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송림사
경북 칠곡에 위치한 송림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승려 명관이 중국 진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해 처음 절을 지었다. 경내 5층 전탑은 한국에서 몇 기 되지 않는 전탑 가운데 하나다.
주불전인 대웅전의 초창 시기는 정확히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657년(효종 8)에 대웅전에 목조삼존불좌상을 봉안하면서 기록한 「팔공산 송림사 대웅전 불상조성 이필봉안기(八空山松林寺大雄殿佛像造成已畢奉安記)」가 있어 1657년(효종 8)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775년(영조 51)에 작성된 「대웅전 중수기(大雄殿重修記)」와 1850년(철종 1)에 작성된「칠곡송림사 대웅전 중수상량문(漆谷松林寺大雄殿重修上梁文)」이 있어 해당 시기에 중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송림사는 팔공산 서남쪽 끝자락.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동명저수지에 발을 담근 형세로 송림사는 자리하고 있다.
나즈막한 앞산 너머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경북대병원역이 자리하고 있으니 대구 근교의 절이다. 그래서 우리 이웃에 있는 절이다.
절 앞을 지나는 길을 두고 개울 건너에 널찍한 우회도로가 건설돼 팔공산 순환도로와 연결된다. 그래서 송림사를 저만치 바라보기만 하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니 송림사를 찾으려면 일부러 마음을 내야 하는 절이다.
그런데 이 절이 엄청난 보물을 지닌, 절 자체가 보물덩어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송림사는 창건 당시만 하더라도 불국사나 법주사와 같은 규모와 위상이었다고 주지 혜성 스님은 설명한다.
송림사 ‘대웅전’ 현판이 불국사 대웅전과 법주사 대웅보전 현판 글씨와 함께 다 같은 조선 숙종의 친필이라는 주장도 그 증거 중 하나이다.
가로 366, 세로 160cm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대웅전 편액은 4장의 판자를 가로로 이어 붙여 만들었다.
송림사의 규모가 지금보다 엄청나게 컸을 것이라는 사실은 대웅전 현판 크기뿐 아니라 보물 제1605호로 지정된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에서도 확인된다. 수미단 위에 모셔진 삼존상은 석가와 문수ㆍ보현보살상인데 본존불의 높이가 277cm나 된다.(좌대에서 높이가 3m90㎝) 조선 효종 8년 향나무로 조성된 목불 중 전국적으로 그 크기가 최상위급이다.
또 큰 불상임에도 신체비례가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형태를 보여준다. 당당하고 근엄한 표정에 잔잔한 미소를 띤 단순 하면서도 강력한 느낌을 주는 등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설법전 뒤 넓은 대웅전 앞마당의 보물 189호인 5층 전탑은 수수한 외양과는 달리 엄청난 유물을 간직하고 있으니 송림사의 보물 중 보물이기도 하다. 처음엔 국보였으나 1959년 해체해서 유물을 국가가 중앙박물관으로 옮기면서 보물(189호)로 격하됐다는 송림사 측의 주장이다.
석탑이 대부분인 우리나라 사찰에서 구운 벽돌로 쌓은 전탑은 그 자체가 희소한데 다 송림사 5층 전탑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이 탑은 높이 16.1m, 기단폭 7.3m로 금동상륜부가 온전히 보전돼 있다.
해체 복원 당시 5층 전탑의 모든 층에서 보물이 쏟아졌다.
당시 언론 보도와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 진신사리 4과가 청유리병에 봉안되어 있었고 연꽃무늬 순금 사리감과 청자 사리감, 옥지금엽보리수, 은귀고리 17개, 나무구슬 1개, 청옥 백옥 수정 유리 등 옥구슬 26개가 나왔다고 한다.
