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흥륜사터>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사적 제15호 옛 흥륜사터가 있다.
흥륜사는 불교가 공인한 뒤 최초로 544년에 세워진 절로서, 이차돈이 순교한 뒤 불법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신라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시되었던 사찰이었으며, 왕실의 비원을 간직한 사찰이기도 하였다.
신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절이며, 금당에 신라 10성을 모셨던 절이다.
신라 10성은 아도(我道)화상, 위촉(厭觸,이차돈),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 표훈(表訓), 사파(蛇巴,사복),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을 가리킨다. 특히 원효대사는 682년경 흥륜사에 주석하며 『화엄경소』를 썼다.
흥륜사의 시작은 신라 13대 미추왕(재위262∼284) 3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아도(阿道)화상이 고쳐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공주의 병이 낫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소원을 묻는다. 아도 화상은 대답하길, “빈도(貧道)에게는 아무 구하는 일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 이곳 흥륜사 터)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빌기를 바랄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왕이 허락하였다.
천경림은 전불(前佛)시대 일곱 가람터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아도화상 그는 매우 검소하여 억새를 얽어 움막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불도를 강설하면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아직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한참 이전이어서 흥륜사는 미추왕 이후 바로 잊혀졌다. 신라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때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에 의해 불교가 크게 전파되었고, 이차돈 순교(527년) 이래, 비로소 국가적 사업으로 흥륜사를 창건한다.
23대 법흥왕 14년(527) 천경림에 터를 닦고 22년(535)에 크게 공사를 시작하여, 24대 진흥왕 때인 5년(544)에 완공하여,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 하였다.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혹은 대흥륜사(大興輪寺)라 불러기도 했다.
절이 완공된 뒤 진흥왕은 그해 3월 백성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고, 스스로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받고 법의(法衣)를 입고 흥륜사에서 임종(臨終)하였다.
이후 흥륜사는 나라의 대표사찰로,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이 되었다.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初八日)에서 15일까지 서울(경주)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했다고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金大城)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도 흥륜사였고, 김현(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은 곳이다.
또한 원효대사 당시 활동하며 선덕여왕(善德王)의 병을 치유한 밀본(密本)법사와 김양도(金良圖)의 이야기나, 미륵선화의 이야기(말미에 기록), 그리고 경명왕 5년(921)에 제석천이 하늘에서 내려와 열흘간 머물렀다고 하는 공간도 흥륜사이다.
처음 흥륜사를 창건한 아도(阿道)는 특정 승려의 법명이라 아니라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나 아두삼마(阿頭??) 즉, ‘삭발한 사문’을 지칭한 말이다.
묵호자(墨胡子) 역시 ‘먹물 옷을 입은 외국인’으로 생소한 복장을 한 사문을 가리킨다.
승려의 복장을 분소의(糞掃衣)라고 하는데, 이는 헌옷의 조각 조각을 기워 모아 먹물로 색깔을 지워 만든 옷이기에 납의(衲衣)라고도 한다.
이처럼 외형상의 특징으로 사문을 통칭하여 불렀던 것은, 그만큼 생소한 복장의 삭발사문을 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기사에서는 어떤 아도(까까머리) 혹은 묵호자(얼굴 검은 이방인)란 말로 승려를 통칭했던 것이다.
때문에 언뜻 같은 이름의 동일인이 서로 다른 시대에 여러번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승려를 아도 혹은 묵호자로 통칭했듯이, 이들이 머물렀던 곳도 모두 모례 혹은 모록의 집으로 통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삼국유사』에,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의 이름은 사씨인데 아도에게 와서 승려가 되어 역시 삼천(三川) 갈래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13대 미추왕(未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해치려 하므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토굴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문을 닫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중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오자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 혹은 모록毛綠)가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편안히 있게 했다.”
“21대 비처왕(毗處王; 炤知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등의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굳이 이를 길게 언급한 것은 최초로 흥륜(興輪)하여 첫 새벽(元曉)을 맞이하기까지에는 긴 세월 이름 모를 아도화상과 모례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옛 흥륜사 오당(吳堂)에는 김양도가 모셨다는 아미타불 존상과 좌우 보살(菩薩)을 소상(塑像), 금으로 그린 벽화가 있었다.
또한 금당에는 신라 10성의 소상을 모셨다. 진지왕(眞智王) 때의 흥륜사 승려 진자(眞慈)가 항상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만나길 발원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오당과 별도인 금당이 있었고 여기에는 미륵존상을 모셨으리라 본다.
금당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낭무(廊?)가 있었고, 왼편에는 제석천이 머물렀던 경루(經樓)와 보현보살를 그린 벽화가 있었다.
