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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기

남양주 다산 정약용생가와 묘소

by phd100 2013. 11. 22.

 

정약용 생가와 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져 하나를 이루고 있는 마현마을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자, 전라도 강진에서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머물던 곳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관료였으나, 당파 싸움과 천주교 박해에 의하여 그의 젊은 시절 대부분은 한양에서 수백 리 떨어진 남도 땅, 강진에서 보내게 된다.

18년 유배 생활 동안 그곳에서 학문을 꽃 피우는데, 다산초당에서 주변과 교류하며 쌓은 학문적 업적은 우리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시대를 개혁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담았던 그는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태어나고 자랐던 이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 이곳에는 그가 살았던 집인 여유당, 다산기념관과 문학관, 다산의 무덤이 함께 있다.

1970년대 홍수로 떠내려간 것을 복원한 집이라 옛 맛이 덜해 관람하면서 아쉬운 마음이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안식을 얻은 곳임을 기억하면서 둘러본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과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수원성을 쌓을 때 그가 발명했던 거중기와 녹로가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산문학관은 다산의 생애와 그의 저술들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곳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산문학관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다산의 무덤에 올라보면, 작은 봉분의 무덤이 위대한 학자의 무덤이라 부르기에 초라한 듯하지만, 한강의 도도한 흐름을 바라보며 역사 속의 큰 인물 앞에서 고개를 숙여본다.

 

 

◆ 여유당(與猶堂)

정약용의 당호이다. 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하다'는 뜻이고, “유(猶)”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의 뜻.

겨울 냇물은 무척 차거워,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것이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냇물을 건너지 말라.

또한 세상에는 두려운 사람들이 많으니 함부로 행동하지말라.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항상 따르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이 당쟁의 중심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했고, 그 아들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는 문벌과 당색의 타파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인재의 고른 등용을 역설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자신의 묘지명(墓誌銘).

유배에서 돌아온지 4년 뒤 회갑 때 지나온 파란의 삶을 회고하며 지었다. 무덤에 넣는 소략한 광중본(壙中本)과 문집에 실을 상세한 집중본(集中本) 두 가지가 있다. 집중본을 중심으로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 이란 뜻에서 지었다. 어려서 영특해 문자를 알았고, 10세때부터 과예(科藝)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집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경사(經史) 고문(古文)을 배우고 시율(詩律)을 잘 지었다.

 

15세에 서울에서 이익(李瀷) 선생의 글을 보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22세때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해 태학(太學)에서 공부하였다. 임금이 『중용』에 대한 80개의 조목을 내리자 친구인 이벽(李檗)과 함께 답변을 준비했다. 이벽은 이황(李滉)의 학설을 지지했고, 정약용은 이이(李珥)의 학설에 합치했는데 1등을 받았다. 이때부터 임금의 총애가 각별했다.

 

1784년(정조 8)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가다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해 듣고 책 한 권을 보았다. 그렇지만 과문(科文)과 변려(騈儷), 일과(日課)의 학습으로 다른 겨를이 없었다. 1789년 봄 성균관에서 보던 시험에 표문(表文)으로 수석한 다음, 대과(大科)에 응시해 갑과(甲科) 2등으로 합격하고,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제수받으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서학을 믿어 위패와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한 사건으로 일차 곤혹을 겪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중에 임금의 명으로 수원성 축성에 쓸 기중기를 설계하여 4만냥의 비용을 절약했다. 사도세자를 추증하는 도감(都監)을 맡아 공을 세워, 벼슬이 더욱 높아져 삼사(三司)의 요직과 암행어사 동부승지등을 역임했다.

 

1794년 주문모(周文謨) 사건으로 서교의 혐의가 다시 불거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그곳의 서학을 금하고 신자들을 회유시키는 한편, 이삼환(李森煥) 등과 함께 온양 석암사(石巖寺)에서 강학했다. 매일 수사(洙泗)의 학문을 강론하고 성호 선생의 문집을 교정해 열흘만에 마쳤다.

 

1791년 동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서학에 빠졌던 점을 반성해 사직하는 소(疏)를 올렸다. “책만 보고 만 것이 아니라 마음에 흔연히 빠져들었다.”고 고백하자, 충정을 헤아린 임금이 비방과 참소를 피하라는 뜻에서 외직인 곡산도호부사에 보했다. 38세 내직으로 불려와 동부승지에 이어 형조참의로 제수받으며 임금과 돈독한 교유를 재개했다.

 

39세 참소와 시기가 끊어지지 않자 낙향을 결심했으나 임금이 다시 불러올려 교서를 맡았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세가 급변하여, 서학을 빌미로 한 1801년 숙청의 바람 속에 형 정약종(丁若鍾)은 죽고, 정약전(丁若銓)은 신지도로, 그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저술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취조를 받고,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다시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정승 서용보(徐龍輔)의 방해로 석방이 좌절되었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이사했다. 천여 권의 장서를 두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의 주요한 저작은 거의 이 시기의 산물이다.

 

강진에 유배되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선왕(先王)의 대도(大道)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 여가를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가져다가 침잠하여 탐구하고, 한위(漢魏) 이래로 명청(明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유학자의 학설로 경전에 보익이 될 만한 것을 널리 수집하고 두루 고증하며 오류를 정정하고 취사해 일가(一家)의 서(書)를 이루었다.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 『모시강의보(毛詩講義補)』 3권,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 『상례외편(喪禮外編)』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 『악서고존(樂書孤存)』 12권, 『주역심전(周易心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40권,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희정당대학강록(熙正堂大學講錄)』 1권,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 등 경집(經集) 232권 등을 저술하였다.

 

저술을 통해 밝혀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시(詩)』는 임금으로 하여금 선을 감발하고 악을 징치하도록 한 풍송(諷頌)의 노래 모음집으로 원래의 춘추보다 더 엄했다고 밝혔다. 『서(書)』에서는 매색(梅賾)의 고문상서(古文尙書) 25편이 위작이라는 것을, 『예(禮)』에서는 정현(鄭玄)의 주석에 오류가 많은데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폐단을 지적하였다. 『악(樂)』에서는 오성(五聲)과 육률(六律)의 차이를, 『역(易)』에서는 추이(推移), 효변(爻變), 호체(互體)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논어(論語)』에서는 인(仁)이 총체적 덕목이고 효제(孝弟)는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 세목임을, 『맹자(孟子)』에서는 기(氣)를 받치는 것이 의(義)와 도(道)라는 것을, 그리고 ‘본연(本然)의 성(性)’은 불교적 인식이므로 ‘천명(天命)의 성’을 말하는 유학과는 상용될 수 없음을 말하였다. 『중용(中庸)』에서는 용(庸)의 의미가 평상이 아니라 꾸준한 지속적 파지의 의미임을, 『대학(大學)』에서는 대학이 필부와 서민을 위한 책이 아니라 통치 계급의 교범임을 밝혔다.

 

그 다음 현실 정치 개혁의 저술로 『경세유표(經世遺表)』는 묵은 나라를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방책을,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지방관의 통치 지침을,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옥사의 공정함과 합리화를 위해 저술하였다. “육경사서(六經四書)로써 자기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했으니 본말을 갖추었다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당대에 인정을 받기가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자는 많으니, 천명이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불에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하였다. 당시 노론 벌열인 김매순(金邁淳)의 극찬에 크게 고무되기도 했지만, 그는 “백세(百世) 후를 기다리겠다.”며 후일을 기약했다. 그의 호인 사암(俟菴)에는 그처럼 당대에 대한 비관과 후대에의 절절한 기대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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