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493년(소지왕 15) 극달(極達)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 그 뒤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율사 진표(眞表)로부터 영심(永深)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참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제41대 흥덕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심지(心地)는 중악(中岳:팔공산)에서 수도하던 중,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영심(永深)이 그의 스승 진표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때가 늦어 당(堂)에 올라가서 참례할 수 없었으므로 땅에 엎드려서 참례하였다.
법회 7일 만에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심지(心地)의 둘레 10자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당으로 안내하였다.
여기서 심지(心地) 그는 열심히 수도하여 영심(永深)으로부터 법통을 계승하는 간자를 받았다. 그 뒤 팔공산으로 돌아와 산꼭대기에서 간자를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짓고 간자를 모셔 동화사의 개조(開祖)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창건 설화인 극달(極達)화상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시기이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法相宗)의 성격을 띤 유가사(瑜伽寺)라는 사명(寺名)이 붙여졌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심지(心地)가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많다.
창건 뒤 934년 선사 영조(靈照)가 중창하였고, 1190년(명종 20)지눌(知訥:普照國師)이 중창하였으며, 1298년(충렬왕 24) 국사 홍진(弘眞)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606년(선조 39)유정(惟政)이 중창을 하였고, 1677년(숙종 3)상숭(尙崇)이 중건하였으며, 1732년(영조 8)관허(冠虛)·운구(雲丘)·낙빈(洛濱)·청월(晴月) 등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영조 때의 중창시에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 · 천태각(天台閣) · 영산전(靈山殿) · 봉서루(鳳棲樓) · 심검당(尋劍堂)·칠성각 · 산신각 · 응향각(凝香閣) · 강생원(降生院) · 원음각(圓音閣) · 천안문(天安門) 등이 있다. 또한 부속암자로는 금당암(金堂庵) · 비로암(毘盧庵) · 내원암(內院庵) · 부도암(浮屠庵) · 양진암(養眞庵) · 염불암(念佛庵)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1606년학인(學人)이 건립한 것을 1677년상언(尙彦)이 중수하고, 1727년천순 · 홍재 · 의회가 중수하였다.
이곳에 모셔놓은 삼존불상은 1728년에 왕준(王峻)이 만들었고, 후불탱화는 1620년(광해군 12)에 의현(義玄)이 그린 것을 1688년에 다시 고친 것이며, 이 밖에도 삼장탱화(三藏幀畵) · 제석탱화(帝釋幀畵) 등이 있다. 또한 대웅전 천장의 극락조(極樂鳥)는 일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속암자인 금당암(金堂庵)은 건평 50평으로 공사비 4,900만원을 들여서 1974년 5월에 해체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극락전(極樂殿)을 법당으로 삼고 있는 이 암자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극락전 앞뜰에는 보물 제248호로 지정된 동화사금당암 삼층석탑 2기가 동쪽과 서쪽에 있다.
두 탑이 모두 고준하고 경쾌한 감을 주며, 옥개석 네 귀에 풍경이 달려 있는 등 예술적 가치가 크다.
동화사사적비문에는 이 석탑이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되었으며, 불사리(佛舍利) 7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동화사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제244호인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47호인 동화사비로암삼층석탑, 보물 제243호인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보물 제254호인 동화사당간지주, 보물 제601호인 달성도학동석조부도,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호인 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동화사 입구에 있는 마애불좌상은 입구 주차장의 바른쪽에 있는 큰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이 불상은 상당히 높은 곳에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바위가 튀어나와서 불상을 보호하고 있다.
섬세한 수법과 부드러운 감각, 자비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구름무늬의 대좌는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신라 흥덕왕 때 심지가 조각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던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구비한 불상으로서 이것 역시 심지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이 절에서 동남쪽으로 약 7㎞ 거리의 관봉(冠峰)에는 석조여래좌상(일명 갓바위)이 있다. 이 불상은 638년에 원광(圓光)의 수제자인 의현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하였다.