진흥왕 26년(565) 진(陳)나라에서 1,700여권의 불경(佛經)논(論)을 보내왔다고 하는데, 그것을 흥륜사 경루에 보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남쪽에는 연못과 탑이 있었다.
오늘날 흥륜사터에는 석조(石槽)와 배례석(拜禮石) 등이 남아 있고, 출토된 유물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인면문(人面紋) 와당은 미소짓는 얼굴(신라천년의 미소 수막새)을 기와에 조각한 것으로, 일제 강점기 반출되었다가 1972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흥륜사터의 면적은 3200여평이며, 현재 흥륜사의 위치는 경주 오릉(五陵)의 북쪽 논밭과 민가를 포함한 지역이다.
이 절터는 1910년경에 우연히 금당터로 보이는 토단(土壇)과 석조(石槽)와 석불(石佛) 등이 발견되고, 당시 이곳의 속명(俗名) 등을 참작하여 흥륜사의 터로 추정하였다.
금당지는 민가 뒤뜰의 감나무밭이 되어 있었으나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1972년과 1977년 6월에 흥륜사지 발굴작업이 실시되어, 금당지 부근 일부를 조사하였다.
[그런데 이곳(현 흥륜사지라고하는 곳)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된 바 있기에, 선덕여왕 때 창건한 영묘사 터로 보고, 여기서 북쪽으로 80m 떨어진 경주공업고등학교 학교부지가 큰 절터임이 밝혀져 그곳을 흥륜사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80년대에 흥륜사터 옆에 새로 중건한 흥륜사에는 천경림선원(天鏡林禪院)이 있고,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에 힘썼던 비구니 원로이신 혜해(慧海) 스님이 조실로 있다.
<도승 밀본(密本)법사와 김양도의 설화>
귀신을 쫓아낸다는 신라의 밀본 도승 이야기로, 신라 선덕여왕(신라 최초의 여왕)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아도 소용이 없자 흥륜사의 법척 큰 스님을 불렀으나 온갖 경을 다 읽고 처방했느나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신라에는 밀본법사라는 신통력 있는 도승(道僧)이 있었는 데, 그래서 신하들은 그 밀본 도승 법사를 궁궐로 불러들여 여왕의 병을 고치게 했다.
밀본법사가 약사경 읽기를 끝내자 법사의 지팡이가 여왕의 침실 안으로 날아들더니 한 마리의 붉은 여우를 찔러 뜰아래로 내동댕이 치는거였다.
그 바람에 여왕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이후로 그 깊던 병이 꾀병처럼 다 나아지고 마는 거였다.
<김양도(金良圖)의 설화>
밀본도승 얘기 이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승상 김양도가 어릴 때 얘긴데, 김양도가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김양도가 가만히 보니 큰 귀신 하나가 작은 부하 귀신들을 거느리고 집 안으로 들어와 음식을 죄다 맛보는 것이었다.
또 푸닥거리를 하러 온 무당에게 달려들어 욕을 해대는 통에 무당도 쫓기듯 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양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양도의 아버지는 법류사(法流寺)의 스님을 불러 불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큰 귀신이 쇠방망이로 스님의 머리를 내리쳐서 스님은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양도의 아버지는 그때서야 비로소 밀본법사를 모셔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귀신들은 이 말을 듣고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데, 그때 밀본 법사가 온다고 하자말자, 갑자기 대역신들이 나타나 귀신들을 꽁꽁 묶고 또 수많은 천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밀본 법사가 도착하였다. 그러자 양도는 그 자리에서 바로 병이 나아 붙었던 입이 떨어지고 굳었던 몸이 풀려져 그동안 일을 자초지종 얘기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양도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흥륜사 미륵존상과 좌우의 보살상을 만들고 금색 벽화를 그려 넣는 등 일생 동안 부처님 받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밀본 법사에게 함부로 덤볐다가 큰코 다친 사람이 있었는 데, 밀본이 금곡사에서 수도할 때 있었던 얘기다.
김유신 장군의 일가친척 되는 수천이라는 사람이 심한 괴질에 걸려 고생을 했는 데, 유신이 이 소식을 듣고서 밀본에게 부탁해 진찰을 해 보도록 했다.
