가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그릇을 말하며 봉발이란 발우를 모셨다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 하고서 평생 동안 가지고 다닌것이 헌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뿐이었고 평생을 무소유로 살아 입적하실때 수제자에게 물려줄 것 또한 밥그릇 밖에 없었다.
부처님은 입적을 하기 전 제자인 가섭존자에게 '발우를 보관하고 있다가 미륵불이 출현하면 물려주라'는 유언을 하며 발우를 맡기셨다고 한다.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앞에 이 봉발탑을 세운 의미도 석존 입멸후 미륵부처님에게 전법을 한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하대 위에 간주와 상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육중한 뚜껑을 지닌 발우를 안치하였다.
※ 미륵불(彌勒佛)은 다음 세상에 나타날 부처님으로서 용화수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제도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제도할 부처로 수기를 받았다고 하는 미래불이다.
25. 하나의 건물에 각기 다른 4개의 이름이 붙어 있다
대웅전의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5칸으로 옆면이 앞면보다 긴 장방형의 건물이며 지붕도 T자형태로 된 특이한 모양을 지닌 건물이다. 법당 안에 들어가 보면 직사각형인데 지붕의 모양은 T 이다
이러한 건물구조는 법당 안에 불상이 없는 대신 뒤쪽에 있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예배하고 또 입구로부터 천왕문·불이문·탑을 잇는 직선상에 두기 위해 측면에도 합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대웅전 건물에는 동서남북의 각 방위마다 각기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 있다.
앞면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들어가면서 바로 보이는 면이 동쪽면인데 여기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석가모니를 모시는 불당이라는 뜻이다.
구룡지쪽에서 보이는 서쪽면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있는 대사리단에서 보면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이라는 뜻이다
남쪽면에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은 사리탑에 부속된 예배처로 불자들이 유리를 통해 사리탑을 보며 불공을 드릴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강계단>
계단(戒壇)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가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기원정사 동남쪽에 단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 근본 도량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은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대웅전 안의 불단은 불상이 없는 대신 화려한 문양을 조각했으며 금강계단을 향하여 길게 설치되어 있다.
26. 대웅전의 지붕에는 연꽃이 줄지어 있다
대웅전의 지붕 숫막새의 등에는 하얀 연꽃봉오리가 늘어서 있다. 백자로 만든 이것은 와정(지붕못)을 덮은 백자연봉이다
와정(瓦釘-기와못)이란 수막새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막새기와 등에 뚫어 놓은 구멍에 박는 가늘고 긴 쇠못을 말하는데 방초정(防草釘)이라고도 한다
와정이 박히는 곳은 처마의 끝부분이다. 즉 처마의 끝부분에 있는 개판에 쇠로 된 못을 박아 막새기와를 고정시키는데 못을 박지 않으면 기와가 마끄러져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와정을 박고나면 기와등에는 이 와정(쇠못)의 끝부분이 남아 볼록하게 보이는데 미관상 좋지 않으므로 연꽃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덮는다.
이것을 '연봉' 또는 '백자연봉' 이라고 부르는데 백자나 토기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와정(瓦釘)이 아랫쪽 막새기와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기능이라면 이를 덮는 연봉은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을 연꽃으로 장식한다는 종교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27. 통도사는 지면의 높이를 달리한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축산통도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에서부터 통도사 경내가 시작된다.
통도사는 큰 사찰답게 건물이 많은데, 전체적으로 남향을 했으면서도 지형 때문인 듯 가람배치가 동서로 길게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가람의 배치는 법당을 중심으로 세 지역으로 나누어 상노전ㆍ중노전ㆍ하노전이라 부르고 있는데, 노전이 3개라는 것은 통도사가 3개의 가람이 합해진 복합사찰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된 3개 권역이다.
각 구역마다 지대의 높이가 다르다
<하노전>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나무로 조각한 사천왕상이 두 눈을 부라리며 서 있고, 이곳에서부터 하노전 구역이 시작된다.
