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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충남

부여 무량사

by phd100 2021. 3. 29.

 

무량사(無量寺)

충남 부여군 외산면에 무량사가 있다.

‘무량’(無量)이라. 셀 수 없다는 말이다.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곳은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바로 이곳 무량사이다.

무량사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걸으면 졸졸 흘러내리는 개울물 소리가 귓속과 마음속에 낀 세속의 먼지를 말끔히 씻어 내며 그대로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듯하다. 어느덧 숲속에 아늑히 자리 잡은 절집에 이르고 있다.

 

전란으로 크게 불탄 뒤, 17세기 초인 인조 때 대대적인 중창 불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탑 뒤의 극락전은 우리나라 건축물에서 보기 드문 2층 집으로, 조선 중기 건축물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무량사는 행정구역으로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지만, 무량사가 자리 잡고있는 만수산은 보령시 미산면과 부여군 외산면에 걸쳐 있다. 따라서 부여에서도 갈 수 있고 홍성과 청양에서도 갈 수 있다.

 

만수산(575m) 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9세기 때 범일(梵日)국사가 창건했고 신라 말 고승 무염(無染)대사가 머물렀다고 하나,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크게 중창된 듯하다.

절 마당 가운데에 있는 오층석탑과 석등이 그 때에 모셔진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크게 불탔는지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다.

주전인 극락전과 그 안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은 17세기 전반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조선 인조 때에는 술 잘 마시는 선승 진묵(震默)대사가 무량수불에 점안(點眼 : 부처상을 조성하거나 그린 뒤에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어 완성하는 작업)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고 호방한 시심을 펼쳤다는 말도 전한다.

 

절집에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문지기인 양 의젓하게 버텨 서 있는 당간지주를 먼저 만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정형화된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고려 시대의 것으로 본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주요 공간인 극락전 영역에 이른다. 그 한가운데에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고려 시대 석탑이 자리하고, 아울러 아담한 석등도 있다.

한가운데 듬직하게 앉은 2층 전각인 극락전이 있으며 그 밖에 석탑 옆쪽으로 500나한을 모신 영산전과, 명부전도 있다.

 

<범종각>

범종각에는 1636년에 조성한 조선 중기 범종이 자리 잡고 있다. 높이 1.11m로 단아한 이 범종에는 고대 인도글자인 범자(梵字)가 있고 유곽 사이에 삼존불이, 유곽 아래에는 패(牌)가 새겨지고 아래에는 당초문이 있어서, 매우 화려한 조선 시대의 종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산신각과 매월당>

극락전에서 왼쪽 뒤쪽으로 계류 하나를 지나면 숨은 듯이 있는 산신각에 이르게 된다. 이 산신각에는 특이하게도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니, 그가 이 무량사와 맺은 깊은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무량사 부도밭에는 그의 부도도 있다.

 

<오층석탑>

오층석탑을 마주하면 매우 장중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지막한 2층 기단 위에 매우 안정된 비례로 5층을 올렸는데, 밑변 5.2m의 널찍한 기단 위에 7.5m 높이로 올린 탑이라 안정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층층이 쌓아 올린 적당한 체감으로 불안하지 않은 상승감도 갖추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소박한 형태로 얹혀 있어 탑이 무거워지지 않고 깔끔한 마무리가 되게 하는 것에 한몫을 한다.

 

한편 너비는 넓고 기울기는 평평하다시피 완만한 지붕돌이라든지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루어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 주는 처마선 등은 부여 정림사터 탑을 그대로 빼닮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 탑 역시 고려 시대에 조성된 백제계 석탑으로 손꼽는다.

 

그런가 하면 지붕돌 처마 밑에는 빗물이 탑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절수구(切水溝)를 파놓아 세심한 배려를 볼 수 있다.

이런 수법은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 특징적인 것은 기단부의 면석받침과 갑석의 부연이다.

