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구 가회면)
폐사지(廢寺址), 절은 망하고 터만 남은 곳, 그곳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찾는가? 남은 것 만큼이나 사라진 것과의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가득 차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따금씩은 단지 그곳의 허허롭고 쓸쓸하고 무상함에 이끌려 우리의 발길이 닿기도 하는 법이다.
삶이 어찌 환희와 충만과 영원만으로 완전할 수 있으랴. 허허로움과 쓸쓸함과 무상함이 오히려 우리의 본래 모습에 더 가깝지 않겠는가. 하여, 가끔씩은 이런 것들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채 초라한 제 그림자를 응시하는 것, 이것이 무너진 절터를 서성이는 이유일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암사터는 우리에게 그런 여백을 허용치 않는다. 비록 아득한 옛날에 절은 없어졌지만 남은 자취만으로도 넘치도록 사랑스러워 우리의 눈과 마음이 바빠지기 때문이다.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낱낱의 유물이 탄탄하고 값지고 보배로워 그들이 자아내는 향기에 취하고, 절터를 품에 안은 황매산(黃梅山, 1,108m) 바위봉우리의 빼어난 모습에 홀려 여념이 생길 수 없는 까닭이다.
“왕은 ······ (스님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물러나 조용히 살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영을 내려 가수현 영암사에 머물도록 했다”(王···許從丹請 俾遂幽栖 迺命加壽縣 靈巖寺 居之). 빗돌은 간데없고 탁본첩만이 전하는 적연국사 자광지탑비명(寂然國師慈光之塔碑銘)의 한 구절로, 알려진 대로라면 영암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가수현은 삼가현(三嘉縣)의 옛 이름이다. 영암사터가 있는 오늘날의 가회면이 예전에는 거기에 속했다. 이로써 마을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던 절 이름은 틀림없음이 분명해졌지만 더 이상의 내력은 안개 속이다.
다만 적연국사가 고려 현종 5년(1014)에 향년 83세를 일기로 영암사에서 입적했다는 비문의 내용이나 절터에서 수습된 갖가지 유물들로 보아, 영암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적어도 고려 후기까지는 남아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절터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는 마을사람들의 수고로움과 애씀이 컸다.
1933년 일본인들이 몰래 가져가려던 쌍사자석등을 지켜낸 것도 마을사람들이었고, 1959년 면사무소에 있던 그 석등을 기어이 찾아다 애초의 자리에 세운 것도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무너진 채 방치되던 삼층석탑을 바로 세웠고, 마을의 고가 두 채를 옮겨 지어 절터를 지켰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금당터를 땅 위로 드러낸 것 또한 그들이었다.
비록 집 두 채를 옛터 위에 세우는 바람에 절터의 본 모습을 일부 훼손하거나 볼 수 없게 만드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억척스러움과 끈질김이 아니었다면 영암사터가 오늘의 모습이나마 간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8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절터의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의 발굴로 이미 땅 위에 드러나 있던 유물과 유적 말고도 중문터, 회랑터, 회랑에 이어진 건물터, 금당 북쪽의 건물터 따위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회랑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암사의 사격(寺格)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경복궁 회랑에서 보듯이 왕조시대에서 회랑은 곧 왕권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회랑이 있거나 있었던 절, 예를 들면 불국사나 감은사, 황룡사, 미륵사 등은 왕실과 깊은 관계가 있거나 국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회랑의 존재로 보아 영암사 또한 이런 절들에 맞먹거나 버금가는 비중 있는 절이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것은 절터에 현존하는 여러 석조물의 수준으로도 능히 뒷받침되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튼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암사터는 1984년의 발굴조사를 끝내고 정리한 모습이다.
<석축 셋이 남아 있다>
영암사터에는 석축이 세 군데 남아 있다. 가장 아래 중문터에서 회랑터로 이어지는 곳에 하나, 금당터 앞의 긴 축대 하나, 그리고 금당터를 옆과 뒤로 에두르고 있는 낮은 석축 하나. 모두 화강암을 길고 네모나게 다듬어 쌓았는데, 금당터 앞의 것과 중문터에 남은 것이 볼거리가 된다.