특히 신라의 기술로 만든 금동 사리감과 서역에서 건너온 유리 사리병은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귀한 유물이다. 유물들은 한때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현재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불국사 석가탑의 유물들을 보면 송림사 5층 전탑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과 거의 비슷하다. 이것으로 송림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출토유물 가운데 진신사리는 탑에 다시 봉안되었다고 전하나, 사찰 측에서는 초기 발굴한 수장고에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탑을 해체했을 당시 전탑을 다시 반듯하게 복원해놓고 사리와 사리기를 가져가야 했으나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할 때였고 국가가 제대로 챙기지 못했 던 것이다. 그러나 5층 전탑에 진신사리 4과를 다시 봉안하고 있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대웅전 앞에는 오층전탑의 2층에서 발견된 석조 거북 사리함이 놓여 있다. 거북석함의 뚜껑이 도난을 당해 지금은 모조 뚜껑이 대신하고 있다.
국가가 제대로 챙기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는 또 있다. 대웅전 앞뜰에 앉아있는 돌거북은 전탑 2층 해체과정에서 나온 가구형 사리함과 금동제 수형장식구가 담겨 있던 사리함이다. 그런데 그 뚜껑이 몸체와 색깔이 다르다.
이는 1980년대 절에 도둑이 들어 방치되어 있던 돌거북의 뚜껑을 훔쳐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송림사의 명부전은 그 규모가 국내 사찰 중 제일 크다. 사람이 죽으면 심판하는 염라대왕 등 10명의 왕들이 각기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는 명부전에는 금강역사가 양측에서 문을 지키고 서 있고 중앙에 지장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송림사 명부전의 석조 삼장보살좌상은 국내 유일의 조선후기 석조불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송림사는 그 위치 때문에 수많은 화를 겪어야 했으니 명운이 국가와 부침을 같이한 것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창건된 송림사는 1235년 몽골의 침입으로 전탑만 남고 몽땅 불탔다가 중건됐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됐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인 1686년 숙종 때 기성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송림사 인근에 기성리가 있고 한자까지 같은 것도 기성대사와 송림사의 영향력을 말해 주는 한 증거가 되고 있다.
2009년 보물 1606호로 지정된 석조 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에 모셔져 있다가 이곳 삼천불전에 임시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2012년 12월17일 새벽에 괴한이 송림사 삼천불전에 침입해 아미타여래좌상 옆에 있던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을 고의로 넘어뜨려 훼손한 사실이 CCTV로 확인되기도 했다.
또 2008년에는 설법전이 불에 타 재건하는 등 송림사는 예부터 크고 작은 병화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사찰과 지역민이 함께 위기를 극복해 왔다.
최근 들어서야 사찰 규모를 갖춰가고 있는 송림사는 그러나 1970년까지만 하더라도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5층 전탑이 전부 였다고 한다. 절 앞마당도 민간인 소유였으니 대웅전 옆에 소를 매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찰 측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상당수의 사찰 소유 전답이 주변 지역민들에게 등기이전됐으나 매매 이전 절차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 동일당 벽봉대종사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찰 주변 전답을 매입하기 시작하면서 2008년 성덕스님까지 불사가 꾸준히 진행됐다.
송림사 돌담은 당시 벽봉 스님께서 개울가 돌을 하나하나 지고 와서 쌓아 올린 것이다. 드디어 혜성 스님 대에 이르러 지금의 사찰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건립 당시의 모습을 찾기까지 송림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금도 돌담으로 정갈하게 울타리 쳐놓은 사찰 경계 100m 밖 밭 가운데에 당간지주가 버젓이 서 있고 사찰에서 200m 떨어진 인근 상가 밖에 절을 중건한 기성대사비와 부도들이 자리 잡고있는 것이 그 증거다. 심지어 인근 논밭에 사찰 주춧돌이나 기와 조각이 나오기도 한다.
송림사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보물이 숨겨진 사찰이다. 지역의 역사이며 조상의 지혜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송림사를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의 보물을 마음속에 챙겨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송림사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도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도덕암은 지금은 동화사 말사지만 옛날엔 송림사 말사였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만나는 암자는 멀리 송림사와 동명저수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절까지 올라가는 가파른 숲길의 풍광과 저수지의 새벽안개, 절에서 내려다보는 저녁노을이 도덕암의 맛과 멋을 한껏 느끼게 만들어 준다.
도덕암은 특히 나한전이 유명한데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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