세련된 이목구비와 자비로운 얼굴이 잘 조화를 이룬 격조높은 불상으로서 머리에 커다란 갓을 썼다 하여 갓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불상에 불공을 하고 소원을 빌면 효험이 많다고 하여 참배객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한 아녀자들의 참배와 병을 낫게 하려는 참배객이 많다. 불상의 전체높이는 4m에 달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주었고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졌다는 《패엽경 貝葉經》이 전해지고 있고, 고려의 예종이 이 《패엽경》을 빌려보다가 일부를 잃어버리자 송나라에서 전해온 부처님 어금니 1개를 대신 보냈다는 불아(佛牙), 당나라에서 만든 요령(搖鈴),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 있을 때 사용하였던 영남도총섭 인장(印章), 그 밖에 유정이 사용하였던 금강저(金剛杵) · 소라고동·관수대(灌水臺) · 별향로(別香爐) · 구룡대(九龍臺) 등이 있다.
이 절은 한때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서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이며, 서사원(徐思遠)이 격문을 지어 많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등 호국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민족항일기의 31본산 시대에는 55개의 사찰을 거느렸던 대본산이었으나, 현재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 청도군 · 칠곡군 · 성주군의 4개군의 사암(寺庵)을 관장하고 있다.
절의 주위에는 무심봉(無心峰)의 흰 구름, 제천단(祭天壇)의 소낙비, 적석성(積石城)의 맑은 달, 백리령(白里嶺)의 쌓인 눈, 금병장(金塀莊)의 단풍잎, 부도암의 폭포, 약사봉(藥師峰)의 새벽별, 동화사의 종소리 등 공산팔경(公山八景)이 있으며, 약수암 앞 수숫골과 폭포골 사이에는 구세약수(救世藥水)가 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찬 이 약수는 간장병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요 당우>
☆ 봉서루(鳳棲樓)
동화사가 자리한 곳은 풍수지리에서 '봉황이 알을 품은 지세(鳳巢抱卵)'라 불리는 형세로 여겨졌다. 봉서루는 동화사의 누문(樓門)으로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서 동화사에서 승병(치병)을 지휘했던 연고에 따라 봉서루 안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어 흔히 이 부분을 '봉황의 꼬리'라 부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세 개의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것이다.
☆ 대웅전(大雄殿)
세조(世祖) 10년(1465년)에 수리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존하는 대웅전 건물은 선조 39년(1606년)에 학인에 의해 세워진 것을 숙종 3년(1677년)에 한 번 수리하였고, 최종적으로 조선 영조 3년(1727년)에서 영조 8년(1732년) 사이에 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헌종 4년(1838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또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 영산전
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해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의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현판 글씨는 서예가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맞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 양식을 갖춘 현재의 영산전은 현종 10년(1669년)에 학찬(學贊)이 세웠던 것을 1920년 중건하였다. 오른쪽 요사는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
☆ 심검당(尋劒堂)
심검당이라는 이름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참선이나 불경 강설용으로 쓰이는 건물에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동화사 심검당은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천령(天靈)에 의해 지어졌다. 1919년 3.30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영남 지방학림의 승려 아홉 명이 당시 만세운동 계획을 결의하고 수립했던 장소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에 중건된 것으로, 동화사 승려들의 생활 주거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조사전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대웅전 뒤편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18세기 건물이다. 동화사를 처음 세웠다는 극달 화상과 중창조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등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금당선원.
《삼국유사》에 나오는 동화사 첨당 우물이 위치한 자리로 알려져 있다. 금당선원은 동화사의 동쪽 별당이다.
《삼국유사》에 진표로부터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진 간자를 봉안할 곳을 찾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을 때 간자가 떨어진 우물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석우, 효봉 대종사를 비롯, 성철 등 해방 이후로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세웠다.
1974년 5월 증개축 불사로 정비되었으며,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삼층 석탑 2기(보물 제248호)가 극락전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봉황알의 유래'라는 안내문이 있다.
봉황의 정기가 서려져 있다는 의미의 봉서루(鳳棲樓) )앞 바위 위에 올려놓은 3개의 돌을 '봉황알'이라고 부르고 “봉황알의 유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화사터가 풍수상 '봉소포란형(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의 자세이며,
신라 흥덕왕 7년(832년) 심지대사가 절을 중창 할 때 오동나무 꽃이 한겨울에
상서롭게 피었다 하여 동화사(桐華寺)로 불리운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며 오동나무에 깃들고 먹는것은
대나무 열매만을 먹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절터 주변에 오동나무가 대웅전 뒤편에 대나무가 많은 것은
스님들의 훌륭한 환경 보호책의 하나이면서 봉황과 관련에 있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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