1) 중문터에 남은 석축은 절터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유물이다. 절터의 남동쪽 모퉁이에 극히 일부가 남아 있지만 원형을 그려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높은 곳은 11단이 되도록 다듬은 돌로 가지런히 쌓아올렸는데, 다섯째 단과 아홉째 단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쐐기돌을 박았다.
쐐기돌은 마치 석굴암 본존불 머리 위의 무지개천장에 박힌 것들처럼 석축의 돌들이 밖으로 불거지지 않게 하는 기능과 아울러 무늬의 구실도 했다.
지금처럼 귀퉁이에서 꺾여진 석축이 회랑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을 옛날에는 두 줄로 나란히 박혀 있는 쐐기돌이 있어 단조롭지 않으면서도 정연한 모습을 뽐냈을 성싶다.
석축에 박혀 있는 쐐기돌은 그 머리만을 밖으로 내밀고 있지만, 지금도 길가에 나뒹구는 놈이 있으므로 그 생김새와 기능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2) 금당터 앞 석축은 더 볼 만하다. 남북으로 길게 석축을 쌓으면서 그 한가운데를 마치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내쌓은 치(雉)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오도록 만들었다.
굳이 이렇게 가운데에서 축대를 내쌓은 이유는 오로지 석등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그 위에 놓인 쌍사자석등은 (금당 앞 마당 전체를 넓히지 않고도) 금당과 알맞은 간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훨씬 도드라져 보이는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참 멋진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튀어나온 축대 양옆으로는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붙여놓았는데, 이 계단 또한 걸작이다.
통돌을 밖으로 휘어지게 휘우듬히 깎은 다음, 여섯 단으로 디딤돌을 파낸 좁장한 무지개다리가 2단으로 턱을 지운 받침돌 위로 걸려 있다.
직선 일색인 석축에 곡선을 넣어 변화를 꾀한 생각도 기특하고, 폭이 하도 좁아 디딜 때마다 발뒤꿈치가 허공에 매달리는 디딤돌은 밉살맞을 정도로 귀엽다.
혼자서 겨우 오르내리기에나 알맞은 크기 또한 세심한 계산의 결과로 보인다. 아마도 무지개다리가 이보다 더 컸다면 모양새가 넙데데하여 보기도 싫었겠지만, 무엇보다 지금처럼 도드라진 축대나 그 위에 자리한 석등과 어울리며 연출해내는 군더더기 없는 상승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덜거나 보탤 것 없는 기막힌 석축이요 돌계단이다.
▼삼층석탑
금당터보다 한 단 낮은 마당에 서 있다. 흔히 보는 대로 이중의 기단과 삼층의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 이루어진 삼층석탑이지만, 상륜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네 덩어리 돌을 짜 맞추어 하층기단을 만들었는데, 지대석·중대석·덮개돌을 하나의 돌에 모두 새겨서 표현한 점이 특이하다. 버팀기둥은 면마다 하나씩 도드라졌다.
상층기단은 귀기둥과 버팀기둥이 하나씩 새겨진 네 매의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두 장으로 된 덮개돌을 덮어 마무리했다.
탑신부를 구성하는 지붕돌과 몸돌은 저마다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몸돌에는 면마다 두 개의 귀기둥을 새긴 것 말고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지붕돌도 처마받침이 넷으로 줄어든 것을 빼면 별다른 특징이 없지만, 귀마루의 선은 그런대로 예쁘게 살아 있다.
기단부를 비롯한 각 부분을 간명하게 짜맞추어 그런지 꽤 단단하고 경쾌하면서 명징한 맛이 나는 탑이다. 두드러진 미덕이 없으면서도 무언가 매력을 풍기는 것은 어쩌면 이 탑의 색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탑을 만든 화강암이 엷은 살색을 띠어, 탑은 흡사 살짝 붉힌 볼처럼 가벼운 온기가 돈다. 높이 3.8m, 보물 제480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쌍사자석등
쌍사자석등은 영암사터의 핵이며 눈이며 꽃이다. 이 석등이 있음으로 해서 영암사터는 영암사터가 된다.
모르긴 해도 절을 지은 이들의 이 석등에 대한 애정과 자부는 여간 아니었을 듯싶다.
