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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사 김생굴

by phd100 2021. 10. 7.

 

청량산(淸凉山 870m), 청량사와 김생굴

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으로 할만큼 청량산을 사랑한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영남학파의 대두)도 다음과 같은 글을…

“청량산 육육봉(36개봉우리)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헌사(獻詞)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들지 마라 어주자(魚舟子:고기잡이하는 사람) 알까 하노라.“

경북 봉화군 명호면, 재산면, 안동군 도산면, 예안면 사이에 있는 청량산은 내륙의 퇴적암층 3대 기악(奇岳) 산의 하나이다.(청송 주왕산, 진안 마이산) 산의 규모는 작지만 기이한 산봉우리와 첩첩이 쌓인 층암절벽이 곳곳에 있고, 낙락장송이 바위 위에 자라고 있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절경을 이룬다.

 

외청량사 응진전(外淸凉寺 應眞殿)

신라시대에 창건한 외청량사가 바로 응진전이다.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 쪽으로 몽진시에 노국공주가 청량산 응진전에 머무르면서 왕과 고려를 위해서 16나한상을 모시고 간절히 기도 정진 했다는 곳입니다. 암자 뒤 바위가 어우러져 절경을 자랑하는 곳 입니다

 

동풍석(動風石)

어느 스님이 좋은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이곳 절벽위에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바위 하나를 치워야 했다. 그래서 스님이 바위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 뜨렸다.

그런데 다음날 와보니 떨어진 바위가 원래 있었던 곳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것을 보고 놀란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짓지 않았다.

현재 응진전 뒤 높은 절벽위에 바위가 서 있다. 여러 사람들이 밀어도 흔들리지만, 한사람이 밀어도 흔들리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 뿐 결코 떨어 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바위를 동풍석이라 한다.

 

내청량사(內淸凉寺 또는 淸凉寺):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웅장한 바위로 된 봉우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데다 전망이 좋고 경관이 수려해서 아늑한 느낌마저 준다.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앞에는 줄기가 세가닥으로 갈라진 노송이 여유 있게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나무의 전설로는 청량산에서 가까운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사는 남민이라는 사람의 집에 뿔이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다. 이 송아지는 몇 달 사이에 쑥쑥 자라더니 마침내 낙타만큼이나 커졌는데, 어찌나 사납고 힘이 센지 아무도 부릴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청량사 주지스님이 이 소의 주인을 찾아가 소를 시주하라고 부탁하니 주인은 기뻐하며 소를 내주었다. 스님이 이 소를 몰고 와 절을 지을 돌과 재목을 나르게 하니 사람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재목을 나를 뿐만 아니라, 힘이 워낙 센지라 몇 년이 걸려도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던 공사가 쉽게 끝났다.

공사를 다 끝내자 소가 갑자기 쓰러져 죽어 절 앞에 묻었는데 그 무덤 위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돋아나더니 가지가 셋으로 뻗으며 자랐다. 사람들은 그 소를 지장보살(地藏菩薩: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의 무불시대에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의 화신으로 여겼고, 그 소의 무덤을 ‘삼각우총(三脚牛塚)’이라 불렀다. 소 무덤 위에서 자라는 이 소나무는 300년 수령으로 땅에서 10m쯤 위에서 가지가 셋으로 갈라져 수많은 잔가지를 사방으로 펼쳐져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김생굴(金生窟):

청량사에서 금탑봉 쪽으로 돌아나가다가 퇴계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오산당 뒤쪽 수십 길 되는 수직암벽에 뚫린 동굴이다.

옛날에는 이 굴 안이 수십 명이 들어 갈 수 있을 만 큼 넓었다는 데, 그러나 굴을 이루고 있는 퇴적암이 그리 단단하지 않아 지금은 풍화작용을 받아 굴이 허물어지고 깍여져서 굴이 아닌 언덕 절벽쯤으로 되고 말았다.

