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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남

합천 묘산 화양리소나무

by phd100 2021. 10. 3.

 

화양리 소나무

합천 화양리 소나무는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는 소나무이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이는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7.7미터, 둘레 6.15미터의 크기이다. 가지가 2.5∼3.3미터 높이에서 갈라져 아래로 처지는데 그 모습이 독특하다. 나무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 용처럼 생겼다 하여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한다.

 

천연기념물 제289호. 면적 256 m2. 수량 1그루. 1982년 11월 4일 지정. 추정수령 400년. 지정사유 노거수. 국가 및 개인 소유. 나무높이 17.5m, 가슴높이 줄기둘레 5.5m, 뿌리목 줄기둘레 6.5m, 가지밑 줄기높이 3m이고, 가지퍼짐은 동쪽 12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1.4m이다. 이 소나무는 지상 3m 정도 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갈라지기 시작하여 수관이 넓게 퍼져 있다.

 

연안(延安) 김씨(金氏)의 후손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1612년(광해군 4)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과 더불어 역적으로 몰리자 김제남의 육촌 동생되는 사람의 도움으로 피신하여 이 나무 아래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 나무는 귀룡목(龜龍木)이라고도 불리는데 껍질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줄기가 용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을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당산목(堂山木)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로 여기고 오랫동안 보호해 왔으며, 민속적·역사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가장 높이 올라간 줄기 일부가 죽어서 안타까운데, 무척이나 아름다운 나무여서 오래토록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소나무 옆에는 유형문화재 제301호 합천 화양리 야천신도비(陜川華陽里神道碑)가 있다. 신도비는 원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인데 이 신도비는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冶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소(朴紹 1493∼1534)선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비에는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에 모시는 많은 비석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살창과 비좁은 비각 때문에 전체 모습을 한 장의 사진에 담기 어렵다.

 

<참고>

박소(朴紹)선생은 조선 성종 24년에 한양에서 출생하였고 휘는 소, 자는 언주, 호는 야천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박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중종 14년 대과에 장원급제한 후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 29년 사망한 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시호문강(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諡號文康)으로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이 야천선생 생전의 학덕을 사모하여 지은 글을 명필 한호 석봉선생의 글씨로 새겨 선조 23년(1590년) 9월 건립한 것이다.

 

이 신도비는 오랜 세월 풍우에 시달려 각자가 마멸될 위기에 놓여 보호책으로 반남 박씨 대종중에서 1993년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신도비의 규격은 높이 210m, 폭 90m, 두께 30m로 거북좌대에 덮개는 갓 모양으로 조성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가 무척이나 높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석재는 해석(海石: 浮石- 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생긴, 多孔質의 가벼운 돌)이라고 한다.

 

한양 출신인 박소선생이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곳이 어머니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박선생의 어머니 파평윤씨(尹氏)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인데 인근 묵와고가가 파평윤씨의 것이다.

윤씨는 박소선생이 8세일 때 남편과 사별하고 살림이 어려워지자 아들들을 데리고 친정인 합천(陜川) 야로현(冶爐縣)으로 남하한 것이다.

 

국조 인물고 권46 기묘당적인(己卯黨籍人) 부분에 박소선생의 신도비명이 올라와 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한 비문 중 명(銘)의 일부를 인용한다.

 

≪주역(周易)≫을 강론하여 왕도(王道)를 협찬했도다.

사간원에 들어가 간언을 드렸고 사헌부에 들어가 기강을 바로잡았도다.

엄숙한 안색으로 반열에 서니 솔처럼 곧고 옥처럼 강했도다.

성인(聖人)의 무리가 되기를 바라니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려는 뜻이 끝없었도다.

때 아닌 때에 태어나니 결국 틈이 생기고 말았도다.

곧은 도를 펼쳐보지 못하고 아름다운 계책을 시행해 보지 못했도다.

갑자기 날개를 움츠리고 장도(長途)에서 미끄러졌도다.

[중략]

외로운 표상이 무리에서 뛰어나니 온갖 행실에 결함이 없었도다.

고인(古人)에 비해도 손색이 없으니 후세 명철한 이의 모범이 될 만하였도다.

유구하게 전해져 일월(日月)처럼 찬란하도다.

그 누가 길고 짧은지 식자들이 분별할 것이도다.

[후략]

 

정확히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신도비 서남쪽 산록에 조성된 묘역에 선생의 묘소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아래에서부터 확인하며 올라갔다.

입구 좌우에 제법 나이 먹은 소나무 두 그루가 묘역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다. 묘역에는 하단에 2기, 상단에 2기 등 모두 4기의 묘소가 있었다.

 

제일 아래 묘소에는 박소선생의 장손자인 중훈대부 홍문관 응교 증 부제학 반남박공동현지묘란 묘표가 서 있었다.

부인 청주한씨와 합장묘로 만들어져 있다. 박동현[朴東賢 1544년(중종 39)~1594년(선조 27)]은 박소선생의 장남인 박응천의 장남으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해, 의금부도사 등을 지낸 뒤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지제교(知製敎)·수찬(修撰)·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사사해 자주 찾아가 배우고, 김장생(金長生)과 친교가 두터웠다.

