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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김천 직지사

by phd100 2021. 10. 6.

 

직지사(直指寺)

경북 김천시 대항면(代項面) 황악산(黃嶽山)에 있는 사찰.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 사적비(寺蹟碑)가 허물어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418년(눌지왕 2)에 묵호자(墨胡子:아도화상)가 경북 구미시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936년(태조 19)에 능여(能如)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1610년(광해군 2)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학조(學祖)가 주지로 있었고, 유정(惟政)이 여기서 승려가 되었다.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606),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607), 대웅전 삼존불 탱화 3폭(보물 670), 청풍료(淸風寮) 앞 3층석탑(보물 1186) 등의 문화재가 있다.

 

직지사대웅전(直指寺大雄殿)

넓고 탁 트인 대지 위 뒷부분 경사진 지형에 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 등 석가삼세불좌상(釋迦三世如來佛座像)을 팔각목조대좌 위에 봉안한 불전(佛殿)이다.

불상 뒤 후불벽에는 칸마다 1폭씩 3폭의 후불탱화를 걸었고, 불상 머리 위 천장에는 亞자형 평면의 운궁형 천개를 매달아서 화려하게 장엄하였다.

조선 전기까지는 2층의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조선 후기에 중건되면서 석가삼세불을 봉안한 단층의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건물은 1735년(영조 11)에 세워진 것이다.

 

직지사대웅전앞삼층석탑(直指寺大雄殿─三層石塔)

이 탑은 원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웅창(熊倉)마을 북쪽 금강변 도천사지(道川寺址)로 알려진 곳에 있던 3기의 석탑을 1974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들 3기 가운데 1기는 현재 직지사 비로전(毘盧殿) 앞에 건립되어 있다.

원소재지인 도천사는 경치 좋은 강변을 택하여 이와 같은 3기의 아름다운 석탑을 조성하였으나 그 사찰의 내력 역시 미상이다.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直指寺大雄殿三尊佛幀畵)

이 탱화는 1744년(영조 20년) 作. 비단 바탕에 채색. 중앙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3m×6.1m), 왼쪽의 약사불회도(2.4m×6.1m), 오른쪽 아미타불회(2.4m×6.1m) 보물제670호.

 

 

직지사 비로전(毘盧殿)에 있는 불상은 왼쪽에서부터 석가여래, 비로자나, 약사여래상(釋迦如來, 毘盧遮那, 藥師如來像)으로 돌로 만들어진 위에 백회(白灰)를 바르고 옻칠한 뒤 금분을 입혔다. 가운데에 비로자나불, 왼쪽에 석가모니불, 오른쪽에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직지사 성좌각(星座閣)

대웅전을 바라보아 우측에 성좌각이 있다. 星座閣은 쉽게 볼 수 없는 편액인데, 삼성각(三聖閣)과 같은 역할이다. 안에는 독성(獨聖)과 산신(山神), 칠성(七星)을 모시고 있다.

 

중앙에는 칠성탱화(七星幀畵)가 있다. 하늘의 별인 북두칠성은 하늘의 일월성진(日月星辰)을 다스리고 천재지변을 통솔하는 주제신(主帝神)으로 승격하게 된다. 신으로 숭배되어온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부처님으로 승격시키고 칠성의 주존을 치성광여래로 모시며 그림으로 도상화한 것이 칠성탱화(七星幀畵)다.

칠성을 대표하는 주존인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해와 달을 보살화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칠여래 등이 배치되어 있다 .

 

바라보기에 오른쪽에는 독성탱화와 나반존자상이 있고,

왼쪽에는 산신탱화가 있다.

 

 

 

청풍료 앞 삼층석탑(直指寺淸風寮─三層石塔)

