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사 寶鏡寺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중산리)내연산(內延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02년(진평왕 25)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지명(智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지명은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그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아현(海阿縣)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하였다.
723년(성덕왕 22)에는 각인(覺仁)과 문원(文遠)이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시주를 얻어 금당 앞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
745년(경덕왕 4)철민(哲敏)이 중창하였고, 1214년(고종 1) 주지 승형(承逈:圓眞國師)이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하고 종·경(磬) · 법고(法鼓) 등도 완비하였다.
1677년(숙종 3)에는 도인(道仁) 등이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695년 가을에 준공하였으며, 삼존불상과 영산전(靈山殿)의 후불탱화도 조성하였다.
그때 초한(草閑)이 시주를 얻어 금당을 중건하였고 관음전은 도의(道儀)가, 명부전은 석일(釋一)이, 응향전(凝香殿)은 국헌(國軒)이, 향적전(香積殿)과 국사전(國師殿)은 학열(學悅)이, 열반당은 신특(信特)이, 국사전 정문과 사천왕각 및 식당은 비구니 총지(摠持)와 신원(信遠)이, 팔상전은 지총(志聰)이, 종각은 영원(靈遠)이 각기 분담하여 중건, 중수하였다.
또한, 그와 동시에 도인은 청련암(靑蓮庵)을 창건하고 탁근(卓根)은 서운암(瑞雲庵)을 창건하였다. 1725년(영조 1)성희(性熙)와 관신(寬信)이 명부전을 이건하고 단청하였으며, 성희는 괘불을 중수하였는데, 이때의 사세가 가장 컸다고 전한다.
1916년부터 1922년까지는 장욱(壯旭)이 많은 사재를 내어 전당(殿堂)과 탑을 중수하였고 홍수로 파손된 제방을 쌓았으며, 교량을 시설하고 전답을 사찰에 헌납하였다.
1917년 10월에는 태인(泰仁)이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대웅전과 상지전(上持殿)을 중수하였으며, 1975년 이후 약간의 단청불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보현보살을 모신 대적광전,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자를 탄 문수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모셨고, 16나한 등을 배열한 영산전, 석가모니의 팔상시현(八相示顯)을 나타낸 팔상전이 중심 당우로 자리잡고 있다.
이 밖에도 명부전·산신각·원진각(圓眞閣)·일로향각(一爐香閣)·동로각(東爐閣)·누각·수월당(水月堂)·천왕문·일주문·원진국사비각·설산당비각(雪山堂碑閣)·창고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52호로 지정된 보경사원진국사비와 보물 제430호로 지정된 보경사부도가 있으며, 조선시대 숙종이 이곳의 12폭포를 유람하고 그 풍경의 아름다움에 시를 지어 남겼다는 어필의 각판이 있다.
그 밖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오층석탑, 경상북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있다. 부도로는 동봉(東峯)·청심당(淸心堂)·심진당(心眞堂) 등 11기가 있다.
현존하는 산내암자로는 동쪽 50m 지점의 청련암과 서쪽 100여m 지점의 서운암, 보경사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는 문수암(文殊庵)과 보현암(普賢庵)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이 절의 주변에는 상태사(常泰寺)·성도암(成道庵)·계조암(繼祖庵)·내원암(內院庵)·대비암(大悲庵) 등의 유지가 있다.
<원진국사 비>
보경사 경내에는 작은 전각이 하나 자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비 일점이 서 있다.
바로 이곳 보경사의 주지를 맡기도 했던 원진국사비이다. 원진국사비는 보물 제25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는 보물 제430호로 지정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 놓은 보경사 부도탑이 자리하고 있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원진국사는 51세로 입적을 하였는데 고종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문에 적힌 내력은 원진국사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비의 비문은 추밀원 우부승선 시국자감 대사성인 이공로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 대관서승 겸 보문각 교감인 김효인이 교칙에 의해서 썼다. 비문에 적힌 원진국사의 행적에 보면 3세 때 고아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스님의 휘는 승형이요, 자는 영회이며, 속성은 신씨이다, 상락의 산양 출신이다. 선대는 대대로 유가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통한이니, 이〇〇 내급사로 있다가 금성군수로 부임하여 재임 중에 순직하였고,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 연고로 스님은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 광한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7살 때 운문사 연실선사를 은사로 하여 절로 들어갔으며, 13살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 희양산 봉암사 동순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다음 해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 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비구계를 받아야 출가한 스님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 전에는 사미승이라고 하여 공부를 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원진국사가 13세에 출가를 했다는 것은 바로 비구계를 받은 날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로 절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7세 때 부터이다.
보물 제252호 원진국사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비 몸돌의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서봉사지 현오국사비도 이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진국사비는 넓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거북받침돌의 용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이 용은 용의 첫째아들 비희(贔屓) 일명 패하(覇下)이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탑비의 크기는 183cm 너비 104cm, 두께 17cm로 용머리에 이수가 없으며,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라는 제액이 있다. 해서체로 쓰인 이 비는 원진국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명 스님과 팔면경 (내연산·보경사 전설)>
신라 지명법사는 중국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진평왕 7년(585) 진나라로 가는 사신들과 함께 불법 수학의 길에 올랐다.
사신들과 동행했기에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지명 스님은 당시의 고승대덕과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면서 경·율·논 삼장을 깊이 연구하고 익혔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지명 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인가받기 위해 양자강 건너 북쪽 하남성 낙양에 자리한 중국 최초의 창건 사찰 백마사에 다달았다.
"음, 과연 명찰이로구나!"
고색창연한 백마사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순간 지명 스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처음 가본 그 절 부처님 앞에서 마치 감회에 젖은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렀는지 그 이유를 지명 스님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감격스런 참배를 마친 지명 스님은 백발이 성성한 주지 스님을 친견하고 찾아온 동기를 밝혔다.
