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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얘기

金海 進禮面(2)

by phd100 2017. 11. 1.



<어제 이어서 계속입니다. 지난 얘기가 생각나지 않으시면 한번 더 읽어 보십시오.>

 

<이 당시 김해 부사 서례원은 경남의 여러 부사, 군수들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그러니 모두 몰살 할 수밖에 ...>

 

<진례 지역의 유지인 송빈(宋賓, 1542~1592)과 활천동에 사는 이대형(李大亨, 1543~1592)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냈다.>

 

◇ 송빈(宋賓)은 청주 송씨의 집성촌인 진례면 담안마을에 살았으며 높은 덕망과 학식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선비였으며, 천성이 맑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의병으로 나서겠다고 마음을 정한 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나는 비록 벼슬이 없으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나라가 지금 위급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이후 의병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써서 여러 마을에 붙였다. 지금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격문을 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의병들이 모였다. 이들은 김해성으로 들어가 부사 서예원과 합심해 왜적에 맞서 싸우자고 결의했다.>

 

◇ 이대형(李大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김해성을 지키겠다고 결단했다. 그는 마을을 돌며 의병 100여 명을 모아 4월 15일 김해성으로 나아갔다.

李大亨(이대형) [1543-1592] 의 그 조부 사직공(祖父 司直公)이 함안의 모곡리에서 김해의 활천리(活川里)로 이주하였다.>

 

<김해 부사(府使) 서례원(徐禮元)이 평소부터 李大亨의 慷慨(강개)한 大節(대절)이 있음을 알고 그를 請해 와서 討敵求國(토적구국)의 뜻을 말하니 그는 이를 수락하고는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니 너희들은 避亂(피난)하여 先祀(선사)를 끊지 말아라"고 부탁하였다.

마침내 장정 벡여명(壯丁 百餘名)을 모집하여 城中(성중)에 들어가서 수성(守城)의 책임을 맞게 되었다.>

 

<적병(敵兵)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성(城)을 메우고는 일제히 城을 넘어 들어오니 4월20일 밤에 이대형(李大亨)은 마침내 순국(殉國)하고 말았다.>

 

<그의 장자(長子) 우사(友社)도 城이 몰락되었단 말을 듣고서 아버지의 시체(屍體)를 찾으려 왔다가 또한 적병(敵兵)에게 살해(殺害)되었으며,>

 

<주익창(周益昌)에게 시집간 그의 질녀(姪女)도 또한 적병(敵兵)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으니, 일가문(一家門)에 삼강(三綱: 忠. 孝. 烈.)이 병립했으므로 그 활천리 동명(洞名)을 三芳洞(삼방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후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동시 순국(同時 殉國)한 宋賓(송빈), 金得器(김득기) , 柳湜(류식)과 함께 사충단(四忠壇)에 향사(享祀)되었다.>

 

 

◇ 김득기(金得器 1549~1592), 류식(柳湜 1552~1592)도 가세했다.

<- 김해 부거인리(지금의 외동)에서 태어난 김득기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시끄럽자 입신출세할 때가 아니라며 향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왜군이 김해성에 쳐들어오자 싸우기로 결단했다. 당시 17세였던 6대 독자 아들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만류했다. 김득기는 도포 한 벌과 머리카락 한줌을 잘라 주며 아들과 작별했다고 한다.>

 

◇ <- 류식은 어린시절 과거를 준비하며 공부하다 벼슬에 뜻을 버리고 책과 벗하는 선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왜군이 월당진(지금의 대동면 월촌리)을 건너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라며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왜군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1만 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해로 쳐들어 왔다. 이들은 4월 18일 김해성을 포위하고 총, 화살, 화포로 맹공격을 퍼부었다.>

 

<김해 병사들과 백성들은 함께 힘을 모아 싸웠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엄청난 수의 왜군에 조금씩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지원병을 이끌고 온 초계군수는 슬금슬금 달아났다. 김해부사인 서례원 역시 도망간 군수들을 잡으러 간다고 말한 뒤 진주성으로 달아났다.>

 

<사충신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부사까지 도망을 쳐 더 열악해진 상황에서도 백성들과 함께 김해성을 지켰다.>

 

<4월 20일 성 안으로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온 왜군의 공격에 의병들은 줄줄이 목숨을 잃었다. 쓰러진 의병들이 시체 언덕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뤘다고 한다.>