천왕문의 왼쪽으로는 통도사 도량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2층의 범종각과 연이어 만세루가 자리해 있다.
범종각의 오른편에는 서향으로 돌아앉은 극락보전과 이를 마주보고 있는 약사전, 그 사이에 남향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앞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영산전 뒤로 응향각과 명월당, 통도사 종무소와 금당ㆍ은당 그리고 육화당 등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중노전>
하노전 구역을 지나 불이문을 들어서면 정면 왼쪽으로 관음전이 보이고 관음전 뒤로 세존비각ㆍ개산조당ㆍ해장보각ㆍ용화전ㆍ장경각ㆍ전향각이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용화전 앞에는 장차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게 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세운 봉발탑이 특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스님들이 경을 공부하는 강원건물인 황화각과 3동의 요사가 있고, 황화각 뒤로 통도사의 역대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이 있다.
그리고 관음전 앞에는 경을 공부하는 감로당과 원통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두 건물 지하에 대중들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공양간이 있다. 이외에도 작은 객실과 원주실, 후원 등이 있다
<상노전>
개산조당 앞쪽의 1920년에 세워진 석탑을 지나 낮은 석축 기단을 오르면 상노전 구역이다.
상노전 구역의 중심인 대웅전은 평면은 정방형이지만 지붕은 丁자형을 하고 있다. 대웅전 뒤로는 통도사의 상징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의 정면에는 대중법회와 행사를 하는 건물인 설법전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며, 좌우로는 명부전과 응진전이 있다
응진전의 남쪽에는 노전인 일로향각(一爐香閣)이 있고, 서쪽으로는 삼성각과 산신각이 배치된 작은 공간이 나오며, 그 가운데 구룡지(九龍池)가 있다.
구룡지는 자장스님이 구룡소(九龍沼)에 사는 용들을 승천시키고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 유적이다.
상노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이곳에는 주지스님의 처소인 탑광실, 그 옆에 보광전과 부속건물 그리고 그 뒤에 방장스님의 거처인 정변전이 자리하고 있다.
28. 동종에 새겨진 괘의 한 개가 어긋나 있다
통도사 동종은 형태가 다양화되는 조선 후기의 범종의 대표작으로 용뉴의 형태나 기형은 전통 범종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상대(上帶)에 연화당초문이 있는 일반 범종과 달리 범자가 새겨진 원권을 2단으로 둘러 처리한 방식으로 17세기 이후 나타나는 범종의 새로운 형식이라 볼 수 있다.
높이 159.5㎝의 대종으로, 종신(鍾身)은 상대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팽창되다가 종복(鍾腹) 부분을 정점으로 하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좁아지듯이 수직선형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한국 범종의 전형인 신라 범종 형태에 가깝다.
통도사 동종의 특징은 종의 상대에 범자를 새겨놓고 하대에는 8괘의 문양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종신에 새겨진 팔괘는 중국 범종의 영향으로 추정되는데, 현존하는 '사인비구'의 범종 가운데 팔괘가 새겨진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이 시기 다른 범종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8괘 중 곤의 괘가 바르지 못하다는 점이다.
실수로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무언가 의도가 있을듯한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또 하나의 특징은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가로 세로 3줄씩 별모양의 화문을 조성하였는데 가운데 하나만 돌출시켜 유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에는 아홉개의 유두가 모두 돌출되어 있다
신라종의 형태를 따르면서도 왜 이렇게 하나만 돌출시켰는지 의도를 알 수 없다
통도사의 동종은 2004년 낙산사의 화재로 인하여 낙산사동종(보물479호)이 소실되자 문화재청과 양산시가 유사시에 대비하여 원래의 종은 성보박물관 실내전시장에 옮겨 보관중이고 현재 종루에 달려 있는 종은 복제품이다
※ 사인비구는 종을 만드는 승려 장인이다. 조선 숙종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사인비구는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 기법에 독창성을 지닌 종을 만들었으며 현재 전해지는 8개의 종이 모두 보물로 지정될 만큼 우수한 종을 제작하였다
29. 아귀들의 밥통이 있다
‘아귀가 먹는 물을 담는다’ 하여 아귀밥통이라는 속어로 부르지만, 아귀발우(餓鬼鉢盂), 또는 아귀구(餓鬼口)라고 한다.