흔히 정연하게 깎은 돌을 놓게 마련이나 이 탑만은 전체적으로 돌아가며 모를 죽이고 반원형으로 부드럽게 공글려서 백제계 석탑의 부드러움을 한층 더 맛볼 수 있다.

 

보물 제185호인 이 탑에서 1971년에 탑을 보수할 때 5층 몸돌에서 청동합 속에 든 수정병, 다라니경(다라니경이란 범문(梵文)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적어 외우도록 만든 경전이다. 이를 독송하면 여러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각종 공덕을 받는다고 한다), 자단목(자다이란 콩과에 속하는 자색의 상록활엽수로 재목이 견고하고 아름다워 건축 및 가구의 재료로 쓰인다. 불가에서는 향으로 쓰인다. 자단목이란 자단의 재목을 가리킨다.), 향가루와 사리 등 사리장치가 나오고 1층 몸돌에서는 남쪽을 향하여 있는 고려 시대의 금동아미타삼존불이 나왔다.

 

<석등>

보물 제233호인 탑 앞의 석등도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상대석과 하대석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 화사석을 갖추고 있는 점 등이 통일신라 이래 우리나라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고려 초기 석등이다.

상대석이 좀 좁은 편이지만 기둥돌이 짧은 편이므로 오히려 그 덕에 전체적으로 둔중하지 않게 되었다. 또 팔각 화사석은, 네 군데로 난 화창은 넓고 그 나머지 면은 좁으나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팔각 지붕돌의, 좀 큰 듯한 추녀선도 탑에 견주어서는 매우 경쾌하다.

지붕돌 위에는 연봉오리 모양의 보주로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높이 2.5m로 탑과 비례를 잘 이루는 것으로 보아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무량사의 본전에 걸맞게 전각 명칭이 극락전이다. 곧 하나같이 다 이 절집이 극락세계임을 뜻하는 이름들이다.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탄 뒤 인조 때에 중창하였으니 이 극락전도 그때에 지은 것으로,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내 주어 보물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먼저 겉에서 보기에 2층 집인 점이 우리나라 여느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을 하고 있어 독특하다.

이러한 예는 오층목탑 형식인 법주사 팔상전이나 3층 전각인 금산사 미륵전말고는 화엄사 각황전 등에서나 볼 수 있으며 가까이에는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이 있다.

이처럼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 집들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通層)인 점이 공통된다. 따라서 이런 2층을 올린 것은 기능보다는 위엄과 장엄에 그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전 안은 천장까지 통층으로 뚫려 있으며 거대한 아미타삼존소조불이 모셔져 있다.

 

아래층은 앞에서 바라보아 5칸, 옆에서는 4칸이며 위층은 정면이 3칸, 옆면이 2칸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 문살은 가운데가 네 짝이고 점차 두 짝, 한 짝씩으로 줄었다. 칸살이 넓어 전체적으로 집이 평활해 보인다.

정면은 모두 창살문을 달았으며 2층 정면도 지금은 판자벽이지만 원래는 살문을 달아 집안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했던 듯하다.

다른 벽들은 모두 흙벽[土壁]이 아니고 나무판자를 대서 만든 판벽(板壁)이다. 이런 점은 평지가 아닌 산간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보기이다.

 

극락전의 1층 정면 가운데 칸에는 소슬빗꽃살창을 달아 건물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아미타삼존불>

불전 안에는 가운데에 아미타불(5.4m)이, 양쪽에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4.8m)이 있는데, 이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어깨는 당당하나 상호가 사실성 없이 평판적이며 옷주름 등은 도식성을 보여, 단순해져 가는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 준다. 본존불의 손이 매우 큰데 한 손은 올리고 한 손은 무릎에 내린 채 양쪽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구품인 중에서 중품중생인을 나타내고 있다.

 

보살상은 전대에 견주어 영락장식은 줄어든 편이나 보관이 매우 화려해지는 모습이 또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성을 내보이고 있다.