마침 수천의 친구인 인혜라는 승려가 거기에 와 있었는데, 인혜가 밀본의 꼴을 보니 무슨 능력있는 중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어 보이므로 비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생김새를 보니 간사한 사람이로군. 그런데 어떻게 남의 병을 고치겠단 말인가” 밀본이 “김유신 공의 명령을 받고 할 수 없이 왔지요”하고 조용히 대답하자 인혜는 더욱 기가 살아서 신통력을 보여주겠다며 향로에 향을 피우고 난 후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오색구름이 그의 머리 위를 떠돌고 하늘에서는 형형색색의 꽃이 흩어져 내리는 거였다. 그걸 본 밀본 법사는 “스님의 신통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저도 보잘 것 없는 재주나마 한 번 시험해보겠습니다. 스님은 잠시만 제 앞에 서 주십시오” 하고 그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인혜의 몸이 한 길이나 튕겨 올랐다가 머리를 땅에 거꾸로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밀본은 그대로 휑하니 나가 버렸다. 결국 인혜는 땅에 박힌 채 하룻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이튿날 수천은 김유신에게 부탁해서 제발 밀본이 인혜를 풀어달라고 사정했다. 밀본은 그제서야 인혜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크게 혼이 난 인혜는 그 후로 절대 재주를 자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설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있는 전설얘기로 삼국시대 불교가 번성하던 시절의 초월적인 도승(道僧)형의 이야기로 영남지역에서 유포되어 전해오는 얘기다.
이 전설 얘기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교훈은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은 있다는 것이고 그런 기적의 소유자라도 아래의 이미지에서 그 교훈을 찾아야 하고 절대 교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륵선화 설화>
신라 25대 진지왕(진흥왕의 둘째아들) 때 국선(國仙)인 미륵선화에 관한 설화. 영이설화(靈異說話)에 속하며, ≪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未尸郎眞慈師)에 실려 있다.
신라 진지왕 때 흥륜사(興輪寺)의 승려 진자(眞慈)가 늘 미륵상 앞에서 미륵불이 화랑(花郎)으로 화현(化現: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타 남)해 주기를 빌고, 또 자신이 미륵 화현의 화랑을 늘 가까이 모시고 지성으로 시중들 것을 발원하고 맹세하였는데 그 생각이 날로 더욱 간절해졌다.
어떤 날 꿈에 중이 나타나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의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진자는 그 절을 찾아가는 길 열흘 동안 내내 한 걸음 뗄 때마다 절을 하였다. 절에 이르자 문밖에 있던 곱게 생긴 소년이 진자를 맞아 객실로 안내하였다.
진자는 소년에게 “그대는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하고 물었다.
소년은 “나도 또한 경주 사람이라 스님이 멀리 오심을 보고 위로하고자 왔을 뿐입니다.”라 말하고 문밖으로 나가 자취가 묘연하였다.
진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절의 중들에게 꿈 이야기와 여기에 오게 된 뜻을 말하였다. 그리고 잠시 아랫자리에 머무르면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겠노라 하니 절의 중들이 명감(冥感: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감응함)이 많은 천산(千山)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길을 떠나 진자가 찬산 밑에 이르렀을 때 산신령이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곳에 오게 된 까닭을 물었다.
진자가 미륵선화를 보러 왔음을 말하니, 노인은 “앞서 수원사 문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또 무엇을 보겠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진자는 급히 흥륜사 본사로 돌아왔다. 진지왕이 진자를 불러 “소년이 스스로 경주 사람이라고 하였다면 성인의 말에 거짓이 없을 터인즉 경주 성안을 찾아보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진자는 무리를 모아 민가를 두루 찾았다. 영묘사(靈妙寺) 북동쪽 길가에서 얼굴이 예쁜 소년을 보고, 진자는 놀라며 “이 분이 미륵선화이다.”라고 말하였다.
소년의 이름은 ‘미시(未尸)’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성은 모른다고 하였다. 소년을 가마에 태워 대궐로 들어가 왕에게 보이니 왕이 그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화랑으로 삼았다.
소년은 화랑의 무리와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와 풍교(風敎 :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풍습을 잘 교화하는 일)가 비상하여 풍류로 세상을 빛내다가 7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진자는 소년 잃고 나서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한편, 그는 미시의 자비로운 혜택을 한 몸에 입고 그의 덕화를 계승하여 도를 닦더니 만년에 어디에서 일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미시(未尸)’와 ‘미력(彌力)’은 서로 비슷한 말로서, 서로 바꾸어 불렀다고 전한다. 고려 때까지도 신선을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불러 온 것은 바로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진자가 미시를 처음으로 본 길가에 있던 나무를 견랑수(見郎樹)라 하였는데,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또는 印如樹)라고 불렀다.
이 설화는 미륵에 관한 최초의 우리 기록으로서 신라 미륵 사상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미륵이 화랑(국선)으로 화현한다는 생각은 화랑 곧 미륵이라는 의식을 밑에 깔고 있다.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신라의 화랑도가 크게 떨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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