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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충북

제천 덕주사

by phd100 2021. 2. 14.

 

덕주산성(德周山城)과 덕주사(德周寺)

 

1) 덕주산성(德周山城) :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둘레 약 2,000m. 현재 유구는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신라 경순왕의 큰딸 덕주공주(德周公主)가 피난하였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이 성은 월악산(月岳山)의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싸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羅城)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 요새지이기 때문에 이 성은 차단성(遮斷城)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대개 성벽은 화강암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으며, 성벽의 높이는 약 2m이다. 남문은 169㎝의 반원형의 홍예(虹霓)를 두고 있다.

문 안쪽에 가로빗장구멍이 바닥으로부터 52㎝ 위쪽에 있고, 문 좌우의 무사석(武砂石 : 네모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으로 쌓은 규모인데, 동문의 양식도 이와 비슷하다.

북문은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으며, 성벽과 수구의 흔적은 없어졌다. 이곳의 홍예종석(虹霓宗石)의 바깥면 중앙에 태극무늬가 돋을새김 되어 있어 주목된다.

 

성 남쪽에는 덕주사(德周寺) 옛터와 마애불상, 그리고 근처에 미륵사지(彌勒寺址) 등 고려시대의 유적이 있다.

1256년(고종 43) 몽고병이 충주를 공략하고 이곳으로 진격하자 관리들과 노약자들이 이 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강풍이 불며 우뢰가 울리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므로 적병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조선 말기 명성황후(明成皇后)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암투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산성이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중시되었음을 말해 준다.

 

2) 덕주사(德周寺)

충북 제천시(堤川市) 한수면(寒水面) 월악산(月岳山) 남쪽 능선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구전으로 587년(진평왕 9)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것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德周公主)가 마의태자(麻衣太子) 일행과 이곳에 들렀을 때 이 절을 세워 절 이름을 덕주사라 하고, 골짜기 이름을 덕주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때 지은 사찰은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 앞에 세워졌었는데, 6 ·25전쟁 때 훼손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사지에서 1.7km쯤 떨어진 곳에 1970년에 중창된 것이다.

 

당우(堂宇)는 법당과 요사채 뿐이지만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基)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는데, 이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덕주사에 승려가 많아져 절이 좁아서 새로이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나 목재를 어디론가 실어 날랐다. 뒤따라가 보니 지금 마애불이 있는 바위 아래였으므로 거기에 절을 짓고, 목재를 다 실어 나른 황소가 죽은 자리에는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약사전(藥師殿)

석조약사여래상의 보호각으로 근래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며 내부에 봉안된 약사여래상은 1983년 성주스님이 한수면 역리 마을 정금사지(淨金寺址)에 있는 불상으로 충주댐 건설로 그 지역이 수몰 예정되자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였던 것이다.

 

불상은 나발로 된 머리 꼭대기에는 낮고 작으며 둥그스름한 육계가 있으며, 상호는 밑으로 길게 표현되어 장방형에 가깝다. 두 눈썹은 코에 가깝고, 입이 작으며 콧날과 입술부분은 다소 손상되어 있다. 두 눈은 가늘고 길며, 이마에는 지름 2cm 정도의 백호공(白毫孔)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얼굴이 너무 큰 반면 양쪽 어깨는 작아서 움츠린 듯한 모습의 둔중함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양식으로 보아서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후기인 12~14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불상의 뒤로는 1991년에 조성한 약사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불정주범자문비(大佛頂呪梵字文碑)

