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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안동 도산서원

by phd100 2021. 10. 7.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있는 조선 중기 서원으로 선비들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을 함께 향사하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던 교육 시설이다.

원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으로 1574년(선조 7)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세웠다.

그 후 1575년(선조 8) 한호(韓濩)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嶺南) 유학의 연총(淵叢)이 되었다.

 

이황(李滉)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을 운영하고, 도산서당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으며, 중종(中宗, 1488~1544), 명종(明宗, 1534~1567), 선조(宣祖, 1552~1608)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목(趙穆)은 이황을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모시면서 공부한 제자이다. 도산서원은 1561년(명종 16) 이황이 건립한 도산서당, 농운정사와 이황이 타계한 후 문인들의 발의로 건립된 서원을 통칭한다.

 

낙동강에서 곡구암(谷口巖)을 끼고 들어서면 영지산(靈芝山)을 배산(背山)으로 동쪽은 천연대(天淵臺)이고, 서쪽은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이다. 도산서원은 아늑한 골짜기 안에서 안동호(安東湖)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 하늘높이 날아 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 뛰노네(<시경> 대아의 한록편 구절에 ‘鳶飛戾天(연비려천), 漁躍于淵(어약우연)’이 있는데, ‘솔개는 하늘 위를 날고, 고기는 연못에서 뛰고 있네.’라는 뜻으로 ‘만물이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천지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표현한 구절)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운영대는 하늘의 빛과 구름 그림자들이 함께 돌고 노니는 곳이다.

서원 안에는 약 400종에 달하는 4,000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藏板) 및 이황의 유품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시사단(試士壇)

시사단(試士壇)은 도산서원 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안동댐의 수위가 높아지면 섬이 되었는데 원래는 위치가 낮았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의 위험이 있어 현재의 위치만큼 높였다.

정조 임금 당시 탕평책의 일환으로 정치적으로 소외되어온 영남지방 선비들을 등용할 목적으로 1792년에 영남 선비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인 퇴계선생과 관련된 이곳 도산서원 앞에서 '도산별시'라는 특별한 시험을 치루었으며, 7,000여명이라는 많은 선비가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실제 중앙관직까지 등용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 도산별시를 친 것을 기념하여 시사단을 세웠으며 정조 당시 유일하게 중앙관직에 진출한 번암 채제공이 정조20년(1796년) 비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서원 구조>

사적 제170호. 1969년 지정. 동서재(東西齋)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 전교당(典敎堂:보물 210)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 상덕사(尙德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

 

이 서원의 건축은 모두 무사석계층(武砂石階層)이며 방주(方柱)의 사용이나 초공(草工)을 끼운 대들보의 간략한 가구(架構) 등 전체적으로 간소하다.

 

 

 

시사단(試士壇)

시사단(試士壇)은 도산서원 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안동댐의 수위가 높아지면 섬이 되었는데 원래는 위치가 낮았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의 위험이 있어 현재의 위치만큼 높였다.

정조 임금 당시 탕평책의 일환으로 정치적으로 소외되어온 영남지방 선비들을 등용할 목적으로 1792년에 영남 선비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인 퇴계선생과 관련된 이곳 도산서원 앞에서 '도산별시'라는 특별한 시험을 치루었으며, 7,000여명이라는 많은 선비가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실제 중앙관직까지 등용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 도산별시를 친 것을 기념하여 시사단을 세웠으며 정조 당시 유일하게 중앙관직에 진출한 번암 채제공이 정조20년(1796년) 비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건립경위

시사단은 본래 1792년(정조 16) 3월에 정조가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도산별과는 문과 2인, 진사 2인, 초시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별시(別試)로서 그 과시(科試)가 시사단(試士壇)에서 거행되었다.

 

형 태

시사단은 나직하고 널찍한 2단의 자연석 돌림상단 위에 세워져 있다. 원래 설단設壇만 있었으며 석비는 후에 세운 것이다.

석비는 1796년(정조 20)에 세워졌으나, 지금의 비는 1824년(순조 24)에 비각碑閣의 개축과 더불어 고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비각은 화반花盤과 초공草工의 새김이 매우 화려한 4면 단칸 팔작집이며, 중방中枋 아래는 모두 판벽板璧으로 돌려 막아 비바람의 침해를 예방하였다.

 

겹처마의 사면 추녀 아래에는 팔각 활주滑柱를 세워 구성이 견실하다. 내부는 도리 위에 아치 모양으로 장식된 보를 걸었고 그 사이 천장은 장방구長方區 소란반자로 치장되었다.

 

현 황

시사단은 강변에 세워져 있었으며, 주변에는 송백림松栢林이 무성하였으나, 안동댐 건설로 분천강이 침수되어 수위가 상승하자 원래 위치에서 10m 높이의 석축을 쌓아올려 원형대로 개건하였다. 이 때문에 주위의 송백림은 유지될 수 없었다.

 

의의와 평가

시사단은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별과 시험을 치른 곳이라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서, 정조 때에도 이황의 학문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말해 준다.

 

번암 채제공이 쓴 시사단 비문입니다.

