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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남

창녕 영산 만년교

by phd100 2021. 9. 30.

 

창녕 영산 만년교 (昌寧 靈山 萬年橋)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에 있는 다리로서 원님이 다리를 고쳐 주었다고 하여 院(원)다리라고도 하는 이 다리는 다리의 경계에 세워진 남천석교비(南天石橋碑)에 의해서 1780년 석수 백진기(白進己)가 축조하였고, 1892년 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서 중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리운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홍예(虹霓) 재료는 화강암(花崗岩) 각재(角材)이며, 전후 양측의 다리 벽은 자연잡석을 쌓아 메꾸었으나 홍예 머릿돌 위에는 비교적 규격이 큰 각이진 돌을 배열하였다.

홍예 석축 위는 상승각도가 완만한 흙으로 되어 있고 난적석벽(亂積石壁)은 더욱 길게 전후로 연장되어 양 개울가의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고종 29년(1892)에 다시 쌓아 놓은 것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

이 다리는 홍예(虹霓) 석교(石橋) 옆에 교비(橋碑)가 서 있어 고종(高宗) 29년(1892)에 중축한 만년교임이 밝혀졌다.

홍예교는 개울 양 기슭의 자연 암반에 기대어 쌓았으며 반원의 홍예는 화강석(花崗石) 각재(角材)를 이용하였으나, 그 밖의 교벽(橋壁)은 자연 잡석을 쌓아 메웠다. 교상에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 없으며, 흙을 얹은 양변에는 지상 통로처럼 풀이 자라고 있다. 다리 길이는 13.5m, 폭은 3m이며 홍예를 이룬 안쪽 반원의 지름이 11cm, 높이는 5m이다.

 

남천석교비(南川石橋碑)

현재의 창녕군의 영산 만년교를 처음 쌓았을 때는 남천석교라 불렀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창녕 영산 남천석교(靈山 南川石橋)를 석공 백진기가 처음 쌓았으며, 이것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남천석교(현재의 영산 만년교) 옆에 1780년에 세운 비석이 남천석교비이며, 윗부분이 일부 깨어졌지만 1892년에 세운 만년교비 보다 문자를 판독할 수 있는 상태가 더 좋다. 이 비석은 13세의 소년이 글씨를 썼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영산 남산호국공원(靈山 南山護國公園)

면적은 165만㎡이다. 1973년 도시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2년 5월 31일 전국 최초로 호국공원으로 재조성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한국의 호국공원 중 손꼽히는 곳이다.

3대 국란호국의 성지(聖地)로서,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3·1운동 봉화대 및 기념비, 6·25전쟁 영산지구 전적비가 있다. 공원 입구의 무지개형 다리는 보물 제564호인 만년교(萬年橋)로서,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홍예교(虹霓橋) 구축기술을 보인다고 하여 학술적 가치가 크다. 임진왜란 호국충혼탑 뒤로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다. 영산군이 경상남도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임을 기념하여 이곳에서는 매년 3·1절 기념식이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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