1988년 2월초에 한수면 송계리에서 덕주골까지 도로확장 공사 중 월광사지 입구인 송계리 답(沓) 147번지 논둑에서 발견되었고 월악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덕주사 경내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첫줄에만 한자로 대불정주라 새기고, 다음 줄부터는 범자문으로 새기었는데 모두 11행이다. 각 행의 자수도 고르지 않고 범자로 새긴 부분은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4행까지는 8자, 5,6행은 7자, 7∼11행은 12∼13자로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글자 수는 모두 105자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월광사(月光寺)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광사는 원랑선사탑비(보물 제360호)가 있었던 곳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은 질이 떨어지는 화강암 자연석으로 세로 161cm, 가로 163cm의 방형을 이루는 자연석으로 모두 둥글다. 두께는 상단부는 30~40cm로 불규칙하며, 하단부는 28cm이다. 특히 하단부 바닥면은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여 비의 좌대 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범자문비는 조선금석총람에 4개가 소개되고 있다. 이는 모두 대불정다라니당이라는 동일 제호들로 모두 현재 휴전선 북방에 있다. 광주의 십신사지 범자비(광주시 유형문화재 제3호, 광주민속박물관 앞뜰 소재)가 이름대로 동국여지승람에도 범자비라고 하였으나 비신 상단부에만 범자의 옴(Om)자를 도안화하고 있을 뿐 비문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엄밀히 보아 범자비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한에는 이 송계리의 『대불정주비』가 사실상 유일한 '범자문비'라고 할 수 있다.

 

남근석(男根石)

월악산 정상은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예전부터 음기(陰氣)가 서린 산이라고 여겨졌다. 이 산을 달래기 위해 송계 덕주사에 남근석(男根石) 3개를 세워놓았는데, 일제시대 때 윗부분이 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래 이 남근석은 월악산의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세웠으나 후세에는 생남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다.

 

<덕주사의 전설>

아버지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된다.

일행은 그곳에서 야영을 하며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 밤 마의태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며,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億兆蒼生)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 함을 잊지 말라"고 현몽하였다 한다.

 

잠에서 깨어난 마의태자는 꿈이 너무 신기하여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간밤에 꾼 꿈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하고 두 남매는 계곡 물에 목욕재개 하고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배례 한 뒤 다음날 서쪽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된다. 일행이 서쪽으로 가며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일행은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며, 최고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아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다.

 

공주는 그대로의 삶, 불사에 전념하며 구도의 길을 걸음에 만족하였으나 왕권을 계승하지 못하여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동생인 덕주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금강산을 향해 떠난다.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져 혈혈단신이 된 공주는 출가하여 절에 몸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의 애틋한 부정을 그리워하고 오빠인 태자의 건승을 서원하며 일평생을 살았다 한다.

 

덕주사에서 다시 1.5Km쯤 더 걸어 올라가면 높이가 15m쯤 되는 커다란 바위에 암각 된 마애불이 있으니 이 마애불이 바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오누이가 조성한 것으로 이곳을 상 덕주사라고도 한다.

 

 

덕주사 마애여래입상(德周寺 磨崖如來立像)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전해지는 월악산 덕주사의 동쪽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거대한 화강암벽의 남쪽면에 조각한 불상은 전체 높이가 13m나 되는데, 얼굴부분은 도드라지게 튀어나오게 조각하였고 신체는 선으로만 새겼다.

 

민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솟아 있으며, 살찐 얼굴에는 눈·코·턱 등이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얼굴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거대한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三道)는 가슴 위에 선으로 조각하였다. 선으로 조각한 살찐 신체는 인체의 조형적 특징이 무시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축 늘어져 힘이 없으며 선으로 된 옷주름 역시 생동감이 떨어진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게 표현되었으며 양 발 아래에는 연꽃잎을 새겨 대좌(臺座)로 삼았다.

 

고려 초기의 거대한 불상 조성 추세에 힘입어 만든 것으로, 살찐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해진 조형수법과 입체감이 거의 없는 평면적인 신체 등이 특징이다.

 

거대한 암벽 남면(南面)에 조각된 이 마애불(磨崖佛)은 전체 높이가 13m나 되는데 얼굴은 고부조(高浮彫)로 조각하고 신체는 선각(線刻)하였다. 긴 눈, 커다란 코, 축늘어진 턱 등은 고려시대(高麗時代) 거상(巨像)에서 흔히 보이는 수법으로 비만(肥滿)한 얼굴의 특징을 뚜렷이 강조하고 있다.

 

선각된 신체는 평면적인 체구지만 괴량감이 넘치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늘어져 힘이 없지만 양다리의 동심타원형 의문(衣紋) 등으로 기하학적인 역동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있다. 암면에는 건물을 세웠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어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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