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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기

연천 재인폭포 설화

by phd100 2021. 3. 11.

<경기 연천>

재인폭포 설화

 

경기도 연천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하는 족족 다음 날 아침에 폭포에 빠져 익사한 채로 발견되는 일이 벌어진다. 흉흉한 소문이 퍼지자 아무도 그 고을의 사또로 부임하지 않으려 하는 와중에, 그해 장원에 급제한 젊은 선비가 특별히 임금의 명을 받고 신관 사또로 부임해 온다.

 

부임한 첫날 밤에 불을 켜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또의 앞에 소복을 한 원귀가 나타난다. 원귀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꾸만 폭포 쪽을 가리켜 보이다가 닭이 울자 사라졌다.

분명히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사또는 다음날 사람을 시켜 폭포 밑을 뒤지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나왔다. 여자는 소복 차림에 쪽진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또는 여인이 폭포 위에서 발을 헛디뎌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장례를 치러 주지만 그 후로도 원귀는 계속해서 사또를 찾아온다. 그러나 원귀는 사또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닭이 울면 도망치듯 물러난다.

 

말을 하지 못하는 원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사또는 여인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부검해 보고 여인의 혀가 잘린 것을 발견한다. 쪽을 진 머리에 죽을 때 이미 소복을 입고 있었으니 여인이 아마 남편의 상중에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사또는 여인이 혀를 깨문 것으로 보아 여인이 누군가에게 정조를 잃을 상황에서 혀를 깨물고 폭포 아래로 투신하여 자살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사또는 원귀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 근방에 고을 안에서 변사한 자가 있는지를 탐문하다가 한 줄광대가 구관 사또가 연 잔치 중 폭포에 줄을 매고 그 줄을 건너가다가 폭포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연은 한 줄광대의 아내를 탐낸 사또가 큰 잔치를 베풀고 폭포에 줄을 매 놓은 다음, 광대 재인에게 줄을 타고 폭포를 건너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광대가 폭포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미리 숨겨놓은 부하에게 줄을 끊어 버리도록 지시하였다.

이 같은 고을 원님의 흉계로 재인은 그만 폭포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 사또는 광대의 아내를 강제로 취하려 하였으나 이미 사건의 전말을 눈치 챈 광대의 아내는 사또의 코를 물어뜯고는 폭포 아래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 곳을 더 파 보니, 그 속에서 썩지 않은 한 남자의 시신이 나왔는데 그 손에는 끊어진 것이 아니라 칼로 자른 것이 분명한 줄 도막을 쥐고 있었다. 그제서야 구관 사또가 광대의 아내를 탐내어 광대가 줄을 타는 동안 줄을 끊어 버림으로서 광대를 죽인 것을 알게 된 사또는 광대의 시신을 여인의 무덤에 합장해 준다.

 

그들은 남사당패 시절부터 짝을 지어 줄을 타고 산받이를 하던 사이로, 아내는 여자를 받아주지 않는 남사당패의 규율 때문에 남장을 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탐욕스러운 곰뱅이 쇠에게 여자라는 것을 들키고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광대는 엉겁결에 곰뱅이 쇠를 죽이고 벌받을 것을 두려워 해 이 곳 연천으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그들은 마을로 도망쳐 와 마을 유지나 관아의 잔치 때 이따금 불려 나가 남편이 줄을 타고 아내가 산받이를 하곤 했는데, 이때 몇 번 아내의 아름다운 자태에 흑심을 품은 구관 사또가 광대를 죽이고 그 아내를 취할 계략을 꾸미고는 광대에게 폭포 위로 줄을 매어 무사히 건너가면 사람을 죽인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 주고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다.

 

광대는 아내와 떳떳하게 살고 싶은 일념으로 구관 사또의 제의에 응했으나 이미 구관 사또는 사람을 시켜 줄을 끊게하여 광대는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구관 사또는 그도 모자라 광대의 아내를 같은 자리에서 능욕하려 하였으나, 아내는 남편이 죽은 경위를 눈치채고 사또의 코를 물어뜯고, 스스로 혀를 깨물고는 폭포 아래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음으로서 정조를 지킨 것이다.

 

날이 밝자 사또는 조정에 구관 사또의 죄상을 밝히는 장계를 올리고 무당을 불러 진혼굿을 하게 한다. 그제서야 이승의 원한을 모두 다 푼 광대 부부는 무사히 승천하였고 향후로 고을에는 원귀가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이후 이곳을 “코문이”라고 부르다가 “고문리”로 바뀌고, 이 폭포를 광대 재인의 이름 따 재인폭포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