聖上十六年壬子。遣閣臣李晩秀。賜祭于陶山李文純公書院。先是。西洋邪學。流出我東。自京師浸淫。及於畿湖間。獨嶺以南七十州無一人汚染。上歎曰。此先正遺化也。於是。命近臣以祭。所以寓曠感也。祭文。上所親製。又下御題賦一經義一。命祭罷。坐典敎堂。招諸生入進道門內。俾各以其長應製。捧券以來。閣臣用三月二十二日。到禮安縣。明日詣院下。周覽體勢。以門內地狹。多士不能容。擇江之南沙平草軟一區。使設排以待。又明日早朝奉香祝來。諸生會者近萬。整巾服鞠躳以迎。於是諸執事官及執事儒生序于東。參祭朝士序于西。餘皆以次向神門立。至進道門外。時至閣臣隨謁者導。賜祭如禮。二十五日。開場于江之南。諸生拱手徐步。秩然無喧閙聲。遂揭題于兩株松。跪而瞻起而拜。罔或失儀。及收券。爲三千七百餘張。試訖駄券來。旣復命。上親考校高下。特賜嵬等者二人第。其餘給分施賞有差。又因閣臣奏。下綸綍褒嘉入場生有揖讓風。令本道觀察使速入格諸人。張樂以饋之。又命傳敎及祭文。刊揭典敎堂。又刊板印進。而優等四券與諸般座目榜目。附諸板作爲一冊。板藏陶山院中。一路章甫合辭議曰。此千古稀有之盛擧曠典也。若不有標識。豈所以侈聖恩而詔後人乎。乃就璇題懸揭處築以壇。壇凡三層。上壇環以石鋪以莎。以圖樹碑建閣。中壇揭題兩松入其中。一東一西。正與典敎堂隔江相對。遂名之曰試士壇。旣伐石。走人京師。要濟恭記其事。濟恭作而復曰。夫李先生。我東夫子也。先生所傳。惟夫子之道。而夫子敎人有四科焉。盖人非聖人。才各有偏。雖以時雨之化。不可皆得以全其偏而集其成也。是以設其科以四。使天下之人無不可以入其中者。其敎也至矣。今夫嶺南人士之不染邪學。誠賢矣。若以是自足而止。又或以功令文字之得雋於聖世。意以爲能事畢矣。則未知功令於聖人之敎。何科之可屬。必也勿以世俗功利爲心。立志於遠者大者。死而後已。方可以上不負聖朝作成。下不負先正遺化。不亦美哉。愛重之篤也。不辭而相勉如此。銘曰。

 

陶水洋洋。其上也壇。壇有階級。水有淵源。登壇臨水。觸類而伸。先正之化。聖主之恩。

 

시사단은 도산서원의 맞은편 강 건너 석축 위에 있는 건물이다. 정조16년(1792년)에 정조께서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별과(別科)를 보인 곳이다.

영남일대의 선비를 장려(奬勵)하고 가상(嘉賞)하는 뜻으로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가 어명(御命)을 받아 이곳 도산서원에 도착하여 지형을 살피니 서원 경내가 협소하여 많은 선비를 수용할 수 없어 시험장소를 강변으로 정하였다.

서원에서는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올리는 식전(式典)이 있었는데, 7,228명의 선비가 의관을 정제(整齊)하여 엄숙히 지냈다.

강변에 설치된 시험장에서 과시(科試)를 보이니 답안지를 낸 사람이 3,632명이었다.

시험지는 한양으로 봉상하여 왕이 친히 급제(及第) 2명, 진사(進士) 2명, 초시(初試) 7명을 뽑아 각기 시상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우고 단(壇)을 모았는데, 비문은 당시 수상(首相)이었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 정조는 서인벽파가 득실거릴 때 이황 유성룡 등 남인의 정신적 지주를 모신 도산서원에서 과감히 별시를 치루게해 영조때 이인좌의 난으로 과거응시가 차단된 영남남인들을 응시시켜 복권시킨데 큰 의미를 가진다.

 

비 오는 날 시사단 정조임금16년에 조선500년사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방 별시가 이 곳에서 치루어 졌다

 

시사단 뒤로 보이는 의촌리 마을도 수몰되기 전 140여 호의 양반촌으로 유명한 곳이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대부분 이곳을 떠나고 현재는 40여 호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동안 이 시사단과 도산서원을 연결하는 것은 댐 만수위 때에는 행정선이 운항되지만 갈수기에는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또 행정구역은 엄연히 도산면이나 그 동안 교통단절로 농협이나 우체국, 면사무소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예안면이나 안동시내를 거쳐야만 볼일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긴급을 요하는 응급환자나 산불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신속히 이동할 수 없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주민들의 고통과 애로사항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도산면사무소에서 사업비 3천만 원을 투입해 도산서원에서 의촌리까지 장마 등 물이 많을 때 잠수되는 세월교를 가설했다.

가설된 세월교는 최근 몇 년간 평균 강수량을 분석해 볼 때 여름철 만수기를 제외하면 연중 300일 정도는 통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의촌리에서 안동시내까지 차량으로 약 1시간정도 소요되던 거리도 약 30분정도 단축되었다.

 

세월교 가설이후 의촌리 주민들의 우편물, 농자재 수송 등 영농편리는 물론 그 동안 눈앞에 두고도 가 볼 수 없었던 시사단도 도산서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시사단 뒤편에는 의촌리 마을로 윗마을은 의인이라 불렸고 시사단 바로 뒷마을은 섬마로 현재는 이 두 자연부락을 의촌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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