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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성주 세종대왕18왕자 태실, 선석사

by phd100 2021. 10. 7.

 

1)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 (世宗大王 王子 胎室) :

태실이 조성된 나지막한 봉우리를 태봉(胎峰)이라고 부르는데, 태실은 옛날 왕실에 출산이 있을 때, 그 출생아의 태(胎)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으로 태봉(胎封)이라고 한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禪石山, 742.4m) 남서쪽 아래 태봉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왕자들 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 중 큰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으며, 이곳은 세종 20∼24년(1438∼1442) 사이에 조성되었다.

 

태실은 두 줄로 나란히 서있는데, 앞쪽(우측)은 소헌왕후가 낳은 적손 대군(大君)들의 태실, 뒤쪽(좌측)은 후궁들이 낳은 군(君)들의 태실입니다.

모두가 받침대 위에 놓인 항아리 모양으로 동일하지만 비문이 지워지거나 받침돌만 남은 것도 있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다섯 기는 비석이 사라지고 없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켜 문종(5대)의 아들인 단종(6대)을 몰라내고 세조(7대)로 등극했다.

이 후 세조는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금성대군, 안평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태실에 대해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을 파괴하였으며,

자신의 태실은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큼직한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웠습니다. 한글을 만든 우리 민족의 성군인 세종대왕의 유일한 실수라면 수양대군을 아들로 둔 것이다.

이 실록에 기록된 수양대군인 세조의 가봉비문(加封碑文)을 보면 "임금에 오른 지 8년이 지나 신하들이 따로 자리를 보아 임금의 태를 이전하기를 간하였으나 형제가 함께 있는데 고칠 필요도 없고 새로운 석물의 설치도 윤허하지 아니함으로 초라한 가봉비만 세웠다. 아! 우리 주상께서는 하늘을 받들고 도를 몸 받아서 문(文)에 빛나시고, 무(武)에 뛰어나시고, 총명, 예지하시고, 겸손 검약한 덕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지위가 높을수록 덕이 더욱 빛나는 지극함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비문은 예조판서 홍윤성이 지었는데, 위 비문을 읽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에 공헌한 신하들의 아첨하는 사고방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의 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세종대왕자 태실과 풍수지리설(경북 성주)

“다시는 저 허망한 술사를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풍수(風水)로 세종을 현혹한 술사(術士) 최양선

 

<파괴된 왕자 태실들>

경북 성주에 가면 세종대왕자 태실(胎室)이 있다. 1438~1442년 연간에 세종 슬하 열여덟 왕자와 손자 단종 태실을 모아 만든 집단 태실이다. 이전 세 왕(태조, 정종, 태종)은 왕자 태실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1443년 세종은 손자 홍위(단종) 태를 여기 묻을 때 근처에 자기 조상 묘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풍수학 제조 이정녕을 해임하고 그 묘를 이장시켰다.(1443년 12월 11일 ‘세종실록’)

 

훗날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사이좋게 모여 있던 형제 태실 가운데 쿠데타를 반대한 형제들 태실은 파괴됐고 왕이 된 수양대군 태실 앞에는 거북이가 비석을 이고 앉아 있다.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한 길지(吉地)’(1436년 8월 8일 ‘세종실록’)에 태실을 만들었어도 자식들 머리 위 피바람은 피하지 못했다.

 

15세기 과학시대를 이끌었던 합리주의 군주 세종은 최양선이라는 풍수가에게 귀를 열고 많은 국가 토목사업을 진행했다.

 

<태양을 직시하는 일성정시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에 가면 입구 오른쪽에 세종 동상이, 그 옆으로 과학동산이 나온다. 15세기 초반 과학의 시대, 세종과 그 이하 천재들이 만든 과학성과물 복원품들이 전시돼 있다. 1437년에 세종이 발명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모형도 태양을 직시한다.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와 별시계를 겸용해 밤낮으로 정확하게 시각을 알려주는 최첨단 기계였다.

 

세종은 호기심 많은 지도자였다.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호기심을 논리로 해석해 과학으로 전환시키는 천재 과학자였다.

그런데. 1430년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술사(術士)가 세종 앞에 나타나 1444년까지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과학적 지도자를 풍수 논쟁을 몰아넣었다.

