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表忠寺)
경남 밀양시 단장면 재약산(載藥山)에 있는 조선시대 승려 사명대사 유정 관련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한편으로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한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간 원불(願佛)을 대구 용연사(龍淵寺)에서 가져와서 봉안하고, 동서쪽에 요사(寮舍)를 지어 수호하는 승려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남붕이 총책임을 맡고, 연초(演初)·취안(翠眼)·최심(最心)·상현(尙玄) 등이 도왔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사명대사의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동쪽에 서산대사, 서쪽에 기허당을 각각 모셨다.
또한, 원불전(願佛殿)·노전(爐殿)·예제문(禮制門)·의중당(義重堂)·자하문(紫霞門)·명인루(明禋樓)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서 재실(齋室)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
그러나 향례(享禮)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살고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하여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영정사는 이미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남계료(南溪寮)는 심검당(尋劒堂)으로, 원통료(圓通寮)는 설법당(說法堂)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나한전(羅漢殿) 등은 그대로 두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인 대광전, 팔상전, 명부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인 만일루, 표충서원 등이 있다. 또한 국보 제75호인 청동 은입사 향완(香垸)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이다.
이 밖에도 보물 제467호인 표충사 삼층석탑과 보물 제1944호 삼층석탑 출토 유물, 중요민속자료 제29호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錦襴袈裟)와 장삼(長衫),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인 표충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표충사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 영정 및 탱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2호 표충사제영록책판(表忠寺題詠錄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3호 밀양표충사소장유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7호 목조삼존여래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8호 표충사석조석가여래좌상 등이 있다.
◇654년
무열왕 원년(654년)에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원효스님이 터를 잡아 창건한 죽림정사(竹林精寺)를 신라 흥덕왕 4년때 인도스님이신 황면(黃面)선사가 현재의 자리에 재건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하였다.
◇829년
(흥덕왕 4)에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진영사(靈井寺)라 이름을 고치고 3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것으로 전한다.
◇1286년
(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7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1738년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1742년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
◇1839년
1839년(헌종 3)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武安面)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 절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치게 되었다.
◇1926년
이보다 앞서 1715년(숙종 41)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및 건물로는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을 비롯하여 보물 제467호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석등(石燈), 표충서원(表忠書院), 대광전(大光殿) 등의 지방문화재와 25동의 건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대광전 (大光殿)
대광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절로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 간격은 공포 간격을 배려하여 같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천수관음보살도를 모셔놓은 법당이며, 아미타불의 좌보처로서 아미타불의 뜻을 빌어 대자대비(大慈大悲) 를 근본 서원으로 삼아 중생을 보살피고, 극락정토(極樂淨土) 에 왕생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관음전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좌우보처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응립해있으며, 후불탱화로는 1930년 조성된 천수천안관음세음보살탱화가 모셔져있다.
만일루(萬日樓)
만일루(萬日樓) 이미지
조선 철종 11년(1860)에 월암선사가 세운 만일루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로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으로 되어 안쪽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무량수각 또는 서래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였던 곳이다. 나중에는 참선하는 방인 선방으로 사용하였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대종사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 을 모시고 있다고 하여 시왕전(十王殿) 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모시고 있다 하여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죽은 자들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지옥왕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지장보살은 불교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모든인간이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면서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 (六道)
◇사천왕문(四天王門)
재약산 사자봉 아래 한계암 계곡에서 내려오는 겨울 바람을 맞으며 고운 자갈이 깔린 넓은 서원 구역을 벗어나면 동쪽 돌계단 위에 표충사 경내로 들어서는 세 번째 관문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계단 아래쪽에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분홍빛 꽃을 피우는 커다란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다. 천왕문 안 에는 사천왕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천왕문은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불국 정 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 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기단 (基壇) 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져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 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상노전(上爐殿)
표충사 대웅전을 책임지고 담당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스님들의 숙소입니다.
◇설법전(說法殿)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표충사 사당과 마주고 있으며, 가운데 무설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중의당, 오른쪽에 대흥불법도량이 걸려있으며 설법전이란 현판은 뒤쪽에 위치해 있다.
