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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기

안성 청룡사

by phd100 2021. 8. 8.

 

청룡사(靑龍寺)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1265년(고려 원종 6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년)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인평대군(麟平大君:조선 인조의 셋째아들, 효종의 동생)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바우덕이가 태어난 청룡골과 바우덕이사당, 바우덕이묘, 서운산, 칠장산, 미리내성지, 고삼저수지, 안성장, 삼일운동기념탑, 죽주산성 등의 관광지가 있다.

 

이곳 아담한 청룡사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듯한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품격을 갖추었지만, 청룡사의 가장 큰 볼거리는 한국의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대웅전 기둥들의 자유분방함이다.

절의 중심 전각인 대웅전은 부처님을 모신 엄숙한 건축물로 건물의 규모와 장엄이 다른 건물보다 장대하고 화려하며, 건물에 쓴 부재 또한 굴곡지지 않고 곧은 형태의 목재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청룡사 대웅전의 기둥이 여느 절의 대웅전과 다름을 볼 수 있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4칸으로 언뜻 보아서는 잘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팔작지붕의 건물처럼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무척이나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정겹고 아름다운 대웅전을 받쳐 들고 있는 기둥이 그것인데 이는 청룡사 대웅전에서 만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맛을 느끼게 한다.

 

비틀리고 꼬부라진 기둥들을 보노라면 당시 대웅전을 지을 만한 목재가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휘어질대로 휘어지고 비틀린 나무들을 세워 그 위에 다른 부재들을 엮어 정연한 대웅전이 되게 했던 점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웅전을 지었던 목수의 특별한 혜안이 아니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이 휘어진 기둥은 마치 용트림을 하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청룡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청룡사인가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청룡사는 1864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공이 큰 관계자들을 위로하고자 열었던 전국 예능인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전국 최고의 기예단으로 인정받을 당시 안성의 남사당패가 이곳 사하촌(寺下村, 절 아랫마을)의 꽃다운 처녀 바우덕이의 근거지로 삼았었다.

 

이들은 겨울이면 청룡사에서 잡다한 일손을 도우면서 살다가 절에 큰 행사인 영산재나 수륙재 등이 열리면 자신들의 재주를 기꺼이 내주어 절의 행사에 사람들을 즐겁게 하여 주었고, 그 덕에 청룡사로부터 신표를 받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하여 전국 장터를 무대로 몸으로 익힌 볼거리를 팔아 살아갔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청룡사 아래에는 불당골로 불리우는 남사당 사하촌 마을이 있고 불당골에 바우덕이의 사당과 청룡저수지 아래에 바우덕이의 묘소가 있다.

 

이렇게 자연의 건축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안성 청룡사 대웅전이지만, 오랜 세월의 풍파속에 빗물이 스며들고 지붕이 쳐지고 수평 부재들이 뒤틀려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필자가 찾았을 때는 전면 해체 복원 공사중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기둥들이 모두 그대로 쓰일런지 알 수 없다. 청룡이 용트림하듯 서있는 청룡사 대웅전 기둥을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대웅전>

청룡사는 원래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세워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던 곳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놓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이 대웅전은 안쪽에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범종을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과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산회괘불탱>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괘불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제자 등이 에워싼 모습인데, 중앙의 석가불은 머리에서 빛이 나고 특이하게도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에 올린 시무외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관을 쓴 제석천, 면류관에 홀을 든 범천상, 책과 연꽃·정병 등을 들고 있는 6명의 보살 등이 석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석가 위로는 여러 제자들과 부처의 수호신인 4명의 금강역사상이 있고,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여러 불상들이 작게 그려져 있다.

주로 진한 붉은색과 청색이 많이 사용되었고 복잡한 구도로 인해 무거운 느낌이 들지만 윗부분에서 보여주는 화려함과 아랫부분의 무늬로 인해 여유있어 보인다.

 

이 그림은 효종 9년(1658)에 승려화가인 명옥 등이 그린 것으로 본존의 크기가 매우 컸던 고려말∼조선초의 그림과는 달리 본존인 석가불이 작아져 상대적으로 주변 인물의 크기와 비슷해진 그림으로, 17세기 중엽 영산회상도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삼층석탑>

청룡사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4장의 판돌을 세워 4면을 이루게 한 뒤,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이 교대로 올려진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에 기단에서와 같은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몸돌의 크기는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로 인해 전체에 흐르던 비례감이 약간 흐트러지고 있다.