그래서 세종14년 시달림 끝에 세종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후로 최양선이 국가 논의에 참여하면 용서하지 않으리라.”(1444년 윤7월 8일 ‘세종실록’) 그 술사 최양선 이야기.

 

 

<태실 얘기>

경북 성주에 성군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열여덟 왕자와 손자 단종 태실은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서 쑥대밭이 됐다. 계유정난을 반대한 수양대군 형제들 태실은 사진처럼 두서없이 파괴됐다. 왕실 정치는 풍수를 통해 왕실 안정을 희구했던 아버지 세종 바램과 달리 피비린내로 뒤덮였다. 앞쪽 오른쪽 귀부가 있는 태실이 수양대군 태실이다.

 

- 풍수지리, 정치 그리고 조선 왕조

태조와 태종이 한성을 도읍으로 정할 때 도시계획 기준은 풍수도 아니요 주술도 아니요 ‘백성이 살 너른 땅과 편리한 교통’이었다.(1394년 8월 13일 ‘태조실록’)

 

그런데 나중에 왕이 된 세자 충녕에게 그가 이리 말한다. ‘지리를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일 쓴다면 정밀히 하여야 한다.’(1433년 7월 15일 ‘세종실록’) 합리적이라면 풍수도 수용하라는 당부였고, 많은 사대부들이 땅 기운을 따지는 운명론을 신봉하는 터라 풍수지리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효성 깊고 호기심 많은 세종은 이를 지켰다. 그리고 그 앞에 최양선이 나타났다.

 

- 최양선, 국책 토목공사에 데뷔하다

재위 12년째인 1430년 전직 서운관 하급 관리 최양선이 세종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헌릉(獻陵) 앞을 지나는 고개를 막지 않으면 산맥(山脈)이 끊겨 길하지 못하다.”(1430년 7월 7일 ‘세종실록’) 헌릉은 지금 서울 내곡동에 있는 태종릉이다.

그런데 고갯길이 뚫려서 헌릉 지맥을 사람들이 짓밟고 다니니 ‘끊긴 산에는 장례할 수 없으므로’ 통행을 금지하고 흙으로 산을 다시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최양선이 말한 고개는 천천현(穿川峴)이다. 한성에서 양재를 거쳐 삼남(三南)으로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러니까 대로(大路)를 폐쇄하라는 엄청난 주장이었다.

 

최양선은 이미 태종 때인 1413년 관직 없는 풍수 학생 신분으로 “장의동 문(자하문·창의문)과 관광방 동쪽 고개(숙정문)는 경복궁 좌우 팔이니 사람을 걷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1413년 6월 19일 ‘태종실록’) 이후 자하문은 1623년 인조반정 때 문을 도끼로 부술 때까지 폐쇄됐었고 숙정문은 21세기 초인 2006년 4월까지 닫혀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선왕 당부와 본능적인 호기심으로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에 검토 지시를 내렸다. 한 달 보름 뒤 예조판서 신상이 이리 말했다. “산은 형상이 기복(起伏)이 있어야 좋으니 길이 있어서 해로울 게 무엇이 있습니까.” 또 다른 풍수가 이양달 또한 “발자취가 있어야 맥(脈)에 좋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이리 답했다. “막아도 무방하리라.”(1430년 8월 21일 ‘세종실록’)

 

- 집요한 최양선, 공사를 쟁취하다

3년째 논의가 유야무야 중이던 1433년 여름, 최양선이 또다시 천천현 폐쇄를 이슈화했다. 세종은 이번엔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집현전 판단은 “폐쇄할 이유 없음”이었다.(1433년 7월 22일 ‘세종실록’) 나흘 뒤 이번에는 국가 정책을 감찰하는 사헌부에서 직격 상소문을 올렸다. 최양선이 옳거나 그르다는 지적이 아니라 풍수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이었다.

