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傳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중턱의 사적 제212호인 “전(傳)구형왕릉”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전(傳) 구형왕릉이 역사적 사실이라며 구형왕릉 앞에 붙어 있는 접두어 '전(傳)' 자를 떼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곳은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 한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네번째 단에는 가로, 세로 40㎝, 깊이 68㎝의 감실이 있으며 용도는 확실치 않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 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무덤 서쪽에 있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무덤 500m 아래쯤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진실 밝히기>
산청군은 경남도와 함께 문화재청에 사적 제212호인 전(傳)구형왕릉의 문화재 명칭변경을 신청했다고 10일 밝혔다.
구형왕릉은 진실이기에 전설이라는 의미의 전(傳) 자를 떼어 달라는 것이 요지다. 구형왕은 가야의 마지막 왕이자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다. 구형왕릉은 1971년 2월 사적으로 지정됐다.
산청군과 경남도는 신청서에서 구형왕릉이 한국정사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록돼 있지 않으나 ‘일본사기’와 ‘고사기’에 구형왕의 사망일과 능묘 장소, 모양이 정확히 기록돼 있고 이는 동국여지승람과 왕산사기와도 일치하는 등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또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설도 구형왕릉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고 산청군은 밝혔다. 금서면 일대에는 구형왕이 전사하면서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 유언했고, 살아남은 군졸들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돌 하나씩을 놓아 쌓은 무덤이 바로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구형왕릉은 피라미드나 고구려 적석총 같기도 한 묘한 분위기의 거대한 석조물이다. 위로 올라가며 면적이 줄도록 해 모두 7단을 쌓았으며 전체높이는 7.15m이다. 네번째 단에는 가로, 세로 40㎝, 깊이 68㎝의 감실이 있으며 용도는 확실치 않다.
산청군 관계자는 "구형왕릉에 관한 연구자료를 토대로 역사적 근거를 밝혀 문화재청에 명칭변경을 신청했다. 조만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유신 사대비(金庾信 射臺碑)
: 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金庾信射臺碑(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흥무왕김유신사대비)란 글씨가 있는 비석으로 오른쪽에 있는 공터는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화랑으로 활동하던 청년시절 가락국의 마지막왕인 증조부 구형왕릉묘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활쏘기를 연마했다는 곳을 기념하여 세워 놓은 것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한 비각-김유신 사대비 맞은편에 있다.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델타 지역에 자리 잡아 농업이 발달하였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접해 있어 낙동강을 이용한 해상왕국 건설에 적합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근처에 철산지가 많아 철기문명을 발전시키기에도 유리했다. 가야가 국가를 형성해 나아가는 초기에 금관가야가 맹주 국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입지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금관가야는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5세기 고구려 광개토왕의 임나가라 정벌 때에 일대 타격을 받고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백제의 압력에 시달리던 금관가야는 532년 결국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해버리는 결단을 내려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 혈통은 구형왕의 아들이었던 김무력(金武力)을 거쳐 손자인 김유신(金庾信)에까지 이어졌다.
김무력은 백제와의 전쟁인 관산성전투에서, 김유신은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을 극복하고 신라의 주도 아래 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그 가문은 왕비까지 배출한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