 

박동현묘에서 특별히 눈에 들어온 것은 망주석이었다. 밋밋하게 처리되는 다른 망주석들과는 달리 윗부분을 정성들여 조각하였다. 네 면에서 잎사귀가 올라와 가운데 있는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바로 위에는 박소선생의 큰 아들이자 박동현의 아버지인 박응천[朴應川 미상~1581년(선조 14)]의 묘소가 있다.

장대석을 한 줄로 박아 평탄하게 고른 뒤 이 묘역 중 유일하게 雙墳 형태로 조성했다.

오른쪽에 새로 세운 묘갈명이 있고, 왼쪽 봉분 앞에 있는 묘비명에는 증 의정부 좌찬성 행 통훈대부 사재감정 박공 응천지묘라고 되어 있다. 정경부인 거창신씨와 함께 모셨다.

 

박응천은 1543년(중종 38) 성균시에 합격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이어서 태인현감(泰仁縣監)·호조정랑을 거쳐 봉산군수(鳳山郡守)가 되었다.

군수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여 당시 도적떼인 임꺽정(林巨正)의 무리까지도 꺼릴 정도로 군민을 잘 보살폈다. 대구·이천·수원 등지의 부사(府使)와 광주(廣州)·양주(楊州)의 목사를 거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사재감정(司宰監正)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대구부사로 있을 때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 충후(忠後)가 대구에서 천역(賤役)을 하는 것을 노비문적에서 빼내어 천역을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아우 응순(應順)의 딸이 선조의 비(妃)가 되었다.

 

박응천 묘와 그 위의 묘소 사이는 한참 떨어져 있고, 경사도 급해 4단의 축대를 쌓아 묘역을 마련했다.

이 묘소가 바로 박소선생의 묘였다. 묘소 우측에 키가 무척 크고, 줄기도 두꺼운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향나무, 혹은 측백나무인 것 같다. 또 앞쪽 좌우에는 배롱나무가 두 그루 심어져 있다.

부산 동래정씨 시조묘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배롱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묘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묘소의 석물은 좌우에 망주석이 있으며 봉분 앞 상석 사이에 묘비가 서 있다. 장명등은 근래에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묘소의 좌우와 뒤쪽으로는 허리 높이 정도의 ‘ㄷ’자 형태 돌담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이곳 묘소들은 모두 망주석이 특징적이며, 문인석은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두 기의 망주석은 모습이 비슷한데 여느 곳에서 보기 어려운 형태다. 별석으로 만들어진 받침돌은 4각의 지대석 위에 높은 8각 대석이 놓였으며, 대석 면에는 조각이 되어 있다. 그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웠으며, 간주석과 같은 돌로 위쪽에 별도의 부분을 조각했다.

 

이 부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간주석과 달리 4면으로 치석한 뒤 각 면에 문양을 새겼다. 문양은 모든 면이 같은데 아마도 꽃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 만든 장명등도 8각의 대석만은 원래 있던 것을 활용한 것 같다.

 

박소[朴紹 1493~1534]선생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이며 병문(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조년(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쓴 결과 식견이 더욱 넓어져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에 나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해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사간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전한(典翰) 조종경(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해 도리어 사성(司成)에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탄핵해 그들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소선생의 묘 위 최상단에 묘가 한 기 더 있는데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표에 ‘고양부원군 고령박공 위 광순지묘’라고 되어 있다.

高靈朴氏의 시조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이다.

반남박씨 역시 박혁거세의 후예로, 고려 고종 때 반남현 호장을 역임한 휘 박응주를 시조로 받들고 있으니 결국 고령박씨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갈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고령박씨 묘소 아래 반남박씨의 묘역이 조성된 것은 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참고]

<묵와고가>

이곳 화양리 소나무 가까운 곳에 중요민속문화재 제206호 합천 묘산 묵와고가(陜川妙山默窩古家)가 있다.

묵와고가는 선조 때 선전관을 역임하였던 윤사성이 지었다고 전하는 옛집으로 그 뒤 자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처음 지을 당시에는 집터가 600평이었고 명당의 산기슭에 의지하여 높게 지었다고 한다.

한때는 가업이 융성하여 집의 규모가 백여 칸에 이르렀으며, 지금도 우람한 집이 자리 잡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왼쪽으로 산기슭에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마당보다 훨씬 높게 기단을 쌓고 'ㄱ'자형으로 지었는데,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4칸 규모의 내루가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내루의 누하주(樓下柱)는 마당에 주초(柱礎)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축대 높이만큼을 기둥 높이로 잡은 것이다. 내루의 남동벽은 판벽(板璧)하고 문얼굴을 내고 그 인방 위로 교창을 내었으나 지금은 문짝, 창 등은 없어져 원상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서벽은 판벽 없이 개방되었다.

 

사랑채는 2칸의 방에 이어 주간(柱間)을 약간 좁힌 1칸이 또 있는데 배벽(背壁)을 판벽으로 막은 판상(板床)의 공간이다.

측벽과 전벽은 역시 개방하였는데 여기는 대청의 용도라기보다는 배벽(背壁)에 감실(龕室)을 만든 정실(淨室)과 같은 쓰임을 위하여 구성되었던 듯이 보인다. 지붕은 맞배이나 내루의 앞부분만은 합각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하였으며 홑처마에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의 오른쪽으로 중행랑채가 이어지고 거기에 중문이 있어 안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안채는 행랑채보다 한단 높은 기단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ㄱ'자형이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으며, 안채 왼쪽 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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