1993년 11월 9일 보물 제118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9m이다. 원래 구미시 선산읍 강창마을의 강락사(江洛寺) 터에 있었으나 1968년 구미시 선산출장소 마당에 복원되었다가 19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단층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조성하고 그 위에 상륜(相輪)을 장식한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결구(結構)한 지대석 기단 면석(面石)을 받치고 있으며, 기단 각 면에는 두 우주(隅柱)와 하나의 탱주(撑柱)를 모각하였다. 각 층의 탑신석에는 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고 옥개석에는 5단의 옥개받침이 있으며, 낙수면은 평박하여 합각(合角)이 예리하다.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같은 시대의 석탑 상륜부를 모본으로 복원하였다. 이 석탑은 9세기의 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각부의 양식수법이 분명하고 원위치도 확실한 점으로 미루어 당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직지사(直指寺)의 또 다른 얘기>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수행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자기 자신이 부처요, 그 마음이 곧 불심”이라는 선종(禪宗)의 핵심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맨 앞 글자인 직지(直指)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분류된다. 교종은 불교 경전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통해 철학적인 이해를 중시하고, 선종은 경전에 의한 가르침보다는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과 참선을 중시하여 신라 후기 백성과 지방 호족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아 발전한 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둘째는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선산에 있는 태조산에 도리사를 창건한 후 김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하여 ‘곧을 직(直)’과 ‘손가락 지(指)’ 자를 따서 직지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아도화상은 417년(눌지왕 1) 신라 최초의 사찰로 도리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418년(눌지왕 2) 직지사를 창건했다. 고구려의 승려였던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산 해평면 모례(毛禮)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는데, 마침 신라 왕녀가 병이 난 것을 향을 피워 고쳐 준 인연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포교를 묵인 받고 도리사와 직지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 집권으로 나아가는 과도기로서, 선사 시대부터 내려오던 신화적 세계관을 불식시키고 왕이 진리를 깨친 부처의 입장에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통치 이념의 강화 차원에서 각국에 수용되었다. 이는 “왕이 곧 진리를 깨친 부처”라는 믿음을 심어 주었고, 불교의 윤회설(輪廻說)은 지배와 피지배라고 하는 인간의 불평등을 전생의 업보로 정당화하여 왕의 권위와 귀족 사회를 유지하는 데 유리한 인생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는 귀족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전파되었다. 선산과 함께 신라 불교의 유입 창구였던 김천은 지역에 위치한 직지사, 갈항사, 쌍계사, 청암사, 수도암 등 대부분의 사찰이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 특히 직지사는 418년 선산 도리사에 이어 신라 사찰로서는 두 번째로 창건되어 김천이 선산과 함께 신라 불교의 발상지이자 포교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527년(법흥왕 14)보다 110년이나 앞서 직지사가 창건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에 아직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그 포교의 전진 기지로서 김천 지역이 신라 불교의 발상지로 자리 잡았다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또 직지사는 신라 후기인 930년(경순왕 4)에 천묵대사(天默大師)가 왕실의 지원으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완성하고 이를 보관하는 장경각을 건립하는 등,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한 곳이기도 하다.

 

 

태조 왕건과 능여조사의 운명적인 만남

 

“주군, 제 고향 김천 땅 직지사 주지 능여 스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분이라면 반드시 이 위기를 타개할 비책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공산 전투에서 견훤의 역공으로 대패하여 8000명에 달하는 부하들을 잃고 인동현까지 밀려나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한 왕건(王建)은 한 장수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동고동락했던 부하 장수 김락과 신숭겸도 전사하고, 그 자신 군졸의 복색으로 바꾸어 입고서야 간신히 탈출한 처지였기에 더욱 그랬다.

 

왕건과 마주앉은 직지사 주지 능여조사(能如祖師)는 일찍이 왕건의 사람됨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으나, 남루한 행색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패장을 이 시점에서 도와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사찰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고민에 잠겼던 능여는 기울어 가는 신라 왕실을 대신하여 옛 고구려의 기백으로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 불교를 진흥시키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히는 왕건에게서 저 옛날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보았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 대업을 이루소서.”

 