비가 오면 굴 앞에는 폭포가 만들어져 장관을 이룬다. 김생은 이 굴속에서 나뭇잎을 따다가 그 위에 글씨 연습을 했는데 비가 오면 먹이 빗물에 씻겨 개울물이 온통 먹물 빛으로 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폭포의 물이 흐르는 부분의 색깔이 검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 굴의 전설로는

김생이 30년 동안 굴속에서 글씨 공부를 하고 나니 글씨에 자신이 생겨 하산할 준비를 하였다. 짐을 챙기던 날 밤에 홀연히 묘령의 여인이 김생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김생에게 여인은 “놀라지 마옵소서, 소녀는 봉녀라 하옵는데 이 산에 들어와 길쌈을 익혔습니다. 도련님께서 이곳에서 서예를 익히셨으니 어디 우리가 닦은 솜씨를 한번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생은 여인의 제의를 선뜻 받아 들여 불을 끄고 솜씨를 겨뤘다. 김생은 그 동안 닦은 필력을 발휘하여 글씨를 쓰고, 봉녀는 길쌈을 했다.

시합을 끝내고 불을 밝혀보니 봉녀가 짠 직물은 올 하나 틀리지 않고 고르게 짜였으나, 김생의 글씨는 하나도 제대로 씌어진 것이 없었다.

“명필이 되겠다고 공부를 한 사람의 글씨라곤 믿어지지 않는군요. 이 글씨로 어찌 명필이 되겠습니까? 도련님께서는 공부를 더 하셔야 겠습니다.” 봉녀는 이처럼 조롱하는 듯한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던 김생은 그것이 아직도 미숙한 자신에게 서도에 더욱 정진하라는 신의 게시임을 깨닫고 하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더욱 정진하여 10년을 더 공부하고 세상에 나와 해동의 서성(書聖)으로 불릴 만큼 명필이 되었다고 한다.

김생굴 안에는 김생이 바위에 쓴 글씨 수백 자가 남아 있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글씨를 떼어가 버려 거의 없어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가서 그 벽을 보면 졸필들이 김생의 흉내를 내느라고 벽이 온통 낙서로 덮혀 있어 공중화장실 벽을 연상케 한다.

김생이 서예의 대가가 된 까닭은 청량산 봉우리 중에 붓 모양을 그대로 닮은 탁필봉(자소봉 바로 앞)과 연적(硯滴 벼룻물을 담는 조그만 그릇)모양의 연적봉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하나의 청량산에 대한 얘기로는, 청량산에는 길이가 10리나 되고 수천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동굴이 어딘가에 있어 지하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지하 동굴을 300년 전쯤에, 어떤 도인이 발견하고 백년을 넘게 살 수 있는 양식을 준비해서 몇 사람을 데리고 그 속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면서 동굴 입구를 막아 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6․25전쟁 때에 피난처를 찾던 사람들이 그 동굴 입구를 찾아, 막은 부분을 파내고 그 속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청량산에는 한 여름에 큰 솥뚜껑 만한 얼음을 캘 수 있는 얼음골이 있고, 마시기만 하면 만병이 낫는 약수가 있다는 등 불가사의한 곳이 많다. 청량산 옆을 흐르는 낙동강 줄기에는 깊은 소(沼)가 몇 군데가 있어 관창리에 있는 한 소는 영덕군의 바닷물과 통한다고 한다. 그 증거로는 몇 해 전에 이 沼 주변의 찻길에서 밤중에 물개 두 마리가 차에 치어 죽은 일이 있어 잠수부를 동원하여 沼 밑으로 들어갔더니 물밑으로 동굴이 있어 그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고 바다에 사는 물개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더라고 한다.

 

 

[청량사 어느 여행기]

경북하고도 봉화 땅에 작고 골 깊은 청량산이 있다. 산에는 산만큼 작은 절 청량사가 있다. 나이 아홉에 삼촌 손에 이끌려 출가한 스님이 절을 지키고 있다. 절 안에는 그 옛날 퇴계 이황이 즐겨 머물며 공부했던 정자 오산당이 있다. 오산당에는 산이 좋아 산에 사는 사내가 있다. 그들을 찾은 날, 하필이면 칠월칠석이었다.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그 옛날 봉화에 사는 한 농부가 자기 논 숫자를 세 봤다고 한다. 분명 100뙈기였던 논이 아흔아홉 뙈기밖에 없었다. 몇 번을 세다가 단념하곤 옆에 둔 삿갓을 집어드니 모자라는 한 뙈기가 거기에 있더라는 이야기. 그만큼 평평한 땅이 드물고 가파른 곳이라는 말이다. 봉화는 그렇게 오지였다.