◇수충루(酬忠樓)
표충사로 들어서는 두번째 해탈의 관문인 수충루(酬忠樓)는 충혼을 상징 하며 표충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표충사 편액이 걸려있는 수충루를 지 나면 사명대사 유물관을 비롯한 표충사당 표충서원 설법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각(影閣)
표충사의 고승(高僧)의 초상(肖像)을 모시는 곳이다.
◇응진전(應眞殿)
표충사에서 석가모니(석조석가모니불좌상)를 중심으로 좌 미륵보살좌상과 우 제화갈라보살좌상을 협시로 모시며, 그 주위에 다수나한성과 양끝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을 해놓은 곳이다. 19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후불탱인 영산회상도는 1942년 조성되었다.
◇칠성전(七星殿)
일반적으로 삼성각에 같이 모셔지는 산신, 독성, 칠성중에서 칠성을 별도의 전각에 모셨다. 칠성각(七星閣)이라고도 하는데 북두칠성을 모신 전각으로 칠성을 부처님들로 화한 경우가 보통이다.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주불로 모시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가장 성행한 전각이다.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그린 탱화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표충사당(表忠祠堂)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
◇표충서원(表忠書院)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사명대사·기허당 3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형태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가람각(伽藍閣)
표충사(表忠寺)에는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몇몇 특이한 점들이 있다.
그 중 하나로 눈에 잘 띄지는 않으나 수충루(酬忠樓)로 들어서기 직전 오른편에 있는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건물이 가람각이다.
또 수충루 1층 문루로 들어서면 좌측에도 작은 가람각이 있다.
밖에 있는 것을 특히 외가람각이라고 한다.
* 이 외가람각은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靈駕)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떼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된다고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종교적 건물로, 전남 순천 송광사에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인 세월각(洗月閣)과 척주각(滌珠閣)과 같은 용도의 건물이다.
이는 죽은 자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 오기 전에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어 준는 곳이다.
남자는 <구슬을 씻는다>는 뜻에서 척주당, 여자는 <달을 씻는다>는 뜻에서 세월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찰마다 특정한 가람신이 있지는 않지만 일본에서는 많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가람각(伽藍閣)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면,
가람각은 절의 영역을 수호하는 가람신(伽藍神)을 모신 집이라는 의미이다. 가람이란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축물을 의미한다.
가람신은 부처와 상관없이 가람을 지켜주는 신이 모셔져 있는데, 절에 함께 있다는 것은 산신각이나 칠성각처럼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과 융화를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체로 가람신은 마을의 성황당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가람각을 국사당(局司堂), 성황각(城隍閣)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과 통도사의 독룡(毒龍)이 문헌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가람신들이다.
토속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가람신이 절의 진짜 주인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땅을 신성시하여, 땅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따라서 토지신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고구려 고국양왕때(392년) <국사(國社), 즉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기도 하였다>라고 나온다.
사직의 [사社]는 <토지신>을, [직稷]은 <곡물신>을 의미한다.
예부터 하늘과 땅 그리고 산은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은 민간인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사직에 대한 제사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온 뿌리 깊은 신앙이었다.
왕이 즉위하면 맨 먼저 종묘사직에 예를 올리듯, 절에서도 주지가 부임하면 가람각에 먼저 예를 올렸다고 한다.
◇통도사 : 가람각
통도사는 일반적인 사찰에는 잘 없는 가람각(伽藍閣)이 있다. 통도사를 수호하는 신을 모신 가람각이다. 천왕문의 좌측에 있는 작은 건물이다.
건물 담의 안쪽에 있지만 천왕문보다는 바깥에 위치한다.
이것은 사찰에서 함께 수용을 하고는 있지만 진정한 사찰의 부분은 아니기 때문에 밖으로 내 놓은 듯 느껴지는 것이다.
* 가람각 위쪽 모서리에 도자기가 있는데 그 도자기 안에는 소금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 소금의 기능은 화재를 예방한다고 한다.
제천 신륵사 : 국사당局師堂
◇월정사 : 성황각(城隍閣)
성황각은 이 지방의 토속신을 모신 곳이다. 맞배지붕에 크기는 자그마하여 2평 남짓한 이 성황각은 모든 사상과 믿음을 수용하려는 불교의 넓은 가르침을 보여준다.
사찰로 가는 일주문 전이나 일주문에서 사천왕문 사이 또는 옆에 모시고 있으며, 국사당, 국사단, 가람당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