탑과 나란히 섰을 때 자칫 왜소해 보일 수도 있는 작은 크기를 고려하여 탑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위치시킨 점이나 오로지 그를 위해 석축을 내쌓으면서까지 석등을 강조한 것에서 그 점을 쉽게 읽을 수 있거니와, 석등 자체도 그에 걸맞는 기발한 품새와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은근한 자랑이 오죽했으랴.
쌍사자석등은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양식에서 간주석 만을 두 마리 사자로 환치시킨 형태이다.
다른 부분이야 여느 석등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수준이요 솜씨지만, 안정성을 생각한 듯 통돌을 다듬어 복련석 위에 일으켜 세운 사자는 아무 데서나 눈에 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도대체 우리나라에는 살지도 않을 뿐더러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사자라는 짐승을 일으켜 세워 화사석을 받치게 한 발상부터가 절묘하지 않은가.
게다가 석등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두 마리 사자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강인함은커녕 어딘지 모를 여유로움과 장난기조차 느껴지니 이 또한 우리네 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사실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알맞게 벌린 두 발로 다부지게 버티고 서서 가슴과 두 팔을 맞댄 채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는 사자는 균형과 비례가 아주 정확하다. 등 뒤로 늘어진 갈기, 잘록한 허리의 묘사도 충실하다.
그러나 역시 석등을 조각한 장인의 의도는 사실의 묘사보다는 해학의 강조에 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 복스럽게 등 뒤로 올라붙은 탐스런 꼬리, 토실토실한 두 다리는 이 사자를 사자이되 귀여운 강아지처럼 보이게 한다.
적절한 압축과 생략과 왜곡을 통해 ‘우리의 사자’를 창조하고 있으니, 저 유명한 미륵반가사유상이 보여주는 이상적 사실미 혹은 사실적 이상미의 아련한 모습이 여기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이 사자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드러나지 않는, 따라서 조각이 치밀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닳고 닳아 그리 보이기도 하겠지만 애초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떤가? 지금의 모습으로 표현할 것은 다 표현하여 부족함이 없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원래 완벽에 대한 무관심도 우리 한국미의 한 특질이 아니던가.
<쌍사자 석등 얘기>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쌍사자석등이 세 개 있다.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중흥사터 쌍사자석등(국보 제103호), 그리고 영암사터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높이 2.31m)이 그것이다. 어느 것이나 뛰어난 걸작이다.
그 가운데 중흥사터 쌍사자석등이 특히 빼어나다. 오랫동안 덕수궁과 경복궁 안에 서 있다가 지금은 제 고향에 가까운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이 석등을 두고 고고학자이자 미술사가였던 김원룡 선생은 이렇게 평했다.
인도 사성수(四聖獸: 석가모니의 상징=사자, 말, 양, 코끼리)의 하나인 사자가 불교 관계 기념물에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며, 인도·중국 할 것 없이 불교미술에 많이 쓰이고 있지만, 두 마리의 사자를 맞세워 석등의 화사(火舍)를 받들게 하는 착상은 신라인들의 발명이고 신라 영토 내에서만 행사된 신안특허이다.
대리석이나 사암에 새긴 날카롭고 괴이한 중국·인도의 사자에 비하면, 화강암에 새겨진 신라의 사자는 토실토실한 발바리같이 귀엽다. 석등 각 부의 완전한 조화, 탁월한 조기(彫技), 모두 빈틈없이 세련된 것이어서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동심의 세계- 이 친밀감과 인간미와 목가적인 낙천, 허식·집착을 잊어버린 천생의 해탈이 고금을 통하는 한국미의 척추인지도 모른다.
그대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에 대한 감상으로 들어도 전혀 어긋남이 없는 말이겠다. 선생은 그 글의 말미를 이렇게 맺고 있다.
어디 산사의 고요한 뜰에 있으면 얼마나 예쁘련만, 서양인이 지은 석조전(石造殿)의 배경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 석등이 덕수궁에 온 후로 수많은 사람이 그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보고 있으면 사자를 껴안기도 하고 교사가 지휘해서 개석(蓋石) 위로 아이들을 올려 세우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신라의 사자에게 물리면 어디서 치료하려는지.