불상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문이 나와 이 불상이 1633년에 흙으로 빚은 아미타불임이 분명히 밝혀졌으므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예가 되었으며, 아울러 극락전 건물도 같은 시기에 지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미륵보살 괘불>

극락전 안에는 또 1627년에 그린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연대와 함께 혜윤, 인학, 희상이라고, 그린 스님들의 이름도 적혀 있어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세로 12m, 가로 6.9m의 큰 모시천에 그린 이 괘불은 가운데 모신 미륵보살의 광배를, 16화불들이 춤추듯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매우 아름답다.

미륵보살은 연꽃대좌 위에서 두 손에 연꽃을 들고 서 있으며, 녹색과 적색의 보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우리나라 전래 색감을 보여 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괘불은 사월초파일이나 다른 재(齋)를 올릴 때에 절 마당에 내어 거니 그때 볼 수 있다.

 

<산신각>

극락전에서 오른쪽 옆으로 돌아 뒤쪽으로 가면 작은 개울을 건너 산신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매우 호젓하게 나무숲에 싸여 있는 산신각에는, 여느 산신각처럼 가운데에 산신할아버지와 호랑이가 사이좋게 앉아 있는 그림이 걸려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가지가 더 있으니, 왼쪽 벽면에 걸린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의 초상화이다.

 

시대를 불우하게 만난 지식인의 냉소적인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한 영정이다.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김시습의 영정은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걸려 있다.

설명문은 그가 손수 그린 자화상이라지만 유리액자 안의 그 모습은 실물로보다는 그림을 사진 찍어서 걸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또 그 그림이 실제 김시습이 그린 것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다.

어쨌거나 김시습은 유리 덮인 액자 안에서 세상이 못마땅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위가 둥그런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림 속의 김시습은, 시대를 불우하게 만난 지식인의 냉소적인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김시습, 그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살해한 뒤 임금이 되었을 때 이러한 사실들을 비판하며 평생을 은둔한 분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 그 분이 바로 김시습 선생이다.

 

평생을 은둔한 김시습선생은 만수산 무량사에서 말년까지 머물다가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한때 조선시대 명승 진묵대사도 만수산 무량사에 거처했다고 한다.

 

<부도탑>

들어갈 때는 그냥 지나쳐 갔겠지만 나올 때에는 오른편 버섯 양식장 뒤편 언덕배기에 있는 부도밭을 놓칠 수 없다.

조선 시대에 번창했던 많은 절들이 그렇듯이 여기에도 이 절에 인연이 있는 스님들의 부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 이 절집의 내력과 사세를 말해 준다. 그런데 정작 거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이다.

 

조선 시대의 부도들이 대개 석종형이나 달걀형으로 간소화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 부도는 조선 중기에 세워졌으면서도 초기 부도의 모습인 팔각원당형을 하고 있는 점도 오히려 이채롭다.

높이 2.84m이며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대석에는 엎어진 연꽃이 도드라지고, 중대석에는 용 두 마리가 서로 얽히고 설켜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연꽃인 상대석 위의 몸돌은 아무 무늬도 없이 단정하여 대조적인데 지붕돌에 다시 팔각 귀꽃이 솟았다. 엎어진 연꽃이 지붕 위를 덮는 듯하고 그 위에 동글납작한 공모양의 돌이 얹혀 있으며 다시 지붕돌 하나를 얹은 듯한 모습이다.

 

이 부도가 일제시대에 태풍에 쓰러졌을 때 그 안에서 사리가 나왔는데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만수리 장승>

무량사 들목의 마을이 만수리인데 마을 당산나무 오른쪽에 장승을 모시고 있다. 흔히 ‘무량사 장승’이라고 부르나 사찰장승이기보다는 마을장승이다.

본래는 길 양쪽으로 벌여 섰던 것이나 찻길이 나면서 한쪽으로 모았고 시멘트로 단단하게 고정시킨 듯하다. 제자리에 있음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니 스스로 위로해야겠다.