 

청량산 도립공원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 오르면(차로도 오를 수 있다) 왼편으로 청량사 가는 비탈길이 나온다. 그 앞길로도 황톳길이 이어지고 휴게소가 나오지만 우선은 이 길로 오르자. 「차량 절대 오르지 못함」이라 적혀 있다. 절까지 대략 30분. 중간 중간에 숨을 돌리지 않으면 못 오를 길이다. 도대체 원효대사는 어떤 맘을 먹고 이리도 험한 곳에 절을 지었을꼬. 그런데 길모퉁이를 돌아 절이 뵈는 곳쯤에 이르면 왜 절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알 수 있다.

 

서로 몸을 붙이고서 빽빽하게 선 거대한 열 두 암봉 한가운데에 절이 있다. 연꽃을 상상하면 그 풍광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암봉들에는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울창하다. 연꽃 꽃술쯤 되는 한가운데에 농부 삿갓 아래 숨었을 정도로 작은 터가 있고 절은 거기 있다. 퇴계가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흰기러기뿐』이라 했을 정도로 꼭꼭 숨었다. 그 풍광은 『기똥차다』는 입말부터 아뭇소리 못하고 서서 넋을 잃는 모습까지 다양한 반응을 만든다.

 

본시 매우 큰절이었다. 예불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는 스님들의 낭랑한 독경소리가 이 거대한 분지를 가득 메웠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주자학자들은 절에서 음풍농월하다가 절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은 절터에 소수서원을 짓고 청량사에 놀러와서는 승려들을 꾸짖고 봉우리마다 유교식 이름으로 개명을 해버리기까지 했다. 16나한을 모신 응진전 앞 반석은 경유대라 개칭했으니 경유는 그 자신의 호였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퇴계 이황은 아예 절 안에 집을 짓고 「오산당」, 즉 「내 산에 있는 집」이라 현판을 내걸었으니, 당시 스님네들 『백정보다 더 천한』 계급이라며 멸시하던 권세가와 불교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이 현판이다.

 

그러그러한 연유로 암자들은 이제 무시로 발에 밟히는 기와 파편으로 변했고 절은 유리보전과 응진전만 남은 채 엉망이 됐다. 10여 년 전 지금 주지 지현 스님(45)이 왔을 때, 『부처님이 비를 맞고 있더라』고 했다.

 

유가에서도 불가에서도 찬양해 마지않은 청량산과 그 가람을 방치할 수는 없는 법. 폐사 직전이던 절은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았다. 하루 두 차례씩 3시간을 걸어 강나루로 가서 지게로 자재를 날랐다. 아낙들이 고추를 보시하면 30리를 걸어가 장에서 쌀로 바꿔 끼니를 때우며 일을 했다. 비만 오면 떠내려가는 비탈에는 잔디를 깔았고, 침목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어엿한 범종각도 만들었다.

비 맞던 불상 안에서는 『훗날 인연 있는 승려가 제자리에 모시라』는 글귀와 함께 석가모니 진신사리 5과가 나왔다. 이세택이라는 사람이 쓴 「청량지」에 따라 사리는 『모든 봉우리 기가 모이는』 본전 앞 사자목에 탑을 세워 모셨다. 5층탑은 밤이면 불을 밝혀 야간산행을 나섰다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어찌나 탐욕스러운지! 진신사리가 있다는 말에 처음에 세운 3층탑은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하여 그 탑은 요사채 아래 잔디밭으로 옮겼고, 5층탑은 다시 세운 것이다.

또 3층탑 위 꽃밭에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다. 사과가 앙증맞게 열렸다. 지현스님은 『가을에 부처님께 공양하고 먹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꾸 다람쥐들이 먼저 따 먹더래 나. 그래서 「부처님 공양하고…」 운운하는 팻말을 달았더니 팻말 주변 과실은 아직 무사하다 한다. 다람쥐가 글귀를 읽다니. 스님이 빙긋 웃는다. 다람쥐처럼 생긴 사람들이 범인이구나!