 

‘지리의 술법은 오괴(迂怪·구부러지고 괴이함)하고 궁벽하며 지루하고 망령된 것이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이 내리고 악한 일을 하면 재앙이 내리는 것인데 화와 복이 어찌 집터와 묏자리에 연유하는가.’ 세종이 답했다. “최양선은 자기 공부한 바를 임금에게 말했으니 충성하는 사람이지 벌 줄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집을 짓고 장사 지낼 때 모두 지리를 쓴다.”(1433년 7월 26일 ‘세종실록’)

 

관료들 반발이 극심했다. 최양선의 반격도 극심했고 세종의 집착도 극심했다. 다시 4년이 지난 1437년 최양선이 또 고개 폐쇄를 주장했다. “가느다란 헌릉 산맥에 큰 고개가 있어서 왕릉에 해가 된다. 고개를 막아라.” 이조판서 하연이 “불가(不可)”라 하자 세종은 이리 반문했다. “능 옆에 큰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있는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없어야 한다는 말도 없다.”(이조판서) 이조판서는 말문이 막혔고 최양선은 승리했다.(1437년 10월 19일 ‘세종실록’) 세종은 마침내 고개를 폐쇄하고 땅을 덧쌓는 대토목공사를 지시했다.

 

공사 착공 반년 뒤인 1438년 4월 15일 승지 허후가 고갯길 폐쇄 공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산맥에 흙을 덮는다고 국운(國運)이 길어지겠는가. 필요가 없는 공사다.”

 

합리적 지도자인 세종이 과오를 인정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정지하기에는 때가 늦었다”라 하였다.’(1438년 4월 15일 ‘세종실록’) 공사는 계속됐다. 고갯길은 폐쇄됐다.

 

13년 동안 끊겨 있던 천천현은 1451년 세종 아들 문종 때에야 ‘사람 발에 산맥이 밟히지 않게 돌을 까는 조건으로’ 재개통됐다. 그런데 13년 뒤, 문종 동생 세조가 즉위하고 10년이 지나고서 지방에 은퇴해 있던 최양선이 또 이 고개를 막으라고 상소했다.(1464년 3월 11일 ‘세조실록’) 세조는 이에 혹했다. 고심하던 육조판서들은 납작한 돌을 깔아 맥을 지키자고 절충안을 내놨다. 고개는 겨우 통행 금지를 면했다.

 

그 천천현은 훗날 월천현(月川峴)으로 개칭됐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달래내고개가 그 월천현이다.(성남문화원, ‘판교마을지’1, 2002, p37) 근 600년이 지난 지금도 중요한 고개다.

 

- 막강한 토목공사 자문역 최양선

세종에게 총애를 받은 술사 최양선은 도읍지 한성과 왕릉 주변 풍수에 대해 거침이 없었다. 천천현 고개 폐쇄를 꺼내기 보름 전인 1443년 7월 3일 최양선은 태조와 태종이 입지를 결정한 궁궐, 경복궁 터가 흉지라고 주장했다. “남산에서 보면 한성 주산(主山)은 경복궁 뒤 북악산이 아니라 승문원이 있는 향교동(현 낙원동 부근)의 연한 산줄기이니 창덕궁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고희(古稀)를 맞은 노정승 황희까지 대동해 남산에 올라가 지리를 살폈다. 그리고 앞으로 집현전에서 학자들과 함께 풍수학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1420년 실시된 문과에서 장원급제자였던 지신사(도승지) 안숭선이 “잡된 술수 가운데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학을 어찌!”하고 항의했으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433년 7월 3일 ‘세종실록’) 세종은 그럴 때마다 “나라를 위해 한 말이니 최양선은 죄없다”라고 답하곤 했다.(1441년 6월 9일 등 ‘세종실록’)

 

풍수에 대한, 그리고 술사 최양선에 대한 세종의 집착은 결국 ‘경복궁을 비롯한 궁성 건축과 남대문 보토(補土) 공사와 소격전 앞 연못 파기 공사와 개천 이건 공사와 남대문 밖 연못 축대 공사 따위에 경기, 충청에서 인부 1500명을 징발하는’ 동시다발 대규모 토목공사로 한성 곳곳을 파헤쳐 놓게 만들어버렸다.(1433년 7월 26일 ‘세종실록’)

 

- 선을 넘은 최양선과 세종의 회고

최양선이 건드리는 사업은 끝이 없었다. 종묘 풍수를 시비 걸고(1441년 7월 18일), “돌이 울었다”고 주장하더니(같은 해 8월 25일), 세종이 스스로 묻힐 자리로 정해둔 수릉(壽陵) 혈 방위를 틀리게 주장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1443년 1월 30일)

