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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문경 새재

by phd100 2021. 10. 6.

 

 

문경 새재 (聞慶 새재)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官途) 벼슬길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 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새재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설과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에 있는 고개라는 설이 있다. 한편 옛 문헌을 인용하여 초점(草岾), 즉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주장도 있다. 일명 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으며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다녔던 과거길이 남아있다. 또한 주변에 여궁폭포, 용추계곡 등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원터, 교귀정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들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어 관광명소로 주목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KBS 촬영장이 들어서 더욱 알려졌다

 

또한 문경새재가 위치한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뛰어나며, 문경시의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주흘관(主屹關)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관문 중 첫 번째 관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에 따라 많은 논란 끝에 1708년(숙종 34년)에 석성과 함께 세워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각각 1개씩 있다. 중앙에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이 있으며 좌우에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의 석성을 축조했다.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뒤편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조곡관(鳥谷關)

문경관문(사적 제147호) 중 두 번째 관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이 논의되던 중, 1594년(선조 27년)에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축조한 것으로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주흘관이나 조령관이 있는 자리에 비해 계곡이 좁고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

숙종 때에 성을 개축하고 관방을 설치하면서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그 후 불에 타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8년에 복원하면서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주흘관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령관 보다는 남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중앙의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65.8m이고, 좌우에 높이 4.5m, 폭 3.3m, 길이 73m의 석성을 축조하였다. 문루 뒤쪽에는 영남제2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조령관(鳥嶺關)

제3관문(조령관)새재 정상에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부터 1708년(숙종 34)에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에 홍예문과 석성, 그리고 누각을 복원했다. 조령관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청북도 충주땅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폐봉을 지나 북암·동암문·부봉·주흘산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깃대봉·조령산 공산진·이화령으로 이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3.88m, 폭 2.98m, 길이 6.12m이며,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2mm, 길이 185m이고, 부속산성의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cm이다.

 

소백산맥의 주축인 주흘산에 중성(仲城)인 조곡관(鳥谷關)을 지으면서 주흘관(主屹關)에 초곡성(草谷城)을, 조령관에 조령산성을 각각 축조하였다. 이리하여 문경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인 조령관과 3개의 부속성이 자리잡게 되었다.

 

조령원터(鳥嶺院址)

원(院)은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조령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길손이 오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조령원터 외에도 동화원, 신혜원의 원터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인도 이용을 했으며 물물 교환 등 시장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1,980㎡ 규모의 직사각형 터에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며 돌담장과 석축, 4개의 건물지로 그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돌담장 한 쪽에는 문을 내어 위에 긴 돌을 가로로 얹어 놓았다. 특히 돌담장의 축조형태를 살펴보면, 바깥쪽은 수직으로 쌓고 안쪽은 계단 형태로 쌓아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일반적인 담장이라기보다는 유사시에 성벽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길이 동측 57.6m, 서측 53.0m, 남측 38.9m, 북측 37.7m로 대칭되는 변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된 것을 1995년에서 1996년에 걸쳐 보수를 하였다.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의 주흘관에서 조곡관 방향으로 약 1.3㎞ 떨어진 지점, 조령로 변에 자리 잡고 있다.

 

무주암(無主岩)

주인이 없이 술과 안주가 차려져 있는 바위. 마당같이 넓은 바위위에 주인 없이 술과 안주가 차려져 있어 길가 던 길손(대다수가 과거시험 연유로 한양 땅 오가는 선비님들 과 상인들)들의 쉼터이자 술과 안주를 마음껏 드시고 각자가 먹은 만큼 양심 술값을 내고 가는 곳이다.

 

마당바위

타원형으로 된 이 바위는 긴쪽이 약5m 짧은 쪽이 약4m 로서 지금은 새재를 찾는 많은 관광객의 쉼터이지만, 옛날에는 도적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던 곳이다.

 

상처 난 바위

“V”자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1945)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에너지 원인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문경초점

낙동강 발원지가 문경 초점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1454년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북도 편에 낙동강 발원지는 '봉화현 태백산 황지'와 '문경현 북쪽 초점' 그리고 '소백산 순흥' 세 곳에서 흐르는 물이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

문경 초점 낙동강 발원지는 연못 1개와 표지석 등을 설치해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조성했으며 학술 용역과 문화재청 심의와 답사 등을 거쳐 완공을 보게 됐다.

 

 

용추폭포

원터를 지나 용추폭포(팔왕폭포)앞에 선다.

하늘과 땅의 모든 신을 일컫는 팔왕과 선녀들이 어울려 경치를 즐겼다는 곳이다

 

꾸구리바위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로 큰 꾸구리(토종민물고기)가 바위 밑에 살았는데 이놈이 처녀를 희롱했다는 것.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주었다니 아주 막돼먹은 놈은 아닌 것 같다.

배를 곯던 사람들 아니면 신분질서 타파를 꾀하던 혁명가집단이 이곳에 숨어들어 연명을 위해 했던 약탈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교귀정(交龜亭)

조선시대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 받던 교인처(交印處)이다. 조선시대 신임감사의 인수인계는 도(道) 경계 지점에서 실시하였으며 이 지점을 교귀라 한다. 관인과 병부를 인수하는 교인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유록 등의 기록에 남아 있다.

 

1470년(성종 초) 경에 건립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였다. 건물 앞 우측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교귀정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경상도 문경새재와 전라도 여산, 충청도 진천에 교귀정이 있었는데, 현재는 조선 성종 초에 건립돼 1999년 복원된 문경새재 교귀정만 남아 있다.

 

매년 가을 문경문화제 때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문경새재의 교귀정은 복원된 것이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인처이다. 주흘관과 조곡관의 중간 지점인 용추(龍湫) 옆에 있다.

 

 

문경새재 책바위(聞慶 冊-)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에 있는 돌무더기로 여기에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 한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자녀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들이 찾고 있다.

문경새재에 있는 돌무더기로 이곳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조령관에서 조곡관 방향으로 500여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옛날 어느 부자 집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치성을 드려 어렵게 아들을 얻었으나 몸이 허약해 공부도, 일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 끝에 유명한 도인을 만나 물으니,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氣運)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렀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날랐더니 어느새 몸이 건강해졌으며, 공부도 열심히 하여 장원급제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오래전부터 과거를 보기 위해 이곳을 지나던 선비들이 책바위 앞에서 장원급제를 빌었다고 하며 지금도 영험하다는 소문이 있어 가족의 건강과 자녀들의 성적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이 찾고 있다. 특히 입시철에는 자녀의 합격을 염원하는 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소원성취탑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되며,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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