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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얘기

進禮面(3)

by phd100 2017. 11. 2.



<진례면 그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고려 왕건은 즉위 초부터 추진하던 왕건의 호족 포용 정책은 상주 아자개의 귀부를 시작으로 차츰차츰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920년 정월에는 강주(지금의 진주) 땅에서 강주장군이라고 칭하는 윤웅이 자기 아들인 일강을 인질로 보내었고, 이에 왕건은 일강에게 아찬의 벼슬을 주고 고위직인 경(卿: 벼슬 명칭)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처로 삼게 해준다. 인척관계를 맺어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또한, 개경에서 직접 낭중 춘양을 강주 지역으로 파견하여 호족들을 위무하면서 감시까지 겸하는 활동을 한다.

 

그리고 신라 경명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온다.

이미 힘도 없고 그저 이름뿐인 신라가 사신을 먼저 보낸 나라는 후백제가 아닌 고려가 된 것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온 백제와 신라와의 악연이 아직 존재했을 수도 있고 기고만장한 견훤보다는 자세를 한껏 낮추고 신라를 위해주는 왕건이 더 가깝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암튼 이후 견훤의 공격을 예상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친교를 맺음으로써 신라는 고려라는 우군을 얻게 되고 후백제와는 악연만 쌓게 된다.

 

사실 신라 9주 5소경 중의 하나인 강주는 그 중심이 되는 곳이 지금의 경남 진주이고 아직까지는 궁예, 견훤, 왕건에게 그렇게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 호족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유독 약소 호족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었고 이후 924년부터는 의령 쪽에서 활동하는 왕봉규가 강주를 점령하게 되고 이후부터는 후백제의 견훤이 이 지역을 실질적 통치하게 된다.

 

강주장군 윤웅이 고려에 항복한 것만 보아도 강주 지역에 위기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같은 해 10월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시작으로 한 강주(진주), 양주(지금의 양산) 공략의 전쟁 첩보를 미리 접수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표면적으로는 왕건과 견훤은 평화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때는 힘이 제일인 시대였기에 서로 표정은 웃고 있을 뿐 뒤로는 칼을 갈고 있었다.

 

견훤은 9월 화전양면전술(화평과 전쟁을 동시에 구사하는 전술)을 다시한번 사용한다.

 

아찬 공달을 보내어 공작선과 지리산에서 나오는 죽전(대나무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주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달인 920년 10월 견훤은 보병과 기병 합 1만의 병력을 가지고 대야성을 공격한다.

 

이미 두 번의 공격에서 실패한 견훤이라 이번 대야성 전투는 벼르고 공격한 것이기에 드디어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군)을 수중에 넣게 된다.

 

이어 구사군(지금의 경남 창원시)을 빼앗고 진례군(지금의 경남 김해시 진례면)까지 진격한다.

 

지도를 보면서 견훤의 루트를 확인해보면 후백제의 수도가 있는 전북 전주를 출발하여 합천군에 있는 대야성을 격파하고,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 구사군과 진례군을 공격하는 루트를 사용하였다.

 

역시 한번 시동 걸면 브레이크가 없는 견훤이다.

이에 신라 경명왕은 코앞까지 온 후백제가 두려워 아찬 김률을 고려에 보내어 원병을 청하게 되고 왕건이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게 된다.

 

각자의 나라에서 먼 거리에 있는 곳에서 싸움을 해서 그런지 서로 무언가 합의를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견훤과 왕건은 서로 충돌 없이 회군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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