"음, 계림국에서 불법을 구하러 왔다고? 참으로 오랜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마총의 임자가 왔도다."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를 굴리며 인사를 받은 노승은 알 수 없는 말을 혼잣말처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따라오시오"
지명 스님은 영문을 모르는 채 노승을 따라나섰다.
노승은 길을 걸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해진 것은 인도의 마등 과 법란 두 스님에 의해서였소.
그때 그 스님들은 석가모니 불상 한 분과 불경 그리고 12면 8면경을 백마에 싣고 왔는데 애석하게도 백마는 중국에 도착 후 자기 임무를 다했다는 듯 명을 다했소.
두 스님은 백마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중국 최초의 사찰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백마사라 불렀고 그 무덤을 백마총이라 명했지.
지금 우리는 그 백마총으로 가는 길이오."
이야기를 들으며 한 5리쯤 걸으니 곱게 단장되어 있는 무덤 하나가 보였다.
"저 무덤이 바로 백마총이오."
지명법사는 백마총에서 삼배를 올리고 백마총 비문을 읽어 내려갔다.
[여기 잠자는 백마는 속세의 인연으로 서천 중인도에서 말의 몸을 받았으나 그 지혜가 뛰어났다.
불상과 불경 싣고 10만 리 길을 거쳐 진단국에 도착하여 목숨을 마쳤다.
그 공덕으로 축생의 몸을 받지 않고 세세생생 정토에 태어나 동진 출가하여 선지식이 되고 중생을 교화 제도하여 마침내 최정각을 이룰지니 이 얼마나 거룩하고 장엄한 원력인가!
그 빛은 진단국과 해동에 널리 비출 것이다.]
비문을 다 읽은 지명 스님은 노스님의 설명없이도 지명 자신이 전생에 백마였으며 이제 인연이 닿아 다시 오게 됐음을 깨닫고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그때였다. 노승이 주장자를 세 번 치더니 벽력 같은 소리로 외쳤다.
"오늘 백마총 임자가 여기 왔으니
호법신령과 신장은 그 법보를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노승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백마총 옆 땅이 갈라지면서 돌상자 하나가 솟아올랐다.
"지명수좌! 저 석함을 열어 보게."
석함은 종잇장처럼 가볍게 열렸다. 뚜껑 뒷면에는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동국 조선 해뜨는 곳 종남산 아래 백 척 깊은 못이 있으니 그곳이 동국 명당이다. 그곳을 메워 이 8면경을 묻고 법당을 창건하면 만세천추에 불법은 멸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그곳에 태어나 인연을 지어라 이 수기를 마등 · 법란 두 도인에게서 받았다.… 다시 해동의 사문이 되어 이곳에 와서 8면경을 갖고 해동에 돌아가 대불사를 일으켜서 세세생생 불법이 흥하여 정토를 이루게 함이다. 일조 근지.]
지명 스님은 450년 전 백마사 주지였던 일조 스님이 자신의 전생이었으며, 그 전생이 백마였음을 거울 보듯 재삼 확인케 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석함 속에서는 8면경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 지명수좌는 이 8면경을 잘 호지토록 하라."
지명 스님이 8면경을 받아 지니자 석함은 저절로 땅 속으로 사라졌다.
"이 8면경은 비록 돌로 다듬어졌지만 보배스런 거울이니 8면보경이라 부르라."
노승은 8면보경을 8정기의 뜻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삼라만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8면보경은 인간의 마음을 비출 것이니 지극히 호지할 것을 당부했다.
이렇게 이른 후 노승은 "이제 나는 할일을 다했으니 이 몸을 버려야 할 때가 왔구나."하면서 좌탈입망에 들었다.
노승의 49재를 마친 지명 스님은 백마사에서 주는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장안에 도착하여 고승대덕을 친견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실로 20년만에 귀국하니 진평왕과 조정대신은 크게 환영했다.
지명법사는 낙양 백마사에서 호지하고 온 8면보경에 대해 진평왕에게 세세히 고하고 대불사를 일으킬 원력을 밝혔다.
"참으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일이오.
수십 만 리 만경창파를 헤치고 보경을 계림국에 모셔 온 호법인연이 과인에게도 주어진 것을 심히 영광으로 생각하며 곧 대작 불사를 일으킬 것을 삼보전에 맹세합니다."
이리하여 왕은 지명법사와 함께 신하 10여 명을 대동하고 해맞이 앙일〔仰日〕 고을로 출발, 동해안에 이르렀다.
일행이 명당자리를 찾고 있을 때 문득 하늘을 쳐다본 지명법사가 구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보살 모양의 오색구름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명당을 찾을 것입니다."
구름은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 내연산에 머물렀다.
1만2천 봉에 12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계곡에는 평원처럼 고요하면서 넓은 연못이 있었다. 일행은 일제히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 바로 8면보경을 모시고 금당을 세울 성역인가 합니다."
"과인도 그렇게 생각되오."
왕과 일행은 모두 기뻐하고 환희에 들떴다. 곧 연못을 메우고 그 중앙에 8면보경을 봉안한 후 대가람이 완성되니 그 절이 바로 원진국사 · 원각국사 · 오암대사 등 호국 승장과 고승대덕을 배출한 보경사다.
'여행-경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칠곡 송림사 (0) | 2021.04.17 |
---|---|
경주 흥륜사터 (0) | 2021.03.15 |
구미 금오산 약사암 (0) | 2021.02.14 |
울릉도 독도전망케이블카 (0) | 2020.11.30 |
울릉도 약수공원 안용복기념비 (0) | 2020.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