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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충남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by phd100 2015. 4. 1.

부소산성(扶蘇山城)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산성으로 사적 제5호. 둘레 2,200m, 면적 약 74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다.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형태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 ·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대개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500년(동성왕 20)경 처음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성왕이 천도할 무렵 개축한 뒤 605년(무왕 6)경 완전한 성을 이룬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테뫼식 산성은 현재 군창(軍倉)터가 있는 곳으로 둘레 1,500m의 성벽을 등고선을 따라 거의 토축했는데, 일부 석축한 부분도 있다.

이 성 안에는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창 자리와 백제식 가람의 방형 건물터가 있으며,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도 이곳에 있다가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영일루(迎日樓)와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 지점 사비루(泗沘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비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이 두 테뫼식 산성의 외곽선을 포곡식 산성이 연결하고 있어 백제의 독특한 산성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 골짜기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서복사(西復寺) 터,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주위의 보조산성인 청산성 · 청마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으며,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마강(白馬江)>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 이란 뜻으로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의 금강을 일컫는다. 부소산을 휘돌아 흐르는 금강을 충남 부여에서 백마강이라 부르는 데는 사연이 있다.

 

옛날에는 부여 지방에서도 이 강을 백마강이라 부르지 않고 그 이전에는 사비하(泗沘河) 사비수 혹은 사자수, 백간 등으로 불렀다. 백마강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전설과 연관되어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하고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웬일인지 안개가 자욱하여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을 그렇다보니 소정방은 안달이 났고 백제의 수도 부여 공격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까닭을 알아보니, 백제왕인 의자왕이 용으로 변하여 이강에서 조화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정방은 용을 낚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엄청 큰 낚시 바늘에 백말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과의 한판승부 끝에 기어이 용을 낚아내었다고 한다.

소정방이 용을 낚아내자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고 당나라 군사들은 안전하게 강을 건너서 백제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백마의 머리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해서 이때부터 사람들은 백마강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한편 소정방이 앉아서 용을 낚았다는 바위를 “조룡대”라고 부르며, 이 바위에는 용이 끌려 올라오면서 올라오지 않으려고 버티다 생겼다는 발톱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백마강 한복판에 남아있다.

 

이외에도 백마강에는 백제시대의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천정대, 낙화암, 조각공원이 있는 구드래, 부산ㆍ대재각, 스스로 따뜻해졌다는 자온대, 수북정 등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뱃길이 가는 곳마다 옛 전설이 있다.

 

 

<조룡대(釣龍臺)>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의 백마강(白馬江) 가운데 있는 바위.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만한 크기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어느 날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바위나루(窺巖津)를 지나 낙화암(落花巖)까지 잇대어 있던 수백 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뒤엎어지고 말았다. 소정방은 이 돌연한 괴변이 왜 일어났는지를 일관(日官)에게 물었다.

일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라고 하였다. 강룡을 퇴치할 방법을 소정방이 다시 물으니 일관은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낚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쇠를 두들겨 낚시를 만들고 굵은 철사를 낚싯줄로 하여 백마를 미끼로 강 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용을 낚기로 하였다. 그러자 용은 미끼인 백마를 삼켜서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뒷날 사람들이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하는 이 바위를 조룡대라 하고,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하여 금강(錦江)의 줄기인 부여 부근 일대의 강을 백마강(약16km)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 나온다. 그런데 ‘물고기’를 한자로 적을 때 ‘어룡(魚龍)’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정방이 어룡을 낚은 것을 뒷날 잘못 전하여 용을 낚았다고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남부여 백제조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사비하(泗沘河)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일찍이 소정방이 어룡을 낚기 위해 꿇어앉았던 자국이 바위 위에 있으므로 용암(龍巖)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어느 시기부터,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모두 확실하지는 않으나 어룡이 용으로 바뀌어 전해져 오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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