 

마침내 1444년, 세종이 선언했다. “앞으로 최양선이 국정에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승정원은 동시에 어명에 의거해 그때까지 최양선이 올린 보고서를 모두 불태웠다.(1444년 윤7월 8일 ‘세종실록’)

 

이듬해 정월 세종이 병 치료를 위해 사위 안맹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료들이 혈자리를 보고 옮기라고 청하자 세종이 이리 말했다. “내가 음양지리의 괴이한 말을 믿지 않는 것은 경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1445년 1월 1일 ‘세종실록’)

 

- 술사 말을 듣지 않은 탓?

1446년 세종비인 소헌왕후가 죽었다. 세종은 미리 봐뒀던 선왕 태종의 헌릉 옆 땅에 왕비릉을 만들고 그 자리에 자신도 묻히겠다고 선언했다. 최양선이 “맏아들 죽을 곳”이라며 흉지라고 주장한 자리다. 왕비릉을 조성할 때는 인부가 1만500명이 동원됐고 이 가운데 100여 명이 사고로 죽었다.(1446년 7월 5일 ‘세종실록’) 4년 뒤 세상을 뜬 세종이 합장됐다.

 

괴이하게도 맏아들 문종이 요절했다. 그리고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피바람을 몰고 왔다. 1468년 즉위한 예종은 세종 부부 왕릉을 천장하기로 결정했다.(1468년 11월 29일 ‘예종실록’) 지관이 고른 경기도 여주 현 영릉 터에는 세조 반정 공신 한산 이씨 이계전과 광주 이씨 이인손 묘가 있었다. 왕실은 이들 묘를 옮기고 영릉을 조성했다.(1469년 3월 6일 등 ‘예종실록’) 사람들은 술사 최양선 예언이 적중했다고 수군댔다.

 

- 요동 벌판, 풍수 그리고 대한민국

정조시대 북학파 박제가는 이렇게 주장했다. ‘운명을 말하는 자는 천하의 모든 일을 운명을 기준으로 말하고 관상을 말하는 자는 천하의 모든 일을 관상을 기준으로 말한다. 무당은 모든 것을 무당에 귀속시키고 지관은 모든 것을 장지에 귀속시킨다. 잡술은 하나같이 그렇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과연 어디에 속해야 할까.’

 

주장은 이어진다. ‘요동과 계주의 드넓은 벌판을 보라. 모든 사람이 밭에다 무덤을 만들어 1만리에 뻗어 있는 너른 평원에 무덤이 올망졸망 널려 있다. 애초에 좌청룡 우백호를 따져 쓸 여지가 없다.

조선 지관을 데려다 장지를 찾게 한다면 망연자실하리라. 식견이 있는 사람이 요직에 서게 되면 마땅히 풍수를 다룬 서적을 불태우고 풍수가의 활동을 금지해야 한다.’(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교감역주, 돌베게, 2013, p263)

 

세종이 최양선을 변호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하들이 조정에서는 귀신 제사를 금하자고 말하고 집에 가서는 귀신 제사하는 자가 매우 많으니 모순이다.’(1433년 7월 15일 ‘세종실록’) 사대부들이 입으로는 풍수 타도를 외치며 뒤로는 풍수를 좇는다는 지적이었다.

 

1904년 2월 3일 미국 '펀치'지 삽화.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 처지를 묘사한 삽화다. 그때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 고종은 궁궐 곳곳에 가마솥을 묻고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 삶았다.

1904년 2월 3일 미국 '펀치'지 삽화.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 처지를 묘사한 삽화다. 그때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 고종은 궁궐 곳곳에 가마솥을 묻고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 삶았다.

 

- 근대의 풍경과 풍수와 주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 뒤 윤치호가 일기를 쓴다.

‘나는 믿을 만한 소식통을 통해 황제가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서 삶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과 일본의 대의명분을 저주하는 특이한 방법이긴 하다.

황제는 어제 받은, 원산항에서 러시아의 어뢰선이 일본의 작은 연안 연락선인 오양환(五洋丸)을 격침시켰다는 보고 때문에 더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할 것이다. 제물포에서 전쟁이 발발해 끔찍한 연속 폭격이 퍼부어질 때, 훌륭한 군주는 점쟁이를 만나느라 바빴다.

