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고 김삿갓 유적지(蘭皐 金─遺蹟地)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난고(蘭皐) 김삿갓(김병연)의 시대정신과 문화예술혼을 추모하고, 그의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하며, 김삿갓계곡을 특색 있는 유적지로 조성하였다.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는 김삿갓 일가가 폐족으로 사면된 후 살던 곳으로, 57세에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하자 그의 둘째아들이 이곳 노루목에 묻어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첫눈에 보아도 외롭기 짝없는 무덤이었다. 그 무덤 앞에는 높이가 두어 자 가량 되어 보이는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蘭皐 金炳淵之墓 라는 일곱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작가 정비석이 소설 <김삿갓>에 나오는 구절이다.
김삿갓의 일생을 살펴보면,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김병연으로, 1807년(순조7년) 3월 13일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수준이었다.
시 짓는 재주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오던 그는 고금의 시서와 사서를 닥치는 대로 섭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본시 글공부만 좋아하고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홀어머니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20 살 되던 해에 영월읍 관풍헌(觀風軒)에서 열리는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선천방어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1811년(순조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관련이 있다.
당시 가산군수였던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은 국가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해 버렸던 것이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병연은 평소부터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왔던 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던 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장원을 차지한 그는 술 한잔 걸치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왔던 집안내력을 가르쳐 주니 반역자 김익순이 바로 김병연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라는 그 당시의 법대로 김병연 역시 죽어 마땅하였지만 어머니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그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부르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금강산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민속에 섞여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시를 짓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살펴보며 수많은 시를 뿌려놓은 난고 김삿갓은 1863년 3월 29일, 57세의 나이로 마침내 전라도 화순군 동복땅 적벽강이라 부르는 달천강의 흔들리는 배에 누워 기구했던 한평생을 회고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차남인 익균이 거두어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외로웠던 육신을 모셔 놓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삿갓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 시인이었고, 문학적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세계적인 선(禪) 시인이었다.
그의 생애 자체부터가 전고에 그 유례를 찾아 보기 어려운 극적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남의 집 문전에서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도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수많은 시를 남겨 놓았는데, 그의 시는 모두 선미(禪味)가 넘쳐나는 시들뿐이어서, 시에 있어서도 독보적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은 개화 초기의 시대적인 희생자인 동시에, 한평생을 서민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 웃고, 서민들과 함께 울며 살아온 서민 생활의 거룩한 고행자였었다.
우리나라는 역사도 길고 문화도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의 생활 풍토만은 근본적으로 달랐는데, 김삿갓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여 항상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해 온 유일한 서민 시인이었다. 김삿갓은 진실로 서민 속에서 자생한 위대한 생활 시인이었던 것이다."
김삿갓 그는, 천하의 바람둥이였고 재치와 기행의 천재였다. 또한 그는 점잔 떠는 얼굴에 침을 뱉는 독설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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