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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얘기

진례면 어떤 곳인가?

by phd100 2017. 10. 31.



<진례면 출신이면 아래 글은 천천히 꼭 읽어 보십시오.>

 

<향후 몇 회에 걸쳐 우리가 몰랐던 진례면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전에 임진왜란과 의병에 대해 잠간 얘기하고 계속하겠습니다.>

 

<조선왕 선조25년. 임진년(壬辰年) 1592년 4월13일 왜구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봉대 1만8700명을 700여척 배에 나누어 타고, 대마도 오우라항(大浦港)을 출항, 부산포로 쳐들어 왔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임진왜란 때 김해전투 얘기>

<1592년 4월 15일, 전날 부산진성(첨사 정발)을 짓밟은 일본군은 동래읍성(부사 송상현)을 공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군사 100여 명을 남문으로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 달라'고 요구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단호했다. 그는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대답했다.>

 

<14일 부산진 함락, 15일 동래 함락 순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너무나 중과부적이었으므로 송상현 등 무수한 사람들이 적과 싸우다 순절 할 수밖에 없었다. 생포되었던 송상현의 첩 금섬은 사흘 내내 적을 비난한 끝에 결국 살해되었다. 동래성이 적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동래성을 함락한 1만 8000여 적군이 한꺼번에 몰려온 이튿날까지 부산, 동래, 김해까지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서쪽 낙동강 너머 김해는 4월 20일 적의 손에 넘어갔다. 4월 17일에서 20일까지 4일간에 걸친 김해성 싸움은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격렬한 전투이다.>

 

<관군 대장이 이끈 부산진성, 동래 읍성, 다대포진 전투와 달리 김해성 전투는 의병들만으로 적과 결전을 치렀다는 뜻이다.(의병: 국가가 외침으로 위태로울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아가 싸웠던 민간인)>

 

<이 때 관군은 어디로 갔을까? 도망쳤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소수 병력을 보내어 침탈을 시도해온 4월 17일과 18일에는 대장 격인 김해 군수와 부장 격인 초계 군수가 김해성내에 있었다.

하지만 늦게 상륙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 1만 3000여 명이 밀어닥친 19일에는 어느새 군수도 줄행랑을 놓고 없었다.>

 

<관군 지휘관은 도망하고 백성들만 남았다. 지휘관이 어떻게 도망을 갈 수 있을까, 하고 놀랄 것도 없다.>

 

<낙동강 동쪽의 육군을 총지휘하는 경상 좌병사 이각도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도망쳤고, 수군을 총지휘하는 경상 좌수사 박홍도 싸움 한번 없이 수영성을 적에게 헌납하고 달아났다.>

 

<군수를 비롯한 지도부가 관군 병사들을 이끌고 달아나버린 김해 성내에는 몇 백 명의 백성들 만 남았다.>

 

<이들은 송빈(宋賓, 1542~1592), 이대형(李大亨, 1543~1592), 김득기(金得器, 1549~1592), 류식(柳湜, 1552~1592)선비를 비롯한 김해 백성들이었다.

관군 지휘관 없이 순수 백성들만으로 적에 맞섰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군이었다.>

 

<여기서 잠간 2010년 6월1일 정해진 “의병의 날”은 사실 닷새 정도 앞당겨야 한다.

이건 곽재우 장군 이전에 김해에서 최초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의령군에서 먼저 선점해서 정해 버린 것이다. 이 때 이때 김해군수는 뭐했노?>

 

<임진왜란 최초 의병이 곽재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들 4명이다. 이들은 최초의 의병이 되어 일본 대군에 맞섰다.>

 

<왜놈들은 인해전술 전략을 펼쳤다. 1만 3000명이 달려들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성곽 아래에 쌓았다. 순식간에 보릿단은 성벽은 덮었고, 적병들은 그것을 타 넘고 성안으로 밀려왔다. 김해 읍성 어딘 줄 아시죠? (동상시장 위쪽)>

 

<이때 이대형, 김득기, 류식을 비롯한 김해 의병들은 모두 순절했다. 송빈도 마지막까지 칼을 휘두르며 싸운 끝에 전사했다.>

 

<그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최후의 전투를 벌인 곳은 고인돌 위였다. 그 고인돌 위에는 지금도 송빈을 기려 세워진 비석이 남아 있다.(서상동 고인돌)>

 

<이렇듯 김해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주요 공격지였다.>

 

<이 당시 김해 부사 서예원은 경남의 여러 부사, 군수들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그러니 모두 몰살 할 수 밖에 ...>

<관군 동래 부사 송상현은 동래성에서 반나절을 버텼는데, 우리 의병들은 김해에서 4일을 버텨 싸웠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지금에 와서 누구를 더욱 기려야 되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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