무당들의 요구에 따라 궁궐 뜰 네 귀퉁이에 가마솥을 거꾸로 묻었다. 궁궐 문 밖에도 역시 가마솥이 몇 개 묻혔다.’(1904년 4월 26일 ‘윤치호일기’)

 

요즈음은 “풍수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반대하던 분들이 어느 날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더니 산소 자리를 잡아달라더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니냐면서요.”(풍수학자 최창조, 2009년 12월 12일 ‘조선일보’ 인터뷰) 세상은 매우 변하였는데, 이렇게 조금도 변하지 않는 곳도 있는 법이다. 세종대왕자 태실과 풍수지리설(경북 성주)

“다시는 저 허망한 술사를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풍수(風水)로 세종을 현혹한 술사(術士) 최양선

 

<파괴된 왕자 태실들>

경북 성주에 가면 세종대왕자 태실(胎室)이 있다. 1438~1442년 연간에 세종 슬하 열여덟 왕자와 손자 단종 태실을 모아 만든 집단 태실이다. 이전 세 왕(태조, 정종, 태종)은 왕자 태실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1443년 세종은 손자 홍위(단종) 태를 여기 묻을 때 근처에 자기 조상 묘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풍수학 제조 이정녕을 해임하고 그 묘를 이장시켰다.(1443년 12월 11일 ‘세종실록’)

 

훗날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사이좋게 모여 있던 형제 태실 가운데 쿠데타를 반대한 형제들 태실은 파괴됐고 왕이 된 수양대군 태실 앞에는 거북이가 비석을 이고 앉아 있다.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한 길지(吉地)’(1436년 8월 8일 ‘세종실록’)에 태실을 만들었어도 자식들 머리 위 피바람은 피하지 못했다.

 

15세기 과학시대를 이끌었던 합리주의 군주 세종은 최양선이라는 풍수가에게 귀를 열고 많은 국가 토목사업을 진행했다.

 

<태양을 직시하는 일성정시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에 가면 입구 오른쪽에 세종 동상이, 그 옆으로 과학동산이 나온다. 15세기 초반 과학의 시대, 세종과 그 이하 천재들이 만든 과학성과물 복원품들이 전시돼 있다. 1437년에 세종이 발명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모형도 태양을 직시한다.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와 별시계를 겸용해 밤낮으로 정확하게 시각을 알려주는 최첨단 기계였다.

 

세종은 호기심 많은 지도자였다.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호기심을 논리로 해석해 과학으로 전환시키는 천재 과학자였다.

그런데. 1430년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술사(術士)가 세종 앞에 나타나 1444년까지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과학적 지도자를 풍수 논쟁을 몰아넣었다.

그래서 세종14년 시달림 끝에 세종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후로 최양선이 국가 논의에 참여하면 용서하지 않으리라.”(1444년 윤7월 8일 ‘세종실록’) 그 술사 최양선 이야기.

 

 

<태실 얘기>

경북 성주에 성군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열여덟 왕자와 손자 단종 태실은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서 쑥대밭이 됐다. 계유정난을 반대한 수양대군 형제들 태실은 사진처럼 두서없이 파괴됐다. 왕실 정치는 풍수를 통해 왕실 안정을 희구했던 아버지 세종 바램과 달리 피비린내로 뒤덮였다. 앞쪽 오른쪽 귀부가 있는 태실이 수양대군 태실이다.

 

- 풍수지리, 정치 그리고 조선 왕조

태조와 태종이 한성을 도읍으로 정할 때 도시계획 기준은 풍수도 아니요 주술도 아니요 ‘백성이 살 너른 땅과 편리한 교통’이었다.(1394년 8월 13일 ‘태조실록’)

 

그런데 나중에 왕이 된 세자 충녕에게 그가 이리 말한다. ‘지리를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일 쓴다면 정밀히 하여야 한다.’(1433년 7월 15일 ‘세종실록’) 합리적이라면 풍수도 수용하라는 당부였고, 많은 사대부들이 땅 기운을 따지는 운명론을 신봉하는 터라 풍수지리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효성 깊고 호기심 많은 세종은 이를 지켰다. 그리고 그 앞에 최양선이 나타났다.