927년(태조 10), 감나무 꽃이 땅을 하얗게 물들였던 어느 봄날 직지사에서의 왕건과 능여조사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고려 태조 왕건은 927년 견훤이 경주를 급습하자 경애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 1만 명으로 경주로 향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대구 팔공산에 진을 친다. 맹장 견훤은 이를 간파했고, 역습을 당해 대패한 왕건은 남은 군사 2,000명을 수습하여 구미 인동현까지 밀리고 말았다. 이때 휘하 장수의 권유로 직지사의 능여조사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능여는 왕건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신발도 신지 못한 군사들에게 짚신 2,000켤레를 삼아 주고, 또 큰 짚신을 만들어 사방에 흩어 두는 심리전을 구사하여 왕건이 불리한 전세를 만회해 개경으로 귀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오늘날로 치면 991만 7355.37㎡[300만 평]에 달하는 전답과 임야 1천 결을 직지사에 내려 은혜를 갚았고, 4대 광종 때까지 매년 전답 10결과 노비를 하사했다. 이후에도 고려 왕실에서는 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여한 사찰이라 하여 계속해서 직지사를 받들었으며, 이러한 왕실의 지원 속에 직지사는 고려 후기까지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정종 원년인 946년에는 동평현 염전 7결과 곡식 7만 석을 내렸고, 광종 원년인 950년에는 신라 후기 경순왕 때 조성된 『금자대장경』과 장판각을 중수하고 50일간 법회를 열어 낙성을 경축했다. 신종 대의 권력자인 문하시랑평장사 임유(任濡)는 곡식 500석을 들여 직지사 경내에 13층 석탑을 조성하기도 하는 등 불사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 승려로서 직지사를 거치지 않은 국사가 없을 만큼 직지사는 고려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직지사 변천사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전국의 사찰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직지사는 제2대 정종의 즉위 원년인 1399년 어태(御胎)를 직지사의 북봉(北峰)에 안치함과 더불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받아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계속 사세를 지킬 수 있었다. 정종의 어태가 안치됨에 따라 조정에서는 직지사의 소속 현인 김산현(金山縣)을 김산군으로 승격하고, 직지사에는 전답 15결과 노비 10명을 하사하여 금표와 원당을 세워 태실을 수호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적에 따르면 직지사에는 14전각(殿閣)과 18당우(堂宇), 5문루(門樓), 19속암(屬庵)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407년(태종 7)에 벌어졌던 사찰 혁파 시에도 직지사는 선종고사찰(禪宗古寺刹)이란 첩문(帖文)을 받아 사세를 유지했고, 벽계정심선사(碧溪淨心禪師)가 은거하면서 유명해졌다. 1488년(성종 19)에는 학조대사(學祖大師)가 해인사와 직지사 주지를 겸하면서 해인사 장판각을 수리할 때 직지사의 전각을 함께 중수했다. 또한 1610년(광해군 2) 사명대사가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하자 사명대사의 유골을 모셔 와 부도를 조성해 봉안했다.

 

1576년(선조 29) 왜적의 방화로 43개 전각 중 일주문·천불전·사천왕문을 제외한 40개의 전각이 소실되기도 했으나 1577년(선조 10)에는 율곡 이이(李珥)가 직지사 사적(事蹟)을 찬술하기도 했다. 1602년(선조 35)에 중창을 시작하여 70년 만인 1662년(현종 3)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이어 1658년(효종 9) 대종을 주조하고 천불전을 비롯한 353칸의 전각을 중창했으며, 1713년(숙종 39)에도 대종을 다시 주조했다. 1735년(영조 11) 대웅전이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되었고, 1776(정조 즉위년)에는 사적을 새로 기술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임진왜란 때 도난당한 천불전 내 295위의 불상을 새로 조성해 봉안했다. 1800년(정조 24) 실화로 만세루가 소실되었으나, 1830년(순조 30) 천왕문을 중수한 데 이어 1899년(고종 36)에는 천불전과 서전암(西殿庵)을 중건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반포된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직지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었고, 이 해 범종각을 중수하고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1912년 선원을 설립하고, 1924년 시내에 포교당을 설립했으며, 1939년 천불전이 중수되었다. 1954년 본산 제도가 개편되면서 25본산의 하나로 들고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승격되어 김천·구미·상주·문경·예천 등 5개 시군의 54개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로 발전했다.

 

직지사의 보물들

 

직지사에는 국보 제208호인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와 보물 제319호인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606호인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607호인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제670호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제1186호인 전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제1141호인 예전 한천사 금동 자물쇠 외 쇠북, 제1241호인 『예념미타도량참법』 권6~10, 제11-2호인 문경 김룡사 동종, 1303호인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 제1306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제1576호인 김천 직지사 대웅전 등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이 소장되어 있다.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사리기는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도리사(桃李寺)에서 출토된 사리함으로, 1982년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8세기 신라의 전형적인 금동사리함으로, 창건 당시 전래되었던 불사리(佛舍利)를 금동 육각 사리함과 함께 석종 부도에 봉안했던 것이다. 출토된 사리는 도리사 세존사리탑에 봉안하고 사리함은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다가 1995년 직지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은 1995년 국보 제475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제319호로 다시 지정되어 현재 직지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직지사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는데, 1975년 약사전을 신축하면서 약사전으로 옮겼다가 직지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불신과 광배가 화강석의 한 돌로 조성되고, 결가부좌(結跏趺坐)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에 약호(藥壺)를 든 형상이다. 주형(舟形)의 광배 안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새겼고, 전신에 드리워진 법의(法衣)가 매우 화려하다. 전설에 직지사 약사불과 수도암 약광전 약사불, 금오산 약사암의 약사불이 한 석공에 의해 조성되어 서로 마주보고 앉았는데, 한 불상이 하품을 하면 같이 따라했다고 한다.