급한 경사를 이루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가벼움을 실었으며,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기단과 지붕돌 모서리의 일부가 깨져 나가고,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없어지긴 하였으나,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동종>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또한, 검은빛이 감도는 큰 종으로서 원래는 1674년에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도 매일 행해지는 예불의식 때마다 종을 치고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종의 모양을 보면 소리를 좌우하는 음통(音筒)이 맨 위에 있고 그 옆에는 용 모양의 종을 거는 고리(용뉴)가 있다. 그 아래에 배가 불룩한 포탄 모양의 종이 있다.

 

종신의 표면을 보면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1줄씩 새기고 그 아래 사다리꼴로 된 4개의 유곽(乳廓)이 있고 그 사이에는 연꽃 가지를 든 4구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패(位牌)가 한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같은 구성법은 17세기 전반기에 정통 승장계(僧匠系)장인들이 주로 썼던 방식이다.

이 종은 숙종 대에 활동했던 승장 사인(思印)이 30대 중반에 지준(智俊) · 태행(太行) · 도겸(道兼) · 담연(淡衍) · 청윤(淸允)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보이는 전통 계열의 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종들 가운데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범종의 연구와 승장들의 사회 및 사원경제구조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유곽 : 종의 윗부분에 붙어 있는 사각형의 무늬부분으로 유두(乳頭)를 둘러싸고 있다.

 

<사적비>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것이다.

청룡사 절내의 오른쪽 부도밭으로 가는 입구에 서 있는 이 비는 청룡사의 중수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대장암이라 이름지어 창건하였고, 공민왕 13년(1364) 나옹왕사가 크게 중창(원래의 절을 고쳐 새롭게 함)하면서 절의 이름도 청룡사로 바꾸었다.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인데, 특이하게도 지붕돌 귀퉁이마다 네마리의 용이 머리를 대고 서려 있는 모습이다.

비문에는 나옹이 절을 중창할 때의 일과, 그 뒤 조선 숙종 때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을 중건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경종 원년(1721)에 세운 것이다.

 

<감로탱>

감로탱은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그린 불교그림이다.

이 그림은 가로 200㎝ 세로 237.5㎝ 크기이며 3단으로 화면구성을 하고 있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가운데 아미타삼존을 포함한 7여래와 극락세계로 영혼을 인도하는 인로왕보살 등을 그려 이상세계를 표현하였다.

특히 불·보살의 몸을 금가루로 칠했는데, 이는 다른 불화에서는 거의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림의 중간에는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영혼이 극락으로 인도되길 기원하는 제사상을 차려 공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속세의 여러 장면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당시 풍속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숙종 18년(1692)에 제작된 이 불화는 명료한 주제와 안정된 구도, 선명한 색채로 조선 후기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중생제도와 유교의 효사상 강조에 따른 종교적 의의 또한 매우 크다.

 

<금동관음보살좌상>

머리는 상투 모양으로 높게 묶은 후 양쪽 어깨로 몇 가닥씩 흘러내리게 하였다. 적당히 살이 올라있는 얼굴에는 눈·코·입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서 마치 깃처럼 한번씩 접혀진 상태로 자연스럽게 흘려내려 배 부분에서 큰 W자의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하체로 내려온 옷은 양 무릎을 감싸고 무릎 아래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점, 얼굴과 신체의 단아하고 사실적인 표현 등에서 고려 후기의 보살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단순화된 구슬 장식 등에서 조선 초기인 1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가 많은 청룡사>

여기 경기도 안성 서운산 골짜기에 있는 청룡사(靑龍寺)는 전각 예닐곱 채만 있는 자그마한 절이다.

 

그런데 이 사찰에는 유독 중요한 문화유산이 많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만 해도 동종(제11-4호), 대웅전(제824호), 영산회괘불탱(제1257호), 감로탱(제1302호), 소조석가여래삼존상(제1789호) 등 5건에 달한다.

 

지명도가 그리 높지 않은 절에 이처럼 보물 문화재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중앙박물관이 2016년 7월부터 1년 여간 진행한 문화재 조사 결과를 담아 10일 발행한 보고서 '조선의 원당2, 안성 청룡사'를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원당(願堂)은 조선시대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던 사찰을 뜻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청룡사 또한 원당이었는데,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1622∼1658)이 특히 많이 후원했다.

인평대군은 승려를 보호하고 사찰을 지켰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그의 후손들도 청룡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룡사의 보물 가운데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17세기 초반, 동종과 불화인 영산회괘불탱 · 괘불탱은 17세기 후반에 제작됐다.

인평대군을 비롯한 조선왕실의 여러 인물이 사찰을 지원한 덕분에 뛰어난 불교미술 작품이 만들어진 셈이다.

 

보고서에는 청룡사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각, 회화, 승탑 등 문화재를 실측 조사하고 정리한 논고 7편이 실렸다. 불화의 안료와 불상 내부에 넣었던 발원문의 직물을 분석한 결과, 주요 기록의 번역문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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