 

- 최양선, 국책 토목공사에 데뷔하다

재위 12년째인 1430년 전직 서운관 하급 관리 최양선이 세종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헌릉(獻陵) 앞을 지나는 고개를 막지 않으면 산맥(山脈)이 끊겨 길하지 못하다.”(1430년 7월 7일 ‘세종실록’) 헌릉은 지금 서울 내곡동에 있는 태종릉이다.

그런데 고갯길이 뚫려서 헌릉 지맥을 사람들이 짓밟고 다니니 ‘끊긴 산에는 장례할 수 없으므로’ 통행을 금지하고 흙으로 산을 다시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최양선이 말한 고개는 천천현(穿川峴)이다. 한성에서 양재를 거쳐 삼남(三南)으로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러니까 대로(大路)를 폐쇄하라는 엄청난 주장이었다.

 

최양선은 이미 태종 때인 1413년 관직 없는 풍수 학생 신분으로 “장의동 문(자하문·창의문)과 관광방 동쪽 고개(숙정문)는 경복궁 좌우 팔이니 사람을 걷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1413년 6월 19일 ‘태종실록’) 이후 자하문은 1623년 인조반정 때 문을 도끼로 부술 때까지 폐쇄됐었고 숙정문은 21세기 초인 2006년 4월까지 닫혀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선왕 당부와 본능적인 호기심으로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에 검토 지시를 내렸다. 한 달 보름 뒤 예조판서 신상이 이리 말했다. “산은 형상이 기복(起伏)이 있어야 좋으니 길이 있어서 해로울 게 무엇이 있습니까.” 또 다른 풍수가 이양달 또한 “발자취가 있어야 맥(脈)에 좋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이리 답했다. “막아도 무방하리라.”(1430년 8월 21일 ‘세종실록’)

 

- 집요한 최양선, 공사를 쟁취하다

3년째 논의가 유야무야 중이던 1433년 여름, 최양선이 또다시 천천현 폐쇄를 이슈화했다. 세종은 이번엔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집현전 판단은 “폐쇄할 이유 없음”이었다.(1433년 7월 22일 ‘세종실록’) 나흘 뒤 이번에는 국가 정책을 감찰하는 사헌부에서 직격 상소문을 올렸다. 최양선이 옳거나 그르다는 지적이 아니라 풍수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이었다.

 

‘지리의 술법은 오괴(迂怪·구부러지고 괴이함)하고 궁벽하며 지루하고 망령된 것이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이 내리고 악한 일을 하면 재앙이 내리는 것인데 화와 복이 어찌 집터와 묏자리에 연유하는가.’ 세종이 답했다. “최양선은 자기 공부한 바를 임금에게 말했으니 충성하는 사람이지 벌 줄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집을 짓고 장사 지낼 때 모두 지리를 쓴다.”(1433년 7월 26일 ‘세종실록’)

 

관료들 반발이 극심했다. 최양선의 반격도 극심했고 세종의 집착도 극심했다. 다시 4년이 지난 1437년 최양선이 또 고개 폐쇄를 주장했다. “가느다란 헌릉 산맥에 큰 고개가 있어서 왕릉에 해가 된다. 고개를 막아라.” 이조판서 하연이 “불가(不可)”라 하자 세종은 이리 반문했다. “능 옆에 큰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있는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없어야 한다는 말도 없다.”(이조판서) 이조판서는 말문이 막혔고 최양선은 승리했다.(1437년 10월 19일 ‘세종실록’) 세종은 마침내 고개를 폐쇄하고 땅을 덧쌓는 대토목공사를 지시했다.

 

공사 착공 반년 뒤인 1438년 4월 15일 승지 허후가 고갯길 폐쇄 공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산맥에 흙을 덮는다고 국운(國運)이 길어지겠는가. 필요가 없는 공사다.”

 

합리적 지도자인 세종이 과오를 인정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정지하기에는 때가 늦었다”라 하였다.’(1438년 4월 15일 ‘세종실록’) 공사는 계속됐다. 고갯길은 폐쇄됐다.