- 김원룡, 『한국미의 탐구』
다행히 영암사터 석등은 제 태어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더구나 일본인이 가져가려는 것을 되찾아 제자리에 세우기까지 몇 차례나 옮겨다니는 와중에 그만 다리가 잘리는 상처를 입었다. 수술을 잘해 지금은 별 표가 나지 않지만 이래저래 마음이 상해 사자가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금당터
쌍사자석등 뒤로 전개되는 건물터가 금당터이다. 기단과 사방의 계단, 그리고 주춧돌들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기단은 지대석을 돌리고 그 위로 퇴물림하여 커다란 안상(眼象)이 새겨진 면석을 올린 다음, 다시 덮개돌을 면석 밖으로 내물리도록 덮어 마감한 형태이나, 덮개돌은 없어진 부분이 적지 않다.
뒷면을 제외한 동·남·북 삼면의 면석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한 마리씩 동물을 돋을새김하였다.
사자로 보이는 이 짐승들은 고개를 홱 젖혀 제법 당찬 기세로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송곳니를 내민 채 눈웃음치며 우리를 마주보기도 하며, 두 발에 턱을 고이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한데, 한결 같이 숱 많은 갈기와 북실 북실한 꼬리를 세우고 네 발과 배를 땅에 댄 채 편안한 자세로 엎디어 있다.
그 표정과 자세 어디에도 사나움이나 공격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점잖고 음전할 뿐이다.
계단은 기단 각 면의 중앙에 연결되어 있다. 뒤편을 뺀 나머지에는 비록 마모가 심하고 부러지긴 했을망정 소맷돌이 남아 있는데 그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앞뒤가 맞뚫리도록 새김질한 투각기법도 흔치 않지만, 그렇게 쪼아낸 무늬도 다른 소맷돌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것들이다.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난간 기둥을 등에 지고 구름 위를 나는 용이 새겨졌다. 한데 그 모습이 꼭 음관(音管, 또는 音筒)을 등에 지고 범종 꼭대기에 올라앉은 용뉴(龍鈕)를 닮아 퍽 흥미롭다.
양옆 계단에 조각된 것은 가릉빈가(迦陵頻伽, kalavinka)다. 가릉빈가는 사람 머리에 새의 몸으로 한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난다는 천상의 새이다. 그 새가 지금은 표정도 잃고 목소리도 잊은 채 두 날개를 활짝 펴 소용없는 날갯짓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영암사가 빛나던 시절, 용이 구름 위를 날고 가릉빈가가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계단을 오르면 서 있었을 금당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주춧돌들은 그 답을 알겠건만 예나 이제나 제자리에 박힌 채 말이 없다. 금당터 주춧돌은 군데군데 신방석과 고막이돌이 박혀 있는 낮은 것과 네모진 주추만이 높게 솟은 것, 두 가지가 남아 있다.
이것은 영암사의 금당이 같은 터에 전혀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두 번 이상 새로 지어졌음을 의미한다. 처음 지어진 금당을 받치던 것들이 좀더 너른 넓이를 차지하며 낮게 박힌 주추들이고, 다시 지은 금당의 주추들은 한층 좁아진 터에 솟아 있는 것들이다. 어느 것이나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에 가까운 건물이었으리라는 점 외에는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어떤 이는 영암사 금당이 목탑이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중층 이상의 건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네 군데 계단이 나 있는 점, 기단과 건물터의 평면이 정방형에 가까운 점, 기둥에 내진주와 외진주가 함께 서 있던 점들이 그 근거가 되겠다. 있을 수 있는 가정이긴 한데, 반드시 그랬는지는 역시 모를 일이다.
한가운데 H자형과 네모진 틀처럼 보이는 것은 불상이 자리했던 지대석이다. 바깥 지대석에는 돌아가며 팔부중상을 수놓았으나 지금은 뒤편에 남은 일부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왜, 언제쯤 처음 세운 금당은 없어지게 되었는지, 다시 지은 금당은 또 어떤 생김새였으며 무슨 까닭으로 자취를 잃게 되었는지, 이래저래 금당터는 우리의 상상만을 자극하며 비바람에 씻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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