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落花巖)
낙화암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 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성충은 마음이 괴로워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5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삼천궁녀(三千宮女)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백화정(百花亭)
낙화암 정상부에 올라서면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다. 낙화암의 높이는 60m 정도이고 절벽 아래에는 우암 송시열이 '낙화암'이라 새겼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소동파가 해주에 귀양 가 있을 때에 성 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榭百花州)라는 시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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