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연사 밖으로 다시 내려와 안내판이 있는 왼쪽 계단을 올라서면 적멸보궁이 나온다. 적멸보궁 법당은 여느 보궁의 그것처럼 안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고 뒷벽을 틔워 사리탑에 바로 예배할 수 있도록 내부를 꾸몄다. 법당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석조계단이 있다.
용연사의 이 석조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금강보계(金剛寶戒)로 일컫는 불사리(佛舍利)를 설해 놓고 수계의식(授戒儀式) 등을 행하는 곳),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 수계법회를 거행하던 장소로, 방등이란 계율의 정신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는 의미와 도솔천의 세계를 의미. 즉 미륵전이 미륵의 하생처라면 그 위에 있는 방등계단은 미륵상생처를 상징)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계단형 사리탑이다.
정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원형의 굄대가 겹으로 새겨진 정방형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맨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통이 넓어지다가 중앙부분을 지나면서 차츰 줄어들어 절에서 흔히 보는 범종을 그대로 닮았다.
윗부분은 구슬무늬를 한 줄로 빙 두르고 나서 겹으로 된 연꽃무늬를 한 바퀴 돌리고, 그 위로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봉오리를 봉긋하게 새겨 마무리했다.
상층기단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 면의 가운데 탱주를 새겨 사면을 여덟 칸으로 나눈 뒤, 칸마다 팔부중상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손에는 갖가지 무기를 든 채 구름을 타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눈을 부릅뜬 팔부중상은 사리를 지키는 수문장의 위세나 힘이 넘치기보다는 그 사리를 지키게 되어 마냥 즐겁다는 명랑한 표정이다.
하층기단은 아무런 무늬 없는 장대석을 상층보다 더 두툼하게 이중으로 단처럼 쌓아 마감했다. 하층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하나씩 서 있었으나 지금은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몇 차례 도난을 모면한 뒤 아예 극락전 안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천왕들은 빼어난 조각솜씨도 솜씨려니와 그 표정과 자세의 명랑성과 다양함은 가히 조선시대 돌조각 가운데 가장 오른쪽에 나설 것이다.
아기들 체구에 가까운 4등신의 몸에 나이 든 얼굴이 벌써 웃음을 자아내는데, 앞니를 두 개만 내보이며 입을 앙다물고 콧등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험악한 인상을 지어본다든지, 세 살짜리의 그것만도 못한 주먹을 허리춤에 말아쥐고 있는 대로 힘을 주어본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상층기단의 팔부중상과 함께 단조롭고 무거워지려는 사리탑에 생기를 불어넣는 멋진 조각이다.
기단 주위로는 열두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팔모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워 연결한 위에 쇠창살을 촘촘히 꽂은 난간을 둘렀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설치한 것이다.
탑을 보호하고자 한 뜻을 모르는 바 아니나 기단에 너무 바짝 다가서 갑갑하고 쇠창살도 볼썽사납다. 탑 앞의 석등은 그 솜씨로 보아 난간을 만들 때 함께 조성한 듯하고, 상석은 그 두툼한 형태가 탑의 기단부와 닮아 보인다.
사리탑 양쪽 앞으로는 비가 3기 서 있다. 왼쪽 것이 바로 임수간이 비문을 지은 비슬산용연사중수비(琵瑟山龍淵寺重修碑)이다.
글씨는 남한명(南漢明)이 썼는데 가볍게 흘린 행서체의 글씨가 유려하다. 오른쪽의 작은 비는 석가여래중수비(釋迦如來重修碑)로 1934년 사리탑을 중수한 사실을 적은 것이다.
그 옆의 것이 1673년 사리탑을 조성한 뒤 그 내력을 밝힌 석가여래비(釋迦如來碑)이다. 탑을 만들고 3년이 지난 1676년에 세운 이 비의 내용으로 불사리가 용연사에 모셔지는 경위를 상세히 알 수 있다.
<비의 내용>
『신라 때 스님 자장(慈藏)이 ······ 양주(梁州=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 갈무리한 것이 두 함(函)으로 각 함에 2과(顆)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임진년의 난리 때 왜적이 (탑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꺼내었으나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이 격문을 보내 (사리에 따르는) 재앙과 복덕을 들어 그들을 설유하니 적들은 온전히 사리를 돌려보냈다.
송운스님이 그것을 받들고 금강산의 서산대사 휴정(休靜)에게 나아가 처분을 물었다. 휴정스님이 탄식하며 말하길 “자장스님은 신인(神人)이다. 그분이 처음 깊이 갈무리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끝내 파내어 짐을 면치 못했으니,
갈무리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으되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누군가 함부로 파내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함 하나는 문인인 선화(禪和) 등에게 주면서 태백산의 보현사(普賢寺)에 안치하도록 하고,
또 다른 함 하나는 송운스님에게 넘겨주며 통도사로 돌려보내 탑을 고치고 봉안하도록 했으니, 그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함이었다. 그 무렵 영남지방은 또 다시 병화에 휩싸여 대중들이 모두 새나 쥐처럼 뿔뿔이 흩어지니 (탑을 고쳐 세울) 일을 시작할 겨를이 없었고,
송운스님은 (사리를) 원불(願佛)로 모시고 어명에 따라 일본을 다녀온 뒤 곧 입적하게 되니 그 함은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남게 되었다.
그의 제자 청진(淸振)이 비슬산 용연사에 옮겨 모신 뒤 대중들과 상의하여 탑을 세워 모시기로 하되, (서산과 사명) 두 스님의 유지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1과는 통도사로 돌려보내 안치하도록 하고 1과는 용연사의 북쪽 기슭에 봉안했다. 계축년(1673) 5월 5일 탑이 이룩되니 높이가 5척 5촌이었다.』
사리탑의 3면을 두른 담장도 참하다. 막돌 허튼 층 쌓기 한 축대 위에 기와조각과 황토 흙으로 층층이 쌓은 담장을 올렸는데, 이끼 앉은 돌들의 빛깔도 차분하고 그 위의 담장도 수더분하다. 사리탑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게 이 담장이다.
석조계단이 들어선 자리는 용연사의 성소(聖所)다. 더구나 그것은 사람이 가까이하기 어려운 냉랭한 성소가 아니라 누구라도 따뜻이 감싸줄 안온한 성소다.
<석조계단이 세워지기까지>
용연사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전이다. 이곳에 봉안된 석가모니 사리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의 고승인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구법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와 두 함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1592)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되어 사리를 도난당하였다. 그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한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하였었으나 계축년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에 탑을 건조하고 봉안하게 되었다.
보궁은 석조로 된 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중앙에 안치한 형식으로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을 양각하고 하층기단의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했다.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나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 구조에 균형 있는 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석조 예술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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