 

13년 동안 끊겨 있던 천천현은 1451년 세종 아들 문종 때에야 ‘사람 발에 산맥이 밟히지 않게 돌을 까는 조건으로’ 재개통됐다. 그런데 13년 뒤, 문종 동생 세조가 즉위하고 10년이 지나고서 지방에 은퇴해 있던 최양선이 또 이 고개를 막으라고 상소했다.(1464년 3월 11일 ‘세조실록’) 세조는 이에 혹했다. 고심하던 육조판서들은 납작한 돌을 깔아 맥을 지키자고 절충안을 내놨다. 고개는 겨우 통행 금지를 면했다.

 

그 천천현은 훗날 월천현(月川峴)으로 개칭됐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달래내고개가 그 월천현이다.(성남문화원, ‘판교마을지’1, 2002, p37) 근 600년이 지난 지금도 중요한 고개다.

 

- 막강한 토목공사 자문역 최양선

세종에게 총애를 받은 술사 최양선은 도읍지 한성과 왕릉 주변 풍수에 대해 거침이 없었다. 천천현 고개 폐쇄를 꺼내기 보름 전인 1443년 7월 3일 최양선은 태조와 태종이 입지를 결정한 궁궐, 경복궁 터가 흉지라고 주장했다. “남산에서 보면 한성 주산(主山)은 경복궁 뒤 북악산이 아니라 승문원이 있는 향교동(현 낙원동 부근)의 연한 산줄기이니 창덕궁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고희(古稀)를 맞은 노정승 황희까지 대동해 남산에 올라가 지리를 살폈다. 그리고 앞으로 집현전에서 학자들과 함께 풍수학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1420년 실시된 문과에서 장원급제자였던 지신사(도승지) 안숭선이 “잡된 술수 가운데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학을 어찌!”하고 항의했으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433년 7월 3일 ‘세종실록’) 세종은 그럴 때마다 “나라를 위해 한 말이니 최양선은 죄없다”라고 답하곤 했다.(1441년 6월 9일 등 ‘세종실록’)

 

풍수에 대한, 그리고 술사 최양선에 대한 세종의 집착은 결국 ‘경복궁을 비롯한 궁성 건축과 남대문 보토(補土) 공사와 소격전 앞 연못 파기 공사와 개천 이건 공사와 남대문 밖 연못 축대 공사 따위에 경기, 충청에서 인부 1500명을 징발하는’ 동시다발 대규모 토목공사로 한성 곳곳을 파헤쳐 놓게 만들어버렸다.(1433년 7월 26일 ‘세종실록’)

 

- 선을 넘은 최양선과 세종의 회고

최양선이 건드리는 사업은 끝이 없었다. 종묘 풍수를 시비 걸고(1441년 7월 18일), “돌이 울었다”고 주장하더니(같은 해 8월 25일), 세종이 스스로 묻힐 자리로 정해둔 수릉(壽陵) 혈 방위를 틀리게 주장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1443년 1월 30일)

 

마침내 1444년, 세종이 선언했다. “앞으로 최양선이 국정에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승정원은 동시에 어명에 의거해 그때까지 최양선이 올린 보고서를 모두 불태웠다.(1444년 윤7월 8일 ‘세종실록’)

 

이듬해 정월 세종이 병 치료를 위해 사위 안맹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료들이 혈자리를 보고 옮기라고 청하자 세종이 이리 말했다. “내가 음양지리의 괴이한 말을 믿지 않는 것은 경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1445년 1월 1일 ‘세종실록’)

 

- 술사 말을 듣지 않은 탓?

1446년 세종비인 소헌왕후가 죽었다. 세종은 미리 봐뒀던 선왕 태종의 헌릉 옆 땅에 왕비릉을 만들고 그 자리에 자신도 묻히겠다고 선언했다. 최양선이 “맏아들 죽을 곳”이라며 흉지라고 주장한 자리다. 왕비릉을 조성할 때는 인부가 1만500명이 동원됐고 이 가운데 100여 명이 사고로 죽었다.(1446년 7월 5일 ‘세종실록’) 4년 뒤 세상을 뜬 세종이 합장됐다.