 

<이대형, 김득기, 류식은 투항을 권고하는 왜적에 맞서 싸우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진남문에 있던 송빈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몸을 피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끝까지 싸우다, 절명시를 읊은 뒤 성 내 큰 돌 즉 현 김해재래시장에 있는 ‘서상동 지석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아무도 모른 채 역사의 어둠에 파묻힐 뻔 했던 사충신과 백성들의 충의는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양업손이라는 사람을 통해 전해졌다.>

 

<처음부터 열세였던 싸움에 목숨을 건 이들의 희생은 무의미한 게 아니었다. 사충신이 사흘 동안 김해성을 지킨 덕분에 진주성은 전열을 다질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진주성도 결국에는 함락됐지만, 김해 · 창원 · 진주를 지나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향하던 왜군의 발걸음을 늦출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유림들을 중심으로 사충신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나라에서도 이들의 공을 인정했다. 송빈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3년(1600년) 공조참의로 추증됐다. 고종 12년(1875년)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됐다.>

 

<1707년 이순신의 후손인 이봉상은 김해부사로 와서 송빈의 사적을 보고 감탄해 사당을 지어 봉향하자고 조정에 상소했다. 이듬해에는 유림들과 힘을 모았고 1716년 주촌면 양동리에 표충사를 세웠다.>

 

<표충사는 1708년 무자(戊子)년에 건립됐다. 당시 관리가 조정에 무자(戊子)년을 무술(戊戌)년, 즉 1718년으로 잘못 보고하는 바람에 훼철 대상에 포함돼 사라졌다고 한다.>

 

<표충사가 없어진 후 경상도 유림들은 연이어 표충사 재건 상소를 올렸다. 그 덕분에 40여 년 만인 1784년 진례면 신안리에 재건될 수 있었다.>

 

<이 때 이대형과 김득기를 더해 삼충신을 향사했다. 처음에 사호(건물 이름)는 송빈의 호를 딴 송담사였다. 때로는 삼충사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류식이 나중에 사충신으로 합쳐진 것은 1872년 김해부사 정현석이 부지(府誌)를 열람하고, 공의 사적이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관찰사에게 알리자, 관찰사가 조정에 계정(啓請), 마침내 사충신 모두를 모시게 됐다. 1884년에 이조참판에 가증(加贈)되었다. 지금도 객관터 아래에 우물을 류공정(柳公井)이라 새긴 빗돌이 있다.>

 

<류식의 후손들은 류식의 아드님인 수홍이 대동면에서 진례면으로 옮겨와 살고부터 진례면(進禮面) 다곡(茶谷)마을은 류씨의 집성촌으로 사백여 년을 이어온다.>

 

<김해시는 1995년에 사충단 성역화사업을 실시해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로 이전했다.>

<송담서원, 표충사, 사충단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시민들이 흔히 사충단이라고 부르는 곳은 실제로는 송담서원이다.>

 

<서원의 여러 건물들 중 사충신을 기린 비석을 감싼 작은 비각이 사충단이다. 표충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4월 20일 사충신을 기리는 향례를 올린다.>

 

<동래부사인 송상현 선생은 한나절 동래를 지켰지만 충의를 기려 광장도 만들고 부산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해의 사충신은 관리도 아닌 일반 선비이면서 의병으로 나서 더욱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김해시에서는 4월20일을 의병의 날로 정해 그분들의 뜻을 되새겨 봄이 어떨지...>

<계속>

 

 

<청주송씨>

송승은(宋承殷)을 1세조(世祖)로 하고 있으며, 청주에 본관을 두고 있으나 청주 근교에 세거한 흔적을 찾지 못했으나 송승은이 조선 단종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계유정란 때 낙향하여 김해 하계면(지금의 진영읍)에 은둔하면서 이곳이 세거지가 되었다.

 

2세 송숙형(宋淑亨)은 훈련원 참군을 역임하였고, 5세로 절제사를 지낸 송창(宋昌)은 아들 송밀(宋密)과 송빈(宋賓)을 두었고, 송밀의 두 아들 송민영(宋敏英)은 만호공파(萬戶公派)로, 송정영(宋廷英)은 부사공파(府事公派)로 분파되었으며, 송빈[1542~1592]의 두 아들 송정백(宋廷伯)은 청암공파로, 송정남(宋廷男)은 부사공파로 각각 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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