또 공양을 마친 후 물을 버리는 곳이라해서 퇴수대(退水臺)라고도 하며 하늘을 비출 만큼 깨끗한 물을 담는 곳이라 해서 천수통(天水筒) 혹은, 청수통(淸水筒)이라고도 한다.
보통 불전 앞의 마당과 스님들이 공양을 드시는 대중방 앞의 마당에 만들어져 있어, 예불을 마친 후 부처님께 올린 청정수를 붇거나 스님들께서 공양을 드신 후 발우를 헹군 깨끗한 물을 붇는 곳이다.
아귀는 육도 윤회하는 중생 가운데서 배고픔의 고통을 받는 중생으로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하고 배는 태산만큼 커서 항상 허기져 있지만 조그만 음식 건더기도 먹지 못한다고 한다.
만약 건더기 하나라도 목구멍으로 들어가면 목이 막혀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먹을 것만 보면 많이 먹으려고 서로 다투고 싸우므로 이 모습을 가리켜 ‘아귀다툼’이라고 부른다.
절에서 발우공양 후 물에 건더기 하나 남아있지 않는 깨끗한 천수물을 버리는 것은 아귀들의 목구멍에 음식물 찌꺼기가 걸리지 않게 하려는 남다른 뜻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물에 떠 있는 음식 찌꺼기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절약과 검소함을 몸에 익히게 하려는 한국불교의 엄격한 수행기풍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30. 용의 비늘이 있다
대웅전의 소맷돌 계단 가운데에는 계단을 이등분하는 돌조각이 있다. 이 돌조각의 무늬는 용의 비늘을 표현한 것으로 대웅전 자체가 '반야용선'임을 뜻하는 것이다.
즉 대웅전은 중생들을 싣고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용모양의 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당을 찾는 불자들은 이미 불국의 세계로 나아가는 반야용선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다
극락보전의 '반야용선도' 그림이 대웅전에서 현실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31. 돌로 만든 당간이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절에 행사가 있을 때는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 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은 보당(寶幢) 또는 천당(天幢)이라 하는 깃발의 일종으로 법당의 밖 당간에 걸어두는 것을 말하고 법당안에서 사용하는 깃발은 번(幡)이라고 한다.
당간은 원래 사찰의 입구에 배치함으로써 불법을 수호하고, 불보살의 공덕을 찬양하며, 경전을 세상에 유포하여 인간 세상에 정법을 펼치기 위한 상징적인 조형물로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당을 달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불법수호의 상징성이 약화되고 음양오행설과 풍수설이 혼합되면서 벽사의 목적, 혹은 사찰의 위치와 경계 및 종파를 표시하기 위한 시설물로 변화한 것으로도 보인다.
통도사 석당간은 통도사 일주문을 들어가기전 오른쪽 부도밭 가까이에 있다
당간지주는 이러한 당간을 지면에 고정시키기 위해 받힐 수 있도록 만든 지주이다.
지면에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기단을 올린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단을 세우기도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기도 하는데, 각 면마다 안상 등의 무늬를 장식하기도 한다.
기단 위에는 먼저 양 지주 사이에 당간을 받치는 간대를 마련한다. 간대는 보통 원형이나 방형으로 상부에는 원형의 원좌와 원공을 마련하여 당간을 끼우고 고정하도록 되어 있다.