 

대웅전과 비로전 앞의 삼층석탑 3기는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던 도천사(道天寺) 터에 흩어져 있던 석탑으로, 1974년 직지사로 옮겨 와 수리해서 2기는 대웅전 앞, 1기는 비로전 앞으로 세웠다.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1976년 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607호로 지정되었고, 훼손된 상륜부는 1976년과 1980년에 각각 복원했다. 8개의 석주(石柱)와 8면의 석판(石板)으로 된 초대(礎臺) 위에 정방체의 탑신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는데, 탑의 규모가 웅장하고 전체적인 조형미가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조성한 것으로 전한다.

 

직지사 청풍료 앞 삼층석탑은 원래 구미시 선산읍 원리 강창리에 있던 강락사(江洛寺) 터에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68년 선산군청 마당으로 옮겼다가 1980년 직지사로 다시 옮겼고, 1993년 보물 제1186호로 지정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전형적인 석탑 양식으로 상륜부와 갑석, 중석 일부는 교체가 되었다.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는 1744년(영조 20) 비단에 그려진 세 폭의 불화로 세관(世冠)을 비롯한 화승 16명이 그렸다. 중앙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범천, 제석천, 십대 제자를 배치했다. 왼쪽에는 약합을 받쳐 든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주위에 일광보살·월광보살 등 8보살과 사천왕 및 12신장이 에워싸고 있다.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대세지보살 등 여러 보살과 신장들이 호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안정감이 있고 비범한 묘사와 정교한 장식이 생동감이 있어 1980년 보물 제670호로 지정되었다.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권6~10은 1474년(성종 5) 세조비 정희대왕대비(貞喜大王大妃)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새긴 목판을 16세기 초 해인사에서 인출한 선장목판본 5권 1책으로, 1996년 보물 제1241호로 지정되었다. 원간본은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며 여러 악업을 참회하고 보리심을 내어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법회 절차를 적은 것이다. 판본은 전체 10권 중 6권에서 10권까지의 5권 1책인데, 간행 시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 동기나 시기를 알 수 없으나 각수(刻手)의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성종비 공혜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0권 끝에는 학조대사의 발문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해인사 소장각 판목에서 인쇄한 초간본으로 보고 있다.

 

문경 김룡사 동종은 조선 현종에서 숙종 대에 유명한 주종장(鑄鐘匠) 사인(思印)이 1670년(현종 11)에 만든 동종으로 2001년 보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사인은 신라 종의 양식을 계승한 당대의 거장으로 강화 동종을 비롯한 포항 보경사 서운암, 홍천 수타사, 안성 청룡사, 서울 화계사, 양산 통도사, 의왕 청계사 등 전국에 있는 많은 사찰의 동종을 제작해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문경 김룡사 동종은 한 마리의 용두로 표현된 종고리와 윗부분을 연꽃으로 장식한 음통(音筒) 등 신라 종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종의 하단에 있는 네 개의 연화문 당좌(撞座)는 장인의 독창성이 엿보이는 새로운 형태로, 같은 해 만들어진 수타사 동종과 함께 두 구의 종에서만 보인다.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71년 묘지(妙智)와 묘수(妙殊) 두 비구니의 시주로 제작된 사경(寫經)으로 2000년 보물 제1303호로 지정되었다. 절첩본으로 표지는 감지에 금은니로 그린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책머리에는 백지에 금니로 그린 「여래삼존도」와 「수월관음도」 등 두 폭의 변상도가 있다. 불경의 내용은 『금강경』·『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 발원문 순이며, 백지에 금니로 필사했다. 『금강경』은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석가모니가 제자 수보리의 질문에 반야 사상을 설명한 내용을 기록한 경전으로,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세음보살을 통해 갖가지 재앙으로부터 구제받는 내용과 관세음보살의 32가지 응신(應身)이 서술된 관음 신앙의 대표적인 내용이다. 발원문은 당나라 현각(玄覺)의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에 수록된 내용을 기록했다.

 

『묘법연화경』은 1405년(태종 5) 안심사(安心寺)에서 간행한 판본으로, 우리나라 불전 관계 사상 가장 많이 개판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전이다. 『법화경』 28품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2001년 보물 제1306호로 지정되었다.