 

괴이하게도 맏아들 문종이 요절했다. 그리고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피바람을 몰고 왔다. 1468년 즉위한 예종은 세종 부부 왕릉을 천장하기로 결정했다.(1468년 11월 29일 ‘예종실록’) 지관이 고른 경기도 여주 현 영릉 터에는 세조 반정 공신 한산 이씨 이계전과 광주 이씨 이인손 묘가 있었다. 왕실은 이들 묘를 옮기고 영릉을 조성했다.(1469년 3월 6일 등 ‘예종실록’) 사람들은 술사 최양선 예언이 적중했다고 수군댔다.

 

- 요동 벌판, 풍수 그리고 대한민국

정조시대 북학파 박제가는 이렇게 주장했다. ‘운명을 말하는 자는 천하의 모든 일을 운명을 기준으로 말하고 관상을 말하는 자는 천하의 모든 일을 관상을 기준으로 말한다. 무당은 모든 것을 무당에 귀속시키고 지관은 모든 것을 장지에 귀속시킨다. 잡술은 하나같이 그렇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과연 어디에 속해야 할까.’

 

주장은 이어진다. ‘요동과 계주의 드넓은 벌판을 보라. 모든 사람이 밭에다 무덤을 만들어 1만리에 뻗어 있는 너른 평원에 무덤이 올망졸망 널려 있다. 애초에 좌청룡 우백호를 따져 쓸 여지가 없다.

조선 지관을 데려다 장지를 찾게 한다면 망연자실하리라. 식견이 있는 사람이 요직에 서게 되면 마땅히 풍수를 다룬 서적을 불태우고 풍수가의 활동을 금지해야 한다.’(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교감역주, 돌베게, 2013, p263)

 

세종이 최양선을 변호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하들이 조정에서는 귀신 제사를 금하자고 말하고 집에 가서는 귀신 제사하는 자가 매우 많으니 모순이다.’(1433년 7월 15일 ‘세종실록’) 사대부들이 입으로는 풍수 타도를 외치며 뒤로는 풍수를 좇는다는 지적이었다.

 

1904년 2월 3일 미국 '펀치'지 삽화.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 처지를 묘사한 삽화다. 그때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 고종은 궁궐 곳곳에 가마솥을 묻고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 삶았다.

1904년 2월 3일 미국 '펀치'지 삽화.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중립선언을 한 대한제국 처지를 묘사한 삽화다. 그때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 고종은 궁궐 곳곳에 가마솥을 묻고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 삶았다.

 

- 근대의 풍경과 풍수와 주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 뒤 윤치호가 일기를 쓴다.

‘나는 믿을 만한 소식통을 통해 황제가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서 삶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과 일본의 대의명분을 저주하는 특이한 방법이긴 하다.

황제는 어제 받은, 원산항에서 러시아의 어뢰선이 일본의 작은 연안 연락선인 오양환(五洋丸)을 격침시켰다는 보고 때문에 더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할 것이다. 제물포에서 전쟁이 발발해 끔찍한 연속 폭격이 퍼부어질 때, 훌륭한 군주는 점쟁이를 만나느라 바빴다.

무당들의 요구에 따라 궁궐 뜰 네 귀퉁이에 가마솥을 거꾸로 묻었다. 궁궐 문 밖에도 역시 가마솥이 몇 개 묻혔다.’(1904년 4월 26일 ‘윤치호일기’)

 

요즈음은 “풍수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반대하던 분들이 어느 날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더니 산소 자리를 잡아달라더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니냐면서요.”(풍수학자 최창조, 2009년 12월 12일 ‘조선일보’ 인터뷰) 세상은 매우 변하였는데, 이렇게 조금도 변하지 않는 곳도 있는 법이다.

 

 

2) 선석사(禪石寺)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존리 서진산(棲鎭山)에 있는 사찰로 신라 692년(효소왕1)에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이는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는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나와 있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 어필을 보관했던 곳이 어필각이었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영조 어필의 병풍은 정법료에 보관되어 있다.

 

이 절의 어필각 주위에는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쌍곡죽(雙谷竹)이라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는 그 소리의 맑고 깨끗하기가 다른 피리와 비길 바가 아니었으며, 이를 교방적(敎坊笛)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쌍곡죽이 남아 있지 않다. 성주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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