지주에는 안쪽 상단에 파여진 홈을 간구, 중간에 패어진 홈을 간공이라 하는데, 간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당간의 지주는 거의 돌로 만들었으며 간주는 돌 · 철 · 금동 · 나무로도 만들었는데 당간은 대부분 사라지고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것이 많다.
통도사 당간은 돌로 만들었는데 영광 단주리 당간, 담양 읍내리 당간, 나주 동문 밖 당간 등 우리나라에 4개밖에 남아있지 않는 석당간 중의 하나이다
<자장율사 그는 누구인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신라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으므로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의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고 기도를 올리며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불교의 지도자로 만들겠습니다.”하는 축원 끝에 그의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에 들어오더니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었다.
부처님과 같은 날에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20대 초반에 논과 밭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불가에 귀의한 후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그는 방안을 가시로 둘러 움직이면 가시가 찌르도록 하였고,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졸음을 물리치는 고골관(枯骨觀)이라는 엄격한 수행(修行)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에 전념했다.
이처럼 그의 피나는 고행은 계속되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수행중인 자장을 대신(大臣)의 자리에 오르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거듭된 거절에 화가 난 왕은 조정의 관리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했다. 그때 칙사에게 준 자장의 답변은 단호하였다.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파계(破戒)를 하고 백년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스님의 단호한 답변은 고승으로서의 면모를 확인 시켜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자장의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항상 공부에 대한 한 가닥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신라는 본격적으로 불교사상이 유입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는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 실(實)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자장율사는 중국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終南山)과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五臺山 : 一名 淸凉山)에 머물렀다.
스님이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명상하다 꿈에 문수보살이 범어(梵語)로 된 게송을 주었는데 해독치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스님이 와서 해석하되 “일체법이 자성 없는 줄을 요달해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할지라도 아직 이보다 나은 글이 없다” 하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으셨던 가사(袈裟)와 부처님의 정수리 뼈와 치아사리(舍利) 그리고 발우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이후 자장율사는 더욱 수행을 깊이 하여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는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여 나라의 존망에 까지 직면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자장율사에게 소환을 명하여 이듬해, 자장율사는 당태종이 선사한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신라에 돌아온 것이다(643).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그를 궁중으로 초청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皇龍寺)에서 7일 주야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 한다.
자장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반월(半月)마다 계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비단 승려들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이면 여덟, 아홉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고자 하는 이가 해마다 늘어났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646년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이렇듯 통도사 창건은 자장율사의 피나는 구법(求法)노력의 결과이며, 거기에는 철저한 자장스님의 계율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경(經)과 논(論)에 능한 논사(論師)로 불리기보다는 율(律)에 능한 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신라의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귀국 후, 스님 중 최고 자리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된 자장율사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를 내려 규율을 단속하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순회 감독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섰다.
아울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국력의 신장과 국론의 통일을 꾀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전개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자장율사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제시한다.
또한 자장율사의 불교사상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스님의 한결같은 믿음으로 신라땅을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들이 구도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당나라로의 유학이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통하여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의 후원아래 구법의 길을 떠나 입당하여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당시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율사(律師)로 이름나 있다.
자장율사의 탄생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원효(元曉)와 의상(義相)보다는 연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자장율사는 불교치국정책의 일환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조성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등, 곳곳에 신라의 땅이 과거에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이곳 통도사도 창건하게 되었고 불국토인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삼국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과 신념에 찬 결단이었다.
이처럼 자장율사의 사상적 구심점은 바로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과 계율근본도량인 통도사 금강계단의 건립에서 보다 구체화 되었다.
즉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함으로서 신라사회와 모든 불교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통도사와 신라 최대의 거찰 황룡사를 형제 사찰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장율사보다 먼저 영축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낭지화상은 주로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으며 『화엄경(華嚴經)』에도 밝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의하면 그는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淸凉山 : 五臺山)에 구름을 타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한다.
그는 사미시절의 원효스님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자장율사도 낭지화상과 같은 동년배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낭지화상과 교류하였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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