 

직지사의 전각과 당우, 문루

 

직지사 대웅전(大雄殿)은 직지사 사적을 통해 볼 때 조선 시대 정종 대까지는 2층 5칸의 규모로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함께 봉안하여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중창되고, 1735년(영조 11) 900여 명의 시주로 170㎡ 크기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다시 중건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이때 중창된 모습이다. 내부에는 대웅전 중건 당시 조성된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 등 삼존불과 1744년(영조 20)에 조성된 보물 제670호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곧 「영산회상탱화」·「약사회상탱화」·「아미타회상탱화」 등 세 점의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의 천장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한 화려한 단청 조각과 함께 닫집 또는 감실(監室)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모형이 있다. 이것은 세속의 왕과 출세간의 법왕인 부처의 정수리 위에 설치되는 것으로, 통상 절의 닫집이 궁궐의 것보다 훨씬 화려하다. 대웅전 외벽에는 소와 동자승이 등장하는 열 폭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이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고 기르는 과정에 비유해 묘사한 선종화 가운데 하나로 「심우(尋牛)」·「견적(見跡)」·「견우(見牛)」·「득우(得牛)」·「목우(牧牛)」·「기우귀가(騎牛歸家)」·「망우존인(忘牛存人)」·「인우구망(人牛俱忘)」·「반본환원(返本還源)」·「입전수수(入廛垂手)」로 구성되어 있다. 직지사 대웅전은 2008년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전(毘盧殿)은 고려 태조 때 능여조사(能如祖師)가 창건하였다. 내부에는 경잠대사(景岑大師)가 경주의 옥돌로 조성한 천불상을 봉안하여 천불전(千佛殿)으로 더 많이 불린다. 임진왜란 때 일주문·천왕문과 함께 병화(兵火)를 모면한 전각으로, 그 가운데서도 불전으로는 유일하게 소실을 면하였다. 천불전 중창기에 따르면 1661년(현종 2)에 중창과 개금(改金)을 하고, 1702년(숙종 28)에 단청 불사가 있었다. 또 1899년(고종 36)과 1939년 중수가 이루어졌고, 1976년 원래의 천불전을 서쪽으로 옮겨 조사전(祖師殿)이라 편액하고 현재의 자리에 천불전을 중건하였다.

 

비로전 내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노사나불을 모시고, 14개의 나무 계단에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에서 현재의 천불을 신앙하는 천불을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천불 중 295구가 분실되었으나 1785년(정조9) 다시 보완했다. 아들 낳기를 염원하는 참배자가 법당에 들어가서 참배할 때 첫눈에 바로 이 동자상이 보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천불전은 직지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불전으로, 예부터 신혼부부를 비롯해 아들 낳기를 염원하는 부녀자들이 많이 찾았던 명소이다.

 

응진전(應眞殿)은 석가여래와 16나한이 모셔져 있는데, 고려 태조 14년인 931년에 능여조사가 3칸 규모로 창건했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56년(효종 7) 관음전으로 중건했다가 응진전으로 개액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31㎡ 규모로 맞배지붕 형식이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과거불인 갈라보살 및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은 931년(태조 14)에 능여조사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668년(현종 9) 팔상전으로 중건되었다가 명부전으로 개액하고 시왕상을 봉안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83㎡ 규모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시왕전(十王殿), 지장전(地藏殿)으로도 불린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무독귀왕이 협시해 있고, 진관대왕·초강대왕·송제대왕·오관대왕·염라대왕·변성대왕·태산대왕·평등대왕·도시대왕·전륜대왕 등 시왕이 나열해 있다. 명부전에서 말하는 명부는 도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인간이 죽어서 영혼이 심판받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이곳의 시왕들에게 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면 지독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명부전에 지장보살이 있는 이유는, 지장보살이 지옥에 한 명의 중생이라도 있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극락전(極樂殿)은 사적에 따르면 5칸 규모로 조선 전기까지 건재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서전 혹은 서전암으로도 불린다. 현재의 극락전은 1984년 정면 7칸, 측면 4칸의 197㎡ 규모로, 팔작지붕 양식으로 중창되었다. 관음전(觀音殿)은 원통전(圓通殿) 또는 대비전(大悲殿)이라고도 불린다. 1974년 주지 녹원화상(綠園和尙)이 정면 3칸, 측면 3칸의 47㎡ 규모로 중창했다.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불전이다.

 

약사전(藥師殿)은 주지 녹원화상이 1978년 정면 3칸, 측면 2칸, 39㎡ 규모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신축하였다. 약사전 내에는 1955년 국보 제475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국보와 보물이 구분되면서 보물 제319호로 재지정된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직지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조사전(祖師殿)은 원래 영자전(影子殿)이란 이름으로 3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까지 존재하면서 능여조사와 사명대사 등 직지사의 역대 고승 16명의 영탱[영정으로 된 탱화]을 봉안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974년 주지 녹원화상에 의해 정면 7칸, 측면 3칸, 169㎡ 규모의 맞배집으로 개축되었다.