 

본전 앞에는 잘 생긴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름하여 「삼각우총」이다. 옛날 절을 처음 세울 적에 아랫마을에서 뿔 셋 난 큰 소를 보시했다고 한다. 소는 팍팍한 비탈을 잘도 골랐고, 불사가 끝나자 그 자리에서 죽어 묻혔다고 했다. 그만치 힘든 불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현 스님의 불사도 그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 이상의 중창은 없다고 했다. 『이 골짜기에 딱 맞는 규모』라고 스님은 말한다.

 

그 말은 실로 옳다. 1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응진전으로 넘어가는 오솔길에 전망대 격인 「어풍대」가 있다. 어풍대에 서면, 당신은 신선이 된다. 절 앞에서 내뱉었던 탄성은 더욱 커지고, 혹자는 흥분하기까지 한다. 선경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단어다. 없는 날보다 있는 날이 더 많은 구름, 그 운무가 골짜기 위로 깔리면 이 작디 작은 절은 모든 봉우리의 주인처럼 위풍당당하게 그 풍광의 한가운데에 떠오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청량사 약수로 목을 축이고 응진전 가는 오솔길을 오른다. 길목에 오산당이 있다. 오산당 옆에는 산이 좋아 산에 사는 산꾼 이대실(59)씨가 산다. 도예면 도예, 대금이면 대금, 시조면 시조, 그림이면 그림…. 뭐 하나 못하는 게 없는 사내다. 오가는 사람에게 차를 그냥 내주고 산다. 응진전 앞 풍광도 기가 막히다.

 

길은 김생굴로도 이어진다. 신라 명필 김생이 입산수도했던 굴이다. 굴에는 현대판 명필가들이 글씨 연습을 하느라 잔뜩 낙서를 해놨다. 길은 정상 의상봉으로 이어진다. 응진전 가는 길목에는 최치원이 마시고 머리가 맑아졌다는 약수 총명수가 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이 물을 2002년 초 모 방송국에서 와서 개구리알을 도룡뇽알이라 집어넣고 떠 마시면서 『좋다』고 연출했다니 우습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찻집도 있다. 이렇게 절을 찾는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어야 진짜 절집인 법. 아침 9시에 문을 열어 「아베크족들이 은밀하게 잠입하기 시작하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그의 손을 만나면 나도 바람이 된다

가을잎 떨어지는 어느 저녁 무렵 내가 그의 소리를 만나면

그는 웃음이 될까 아니면 우수수 사랑이 될까“

아홉 살에 산문으로 들어온 지현 스님의 시다. 청량산 절집에서 차 한 잔은 어떨까. 바람이 그리울 때, 소리가 그리울 때.

 

봉화의 오지마을 석포리에는 어떤 곳일까?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일대. 봉화에서도 오지 중 오지로 손꼽히고 있다. 이 지역은 봉화지역보다는 태백과 더 밀접한 곳이다. 석포면에는 크고 작은 계곡이 줄지어 있으며 청옥산의 고산이 있어 국내 최대의 오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중앙선의 마지막 열차 종착지인 승부역이 있는 곳에는 반야계곡이 반기고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는 백천동계곡도 손을 반긴다. 특히 청옥산 휴양림 앞에는 1~2년 내에 개방될 고산습지 식물원이 있다. 공사중이라서 사람들 통행은 불가능하지만 천천히 걸어서는 올라갈 수 있다. 천연 원시림이 빽빽하게 들어차고 작은 계곡에는 파란 이끼가 낀 모습이 장관이다.

-대중교통 태백까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직행버스를 타고 간다. 태백시에서는 대현리까지 시내버스가 운행한다. 직행버스 편도 25회 봉화-태백 왕복(자연휴양림 및 대현에 정차). 영동선 현동역 또는 석포역에서 약 8km(택시 등 이용).

-자가운전 봉화에서 동쪽 약 50km 거리. 국도 36번(울진)과 31, 35번의 분기점인 소천면 소재지인 현동리에서 태백 방면으로 약 14km 지점.

-별미집과 숙박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명산파크모텔(054-673-9988)을 이용하면 된다. 식사와 목욕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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