 

만수리 장승은 꼭 밤나무로만 깎는다. 밤나무가 흔해서일 수도 있지 만 그보다는 단단하고 벌레가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휜 나무에 눈과 입은 일직선으로만 표시하고 가운데에 코만 오뚝하게 표시해서 조형적으로 매우 단순하나, 그 나름의 맛이 있다.

이 만수리 장승은 대개 다섯 분쯤이 함께 있는데 왼쪽부터 맨 오른쪽으로 갈수록 형체가 또렷해진다. 그것은 해마다 새로 깎은 분을 맨 오른쪽에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바람에 씻기고 나뭇결이 깊이 패이게 되면 자못 철학적인 느낌까지 준다.

 

<무량사 극락전 후불탱(無量寺極樂殿後佛幀)>

충남 유형문화재 제163호. 삼베 바탕에 채색. 아미타여래탱의 크기는 세로 680㎝, 가로 407㎝. 관음보살탱·대세지보살탱의 크기는 각 세로 585㎝, 가로 295㎝. 부여군 만수산 무량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었던 아미타후불탱화이다.

화기(畵記)는 없으나 1747년(영조 23) 화승 회밀(澮密) 등의 화원 집단이 주도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량사 극락전 후불탱과 삼장탱(三藏幀)이 화풍이 같아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삼장탱은 도밀(道密)·일운(一運) 등 7명의 화원이 1747년에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미타후불탱화와 삼장탱은 현재 박락이 심해 다른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불화는 아미타삼존, 즉 아미타여래탱, 관음보살탱, 대세지보살탱을 각각 독립된 화폭으로 구성하여 3존(尊) 3폭(幅)이 1조(組)를 이룬 대형 불화이다.

3폭에 등장한 불·보살상의 배치는 아미타삼존좌상을 중심으로 시립한 측면향의 6대 보살(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금강장보살, 제장애보살), 4대 제자,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신중, 타방불 등의 권속이 둘러서 있다.

 

여유 있는 공간에 건장한 아미타불과 늘씬한 보살상의 모습을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처리했는데, 때문에 아미타삼존은 화면을 압도하는 반면 다른 권속들은 조그맣게 묘사되어 있다.

 

삼베의 바탕색을 배경으로 자주색, 홍색, 옥색에 가까운 양녹색, 감색, 살색, 황색 등으로 투명하게 채색되어, 힘이 깃든 유려한 밑그림[草]의 필선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인다.

 

회밀이 주도한 이 무량사 후불탱은 ①아미타여래도 좌우에 관음보살도와 ②대세지보살도의 아미타삼존좌상, 또는 ③아미타여래도 좌우에 관음보살도와 지장보살도의 아미타삼존입상(14세기 작, 일본 미나미홋케지[南法華寺] 소장)을 배열하는 3존 3폭 형식의 고려불화를 따른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3폭 형식의 조선시대 아미타불화로는 대구 동화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1699년)을 들 수 있으나 불·보살이 등장한 아미타불화, 좌우로 독립된 화폭에 16제자,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을 배열한 것은 무량사 극락전 후불탱의 3존 3폭 형식과는 차이가 있다.

 

화승 회밀의 화풍으로서 주존불이 강조된 구도, 늘씬한 형태, 한 번에 그어진 능숙한 필선, 독특한 채색 수법 등에서 이 불화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아미타불의 머리는 부드러운 느낌의 감색이지만 관음보살을 비롯한 권속의 머리는 회색에 청색을 첨가한 듯한 독특한 색으로 채색되었다. 이처럼 전면적으로 호분이 배합된 중간색을 애용하여 파스텔 색조의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후불탱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3존 3폭 형식의 유일한 아미타불화로 자료적인 가치가 크다. 또한 현존 실내용 불화 중 가장 규모가 크며 특이한 혼합 안료를 사용한 채색기법은 조선 후기의 불교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학술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