 

사명각(四溟閣)은 고승 사명대사의 영탱을 모신 곳으로 1787년(정조 11) 창건되었다.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1975년 녹원화상이 건물을 해체해 정면 3칸, 측면 2칸, 25㎡ 규모로 팔작지붕으로 복원했다.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사명대사는 16세에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이후 30세에 직지사 주지를 역임했고, 임진왜란 때 호국 선사로서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별도로 독립된 건물에 영탱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직지사에는 전각 이외에도 많은 당우(堂宇)가 있었는데, 사적에는 조선 전기까지 18당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12당우로 줄었다가 현재는 명월료·벽안당·청풍료·제하당·서별당·서허당·남별당·서상당·망일전·응향각·노전실·설법전·남월료·강당·만덕전·다실,·종무소 등 15당우가 있다. 또 직지사에는 조계문(曹溪門)·해탈문(解脫門)·천왕문(天王門) 등 3문(三門)과 범종루(梵鐘樓)·만세루(萬歲樓) 등 2루(二樓)가 있었다고 사적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일주문·대양문·금강문·천왕문 등 4문과 만세루·황악루 등 2루가 있다.

 

사찰의 대문에 해당하는 일주문은 사적에 나타난 조계문과 같은 건물로 추정되며, 달리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고려 시대 3칸 규모로 건립된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59년 주지 녹원화상이 기와를 교체한 데 이어 1970년 축대와 단청 불사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1칸의 팔작지붕, 7.8㎡ 규모이며, 현판 글씨는 조맹부(趙孟頫)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천왕문과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한 문으로, 양 기둥은 천년 묵은 싸리나무와 칡으로 세웠다고 하며, 오른쪽 기둥 상부에 임진왜란 때 불에 탔던 흔적이 남아 있다.

 

금강문은 사적에 해탈문으로 나타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3㎡ 규모이다. 사찰을 수호하는 수문 신장인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수미산 중턱에서 살며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봉안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로부터 소실을 면한 건물이다. 1830년(순조 30) 중수와 천왕상에 대한 채색이 있었고, 1890년(고종 27) 다시 중수가 이루어지고, 1969년 정면 3칸, 측면 3칸, 64㎡ 면적의 맞배지붕으로 중창되었다.

 

만세루는 황악루와 함께 직지사에 있는 두 개의 누각 중 하나이다. 1800년에 소실되었으나 1978년 정면 5칸, 측면 3칸, 107㎡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신축했다.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자 중건할 때 황악루와 만세루의 현판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황악산에 깃들어 있는 산내 암자

 

조선 시대 황악산 일대에는 직지사에 소속된 암자가 서른일곱 곳이나 있었다고 전하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개항기로 들어서 직지사의 사세가 극도로 기울면서 대부분 퇴락하고 현재는 은선암(隱仙庵), 명적암(明寂庵), 중암(中庵), 운수암(雲水庵), 백련암(白蓮庵), 삼성암(三聖庵), 북암(北庵) 등 여섯 곳의 암자만 남아 있다. 사적에 이름이 나타난 암자로는 서전암(西殿庵), 부도암(浮屠庵), 은선암, 명적암, 능여암(能如庵), 영천암(靈泉庵), 견불암(見佛庵), 적조암(寂照庵), 원적암(圓寂庵), 절경암(絶景庵), 내원암(內院庵), 상원암(上院庵), 금강암(金剛庵), 백운암(白雲庵), 상초암(上草庵), 심적암(深寂庵), 영운암(靈雲庵), 도솔암, 호계암(虎溪庵), 중암, 운정암(雲頂庵), 통선암(通仙庵), 운수암(雲水庵), 묘적암(妙寂庵), 영수암(靈水庵), 법운암(法雲庵), 원통암(圓通庵), 백련암, 삼성암, 북암 등이 있다.

