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사(白雲寺)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유등리 만월산(滿月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875년(헌강왕1)에 도운(道雲)이 창건하였으며,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있지 않다.
다만 현재의 사찰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초석과 축대 등의 유적과 이 절에서 공양미를 씻은 물이 연곡면의 행정천(杏亭川)을 부옇게 물들였다는 전설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폐사 연도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545년(조선 인종1)을 전후하여 이이(李珥)와 최옥(崔沃) 등의 유생들이 이 절을 강례처(講禮處)로 이용하였음을 보아 임진왜란 전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5년에는 김용환(金龍煥)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산신에게 천일기도를 올린 뒤 오대산 상원사에서 관음기도를 드리던 중, 다시 선인의 현몽으로 이 절터에 토굴을 짓고 기도하여 병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오대산 상원사에 있던 향봉(香峰)과 청월(淸月)이 1952년에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953년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1955년에는 영주 부석사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옮겨왔으며, 1959년 3월에는 윤비(尹妃: 조선마지막왕 순종의 황후. 純貞孝皇后 1894~1966)의 보시로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하였다.
극락보전 중정에는 사찰입구 축대아래에 있는 승탑재(僧塔材) [또는 승탑부재(僧塔部材)라고도 함] 외에 승탑재가 1기 더 있으며, 1955년 부석사에서 이불한 관음보살좌상도 봉안 되어 있다.
승탑(僧塔)은 고승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한 석조물이다. 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는 반면, 승탑은 사찰 밖에 있다.
현존하는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1965년에 건립한 삼성각(三聖閣)·요사채 등이 있다.
백운사 입구에는 축대 아래에 석불좌상과 부도 2기가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실린 ‘백운사지(白雲寺址)에는 두부가 파괴된 석불좌상이 있다.’고 등재 된 그 불상일 것이다.
☆석불좌상
대좌, 광배는 결실(缺失)되었다. 상호는 민초들에게 돌려주어 윤곽이 불분명하다.
큰 귀, 어깨 부분은 모두 파손되어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 팔은 가늘게 표현되어 있다. 하반신은 두텁게 표현하였으며, 결가부좌의 길상좌, 수인은 불분명하지만 항마촉지인 같다.
후면에는 옷주름을 새기지 않았다. 조성시기는 고려전기로 추정된다.
☆백운사 석조(白雲寺 石槽)
백운사(白雲寺)에는 오래된 석조(石槽: 큰 절에서 돌을 파서 물을 부어 쓰도록 만든 석기)가 있다. 이 석조는 백운사의 1954년에 향봉선사(香峯禪師)와 청월화상이 본사를 신축 할 당시 발견되었다. 화강암 재질로 하부는 자연석 4매로 단단하게 다지고, 전·후면은 1매의 판석으로, 좌·우측은 2매의 판석을 세워 조립하였다. 전체 깊이는 110cm이고, 두께는 23.5cm이다.
이것은 백운사 주변 일대가 절터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귀중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유상대>
연곡에서 소금강 진고개로 넘어가는 6번 국도변에 백운사입구 표지판이 있다. 거기서 백운사로 향하는 200m정도에 유상대가 위치하고 있다. 아담한 골짜기에 조그만 폭포와 바위는 작은 소금강을 연상한다.
“유상대(流觴臺)”각자와 암각바둑판은 이곳이 유상곡수 놀이와 신선 풍류 행위가 이루어졌던 풍류처임을 확인시켜 준다.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운(道雲)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허가 되었고, 1954년에 재건된, 백운사 경내에 새겨진 “만월산 백운동천(萬月山白雲洞天)”이란 암각서는 뱀골 계곡에 선도적(仙道的)풍류와 선비문화의 전통이 면면히 스며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단서이다.
릉의 읍지인 「동호승람」에 인종원년(1545)을 전후하여 "남전현(籃田縣)의 백운사는 율곡 이이, 성제 최옥 등 명유(名儒)의 강례처(講禮處)"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공간이 유서 깊은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호승람」과 「완역 증보임영지」에 기술된 무오년, 즉 철종9년(1858)김윤경(金潤卿)이 창건한 백운정(白雲亭)의 존재를 통해 누정 및 동천 경영의 흔적을 추론할 수 있다.
아울러 유상대 각자 바위 계류 건너 입석에 새겨진 "백운정동천(白雲亭洞天)" 암각서는 백운정 건립 3년 뒤인 철종12년(1861)에 조성되었으며, 유상대와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는 상징적 표식임을 알수 있다.
이와 같은 정황과 입지성을 전제로 유상대 곡수유구 흔적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유상대 주변 계류 및 암반에는 수량과 유속을 조절하기 위한 세분석(細分石)과, 유로와 잔을 가두기 위한 홈인 금배석(擒盃石)과 유배공(留盃孔)의 조탁 흔적 등을 발견하였다.
더불어 하단 암벽에서 "오성(午星)"이란 명기 아래 23인명의 각자를 발견하게 됨에 따라 이곳이 20C중반까지 유상곡수연의 성격을 갖는 풍류 문화경관의 거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는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 유상대를 중심으로 한 선비 풍류의 문화가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유·불·선(儒·彿·仙)이 습합된 독특한 역사문화공간"이란 측면에서도 심도 있게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유상대바둑판>
유상대란 ‘구불구불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그 잔이 물길을 돌아서 앞에 오면 시 한 수를 짓는 선비들의 글 놀이, 즉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풍류를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정취를 보며 유상곡수와 바둑이라는 절묘한 조화를 즐긴 옛 선비들의 풍류가 느껴진다.
유상곡수는 353년 중국 동진(東晋)시대 절강성(浙江省)에서 명필 왕희지(王羲之) 등 당대의 학자들이 난정(蘭亭)이라 불리는 곡수(曲水)를 만들고 회동한 것에서 비롯된다.
유상곡수의 풍습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북아 3국에 널리 전해졌으나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경주 포석정(鮑石亭)을 생각하면 유상대가 어떤 곳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유상대는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신라시대에 행해졌던 유상곡수의 옛터인 것이다.
유상대 바둑판은 가로세로 54.5×55.5cm로 바둑판줄이 무척 선명했으며 실제 대국에 알맞게 새겨졌다. 바둑판과 관련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추정은 어렵지만 보존상태와 줄의 선명도로 볼 때 제작연대는 19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예전 계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퇴곡서원 유생들이 이곳에서 유상곡수를 즐기며 바둑을 두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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