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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영주 소수서원

by phd100 2021. 10. 7.

 

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그 시초이다.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곳 출신 유학자(朱子學者)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세웠다가 1543년 유생교육도 함께 하기위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주자학[朱子學]은 개인의 도덕과 사회질서의 수립을 목표로 하여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한 실천의 학문)

1548년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사액과 아울러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지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으로, 다른 서원의 설립과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실 백운동서원은 사액을 받기 전에는 풍기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는데, 사액을 받은 후 사학(私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면서 풍기사림들도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재 사적 55호로 지정되어 있고, 보물 717호인 주세붕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백운동의 이름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朱熹: 주자학의 창시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의 ‘소수’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다

 

소수서원 옆으로는 <죽계천>이 흐르고 있다. 죽계천 주변에는 울창한 노송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고, 천 건너편에는 <취한대>가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의 이 죽계천에는 끔찍한 이야기가 얽혀있다.

조선 초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당시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던 곳이 바로 여기, 순흥면 지역이다.

하인 한 명이 선비들의 반란 계획을 밀고하는 바람에 수천 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시체는 소수서원 앞 죽계천에 수장됐고 그 피가 죽계천을 따라 15리가량 흘렀다고 한다.

그 때의 상황을 증언이라도 하 듯 죽계천 아래에는 ‘피가 끝난 곳’이라는 의미의 <피끝마을>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경(敬)자바위와 취한대(翠寒臺)>

경자바위에 새겨져 있는 “백운동”은 이황, “경”자는 주세붕의 글씨라고 한다.

주세붕이 바위에 붉은색 “경”자를 새긴 데는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와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밤만 되면 혼령들이 울어, 그 연유를 물어본즉 예전에 ‘단종복위’ 운동 실패로 희생된 넋들이울고 있다고 했다.

주세붕이 날을 택해 위혼제를 드리면서 ‘경’자에 붉은 칠을 한 뒤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은 주자철학의 근본으로 공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로써 원귀들의 한이 위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계천 건너편에 운치있는 소나무 숲 속에 아담한 정자 하나가 <취한대>이다.

취한대는 유생들이 쉬면서 풍류를 즐기고,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퇴계 선생이 세웠다.

<취한(翠寒)>이란 “푸른 연화산의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소수서원에는 오래된 적송들이 즐비한데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學者樹)>라고 한다.

이는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라고 한다.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止 幢竿支柱)>

소수서원자리 이곳은 원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아직도 그 때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지탱하는 받침돌을 말한다. 이는 통일신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 때에는 유행처럼 번져 전체 사찰로 퍼져 나갔다.

이것의 역할은 사찰이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는 신성한 영역이라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주로 당이나 탱화를 걸기도 한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쇠락한 쓸쓸한 터가 한 때 절 터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상징물이다. 宿水寺止 幢竿支柱는 보물 제54호이다.

 

<경렴정>

경렴정 위에 올라 죽계천을 내려다 보면 붉은 칠을 한 '경(敬)'자가 맞은 편 바위에 새겨져 있다.

 

 

<講學堂>

통상 서원은 누각 아래 삼문을 통해 들어가나 소수서원은 달랑 조그만 문 하나다.

서원 문을 통해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다. 그러데 건물의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 보인다.

앞에 백운동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강당 안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보물 제1403호로 지정돼 있다.

 

특이하게도 단청이 칠해져 있다. 서원의 단청과 사찰의 단청은 차이가 있는데 서원의 단청에는 연꽃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백운동 현판에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연호(元号)인 “만력(萬曆)”'을 사용했다. 만력 원년은 1573년 계유년이다.

 

 

<문성공묘>

주세붕이 중종 37년(1542)에 세운 것으로 안향을 주향으로 한축, 안보, 주세붕을 배향하고 있다.

안축은 경기체가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은 고려 말의 저명한 문필가이며

안보는 동경유수(오늘날의 경주 시장)을 지낸 대학자다.

 

통상 사당은 강당 뒤에 위치하는 <전학후묘>가 일반적인데 문성공묘는 강당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강학당의 정면을 기준으로 하면 뒤에 위치하고 있다.

 

사방에 담을 둘러 다른 공간과의 위계를 구분했고 정면에 일각문, 오른쪽에 협문을 두었다.

보통의 서원 사당을 ‘사(祀)’라고 부르는데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어 주목된다.

 

<전사청>

전사청은 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하는 한편 춘추제향 때마다 집사들이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다.

 

<직방재와 일신재>

스승의 집무실이다. 통상 서원은 강당 좌우에 한 칸 씩 방을 들여 오늘날의 교장실과 교무실로 사용했으나 소수서원은 별도의 건물을 사용했다.

서쪽의 직방재는 오늘날의 교장실에 해당하고 동쪽의 일신재는 교무실에 해당한다.

 

 

<학구재>와 <지락재>

학생들의 처소이다. 통상의 서원은 강당 앞 좌우로 동재와 서재를 두는데 소수서원은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에 따라 두 채의 학생 기숙사는 원장실과 교수실에서 훨씬 물러나 동쪽으로 치우쳐 세워져 있다.

 

<장서각>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로 조선 건국의 사상적 기반인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한 회헌 안향의 영정(국보 제111호)과 신재 주세붕 영정(보물 제717호), 주희, 이덕형, 허목, 이원익의 영정이 있다.

 

<일영대(日影臺)>

영정각 앞에 일영대(해시계)가 있다. 맑은 날 돌의 윗부분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宿水寺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탁청지(濯淸池)>

선조 26년에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에 지락재를 세웠던 李埈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서원 동쪽언덕에 뚝을 쌓고 못을 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푸른 하늘을 담아낼 만큼 아름다운 풍광과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아직도 서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 세조 때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당한 금성대군(錦城大君:세종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아우)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와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義士)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제단이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그 일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던 금성대군은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과 의기투합하여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순흥에서 의사들을 규합하던 중 발각되었다. 관련자는 모두 학살당하고 순흥부는 폐읍되었다.

 

1683년(숙종 9)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1719년(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주창하여 그 유허지에 신단을 설치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주창하여 단소를 정비했다. 1980년에 단소 앞에 재청과 주사를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봄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경내에는 크게 재실(齋室)·주사(廚舍) 영역과 단소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단소는 금성단문 안에 품(品)자형 구성으로 중앙 상단에 금성대군, 오른쪽에 이보흠, 왼쪽에 그 외 순절의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금성대군의 단 왼쪽에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금성단비가 세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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