 

여인의 원혼이 서려 있는 직지사 금강문

 

금강문에는 남편을 그리워하다 죽은 한 여인의 애절한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떠돌이 승려가 경상남도 합천 땅의 마을 촌장 집에 시주를 받으려고 들렀는데 그 집의 무남독녀 딸이 승려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딸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승려를 거두었고, 승려 역시 마음에는 없지만 여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혼인을 하여 처가살이를 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나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아내는 아들과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목탁과 가사, 장삼을 내주었다. 이를 받아 쥔 승려는 다시 불심이 발동하여 야반도주를 했고, 전국을 수소문하던 아내는 남편이 김천 직지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을 업고 합천에서 여러 날을 달려 지금의 금강문 자리까지 왔으나, 결국 아들과 함께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매년 부인이 죽은 날이 되면 직지사 승려들이 한 사람씩 불려 나가 부인이 죽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갔다. 이에 다급해진 절에서는 부인의 원한을 위로하고자 그 자리에 사당을 지어 해마다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도력이 높은 고승이 직지사를 찾았다가 제사 지내는 광경을 목격하고 크게 나무라며,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을 지어 여인의 원귀를 쫓아내라고 하여 지금의 자리에 금강문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직지사는 일주문과 금강문은 지나치게 멀고 반대로 금강문과 천왕문은 지나치게 가깝게 지어진 것이 다른 사찰과 차이가 나는데, 여인이 죽은 자리에 금강문을 짓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종의 태실 수호 사찰로서의 직지사

 

직지사는 예부터 사두혈(蛇頭穴)의 명당 터로 알려져 왔는데,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태실이 1399년(정종 1) 대웅전 뒤의 북봉에 안치된 것은 이 같은 풍수지리에서 기인된 것이다. 북봉은 황악산의 산줄기가 뱀의 허리처럼 길게 내려 뻗다가 뱀이 머리를 치든 것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하여 기가 드센 사두혈의 길지로 알려졌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 시대에서도 직지사는 정종의 어태(御胎)를 관리하는 태실 수호 사찰로 지정되어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작은 현에 지나지 않았던 김산[김천의 옛 이름]이 김산군으로 승격한 것도 정종 태실 덕분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1399년 4월 5일 조에 따르면 “견중추원사조진 안태우금산현 승김산위군(遣中樞院事趙珍 安胎于金山縣 陞金山爲郡)”, 즉, “중추원사 조진을 보내 김산현에 태를 안치하게 하고 김산을 군으로 승격시켰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 조선 시대 태봉의 보수 및 가봉 내역을 기록한 『태봉등록(胎峰謄錄)』이라는 자료에도 “정종공정대왕 태봉김산직지사후(定宗恭靖大王 胎峰金山直指寺後)”, 즉, “정종대왕의 태봉이 김산 직지사 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종은 즉위한 원년에 다른 곳에 안치되어 있던 태실을 사두혈의 명당으로 이름난 직지사 북봉으로 옮겨 안치했고, 이 때문에 숭유 억불(崇儒抑佛)이란 국시(國是)에도 왕의 태를 안치하고 태실을 관리해야 할 책임이 주어진 직지사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과 직지사의 보호를 받으며 보존되어 오던 태실은 1928년 태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조선총독부의 명분 아래 파헤쳐졌다. 당시 일제가 태항아리만을 꺼내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전하여, 현재 태봉 정상에는 석물 여러 기가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또 태실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중동석은 극락전 앞 잔디밭에 옮겨져 있고, 여덟 개의 울타리석 중 두 개는 직지성보박물관 앞에 남아 있다.

 

사두혈과 개구리봉

 

정종의 어태가 안치된 태봉 바로 아래에는 개구리봉으로 불리는 또 다른 야산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개구리봉은 인동 장씨 집안 소유로, 원래 태봉과 붙어 있던 산이었으나 지금은 두 개의 산으로 독립되어 있는데 그 사연 또한 흥미롭다. 1952년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은 구미 인동의 대부호로 일찍이 명당으로 소문난 태봉 사두혈 인근의 개구리봉에 묏자리를 잡아 놓았다.

 

장승원이 죽자 후손들이 이곳으로 장지를 정하고자 지관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지관이 보니 가히 천하의 명당은 분명하나, 사두혈은 뱀을 상징하고 개구리봉은 개구리를 상징하니 서로 상극인지라, 개구리봉에 산소를 들이면 후손이 발복하기 힘들다 하며 두 가지의 방비책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태봉의 사두혈 기운이 개구리봉으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산줄기를 파내 두 개의 독립된 산으로 만들고, 뱀이 개구리를 해하려 할 때 개구리가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로서 물을 담는 저수지를 만들어야 한다 하여 북암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직지사 감나무와 왕비 신씨에 얽힌 이야기

 

직지사 경내에는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감나무가 많은 것이 또 다른 특징인데, 이 감나무의 진상을 둘러싸고 조선왕실과 일촉즉발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직지사에서 궁중에 감을 진상하는 ‘직지사반시진상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해인사 주지로 있던 학조대사가 직지사 주지를 겸하게 된 후 대군으로 있을 때부터 친분이 있던 세조에게 직지사에서 딴 감을 몇 개 진상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0대 연산군 때까지 직지사 감 진상이 이어져 왔으나, 연로해진 학조대사가 상소를 올려 차후에는 궁궐에서 관리를 보내 직접 감을 따서 갈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연산군은 학조대사를 벌주려고 했으나 왕비 신씨가 편지 한 장으로 학조대사의 뜻을 거두게 했다고 한다. 절에 보관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는 왕비 신씨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존경하옵는 학조대사께

 

해마다 감을 따 머나먼 서울까지 보내는 직지사의 노고야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스님이 요청하신 바와 같이 궁궐에서 보낸 사람이 김천 땅까지 내려간다면 감나무의 풍흉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전년도의 양만큼 윽박질러 채워 오려 할까 심히 걱정됩니다. 선대 왕 때부터 맺어진 인정으로 받을 것이니 힘드시더라도 사찰의 형편껏 올려주심이 어떨까요.”

 

 

천왕문 앞 돌이 맺어 준 사명대사와 신묵대사의 인연

 

직지사 금강문과 천왕문 중간에는 널찍한 돌 하나가 덩그러니 벚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승병을 조직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왜란이 끝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 포로들을 구출해 오는 데 기여해 호국선사로 알려진 사명대사[1544~1610]의 출가와 인연이 있는 유명한 돌이다. 사명대사는 경상남도 밀양 태생으로, 속성은 풍천 임씨(豊川 任氏)이며, 속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13세 때에 김천에 은거하고 있던 황희의 현손인 황여헌(黃汝獻)의 문하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1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공부에 뜻을 접고 방황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직지사에 놀러왔다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 돌을 발견하고 앉았다가 낮잠이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 대웅전에서 참선을 하던 주지 신묵대사도 낮잠이 들었다. 신묵(信默)은 꿈에 황룡이 나타나 천왕문 앞 은행나무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가보았는데, 한 아이가 돌 위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부모를 여위고 괴로워하던 소년은 신묵에게 출가를 소원했고, 신묵은 자신의 꿈에 본 황룡임을 직감하고 아이를 거두어 제자로 삼았다.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소년은 18세에 승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30세에 신묵의 뒤를 이어 직지사 주지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사명대사였다. 사명당은 직지사 주지로 임명된 후 「귀향(歸鄕)」이라는 시에 당시 직지사의 사세와 자신이 출가했던 직지사에 대한 진솔한 소회를 잘 담아내고 있다.

 

“열다섯에 집을 나서 서른 되어 돌아오니/ 긴 시냇물은 의구하게 서쪽에서 흘러오네/ 감나무다리 동쪽 언덕에 무성한 버들은/ 절반이나 산승이 떠난 후에 심은 것이로다.”

 

사명당은 32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명당은 의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서 명승을 떨쳤는데, 사명당이 임진왜란을 맞아 출병하며 지은 시에는 우국충정의 심정이 잘 녹아 있다.

 

“하늘은 이미 추워지고 흰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붉은 머리 푸른 옷 승병들이 종횡으로 달려간다/ 어육(魚肉)이 된 백성이 노상에 송장되어 베개하고 누웠네/ 통무하고 통곡함이여 날은 저물고 산은 푸르기만 하구나/ 요하는 어디메요 임 계신 곳 바라보니 하늘 끝이 아득하다.”

 

 

김삿갓은 왜 직지사 주지의 이를 뽑았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민중 시인이자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은 혼란한 세상을 유람하며 권력가를 풍자하는 무수한 시문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직지사를 찾았다가 승려들로부터 박대를 당한 후 쓴 시가 「직지발치승(直指拔齒僧)」이다. 수모를 당한 김병연은 주지와 글짓기 내기를 청하여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의 이를 뽑기로 했는데, 이 시로 인해 주지가 이를 뽑혔다고 전한다.

 

금오설적오두백(金烏雪積烏頭白)[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황악화개학두홍(黃岳花開鶴頭紅)[황악이라 했는데 꽃이 피어 학의 머리가 붉구나]

 

추풍령상춘화괴(秋風嶺上春花怪)[추풍령이라 했는데 봄꽃이 피어 괴이하구나]

 

직지유중로곡하(直指由中路曲何)[직지라 했는데 꼬부랑길이 웬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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