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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북

영주 금성대군신단

by phd100 2021. 10. 7.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소수서원을 나와 부석사를 가기위해 오른편으로 길을 잡으면 바로 건너편에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사적 제491호)'이라는 입간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원래 이 자리는 세조에 의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했 던 곳이다.

조선 세조 때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당한 금성대군(錦城大君:세종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아우)과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및 그와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義士)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제단이다.

 

이곳이 숙종 19년(1693)에 순흥부사 정중창에 의해서 조성된 제단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순절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조선시대의 제단이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그 일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던 금성대군은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과 의기투합하여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순흥에서 의사들을 규합하던 중 발각되었다. 관련자는 모두 학살당하고 순흥부는 폐읍되었다.

 

1683년(숙종 9)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1719년(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주창하여 그 유허지에 신단을 설치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주창하여 단소를 정비했다. 1980년에 단소(壇所) 앞에 재청과 주사를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봄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경내에는 크게 재실(齋室)·주사(廚舍) 영역과 단소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단소는 금성단문 안에 품(品)자형 구성으로 중앙 상단에 금성대군, 오른쪽에 이보흠, 왼쪽에 그 외 순절의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금성대군의 단 왼쪽에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금성단비가 세워져 있다.

 

금성대군지위(錦城大君之位)

순흥부사이보흠지위(順興府使李甫欽之位)

제의사지위(諸義士之位)

 

단종은 영월 청령포에서 위리안치당하였는데, 위리안치라는 것이 대단한 형벌이다.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만 적용되었고, 서민이나 하급관리는 해당되지 않는다.

대개 위리안치형을 받으면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지역으로 귀양보냈는다.

왜냐하면 유배된 중죄인이 거주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쳐서 바깥출입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위리안치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1776년 정조에 의해 흑산도로 유배된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가 남긴 <가암유고>에는 울타리의 높이는 3길(5m 가량)이며 4겹으로 둘러쳐져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울타리 한쪽에 음식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고, 바깥 사방에는 죄인을 감시하는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18세기에 탕평정치의 움직임이 활성화됨에 따라 국왕에 대한 의리가 다시금 강조되는 정치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당대 왕조의 인신(人神)을 위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이곳 순흥에서 당시 많은 순흥 사람들이 이일에 관련되어 죽었고, 순흥도호부가 폐지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이런 혼란을 묵묵히 지켜본 나무가 곁에 서 있으니 그 이름이 '압각수'로 불리는 은행나무가 있다. 나이는 1.100년을 넘겼다.

 

천년을 넘긴 나무치곤 조금 초라한 행색이다. 금성대군 신단 뒷편에 보면 이 압각수가 서 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순흥의 흥망성쇠와 관련이 있다.

순흥도호부가 있을 땐 생생하게 살아 있든 나무가 금성대군의 단종복위가 밀고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순흥에 피바람이 불고 순흥도호부가 폐지되자, 이 나무는 싹을 틔우지 않고 죽었단다.

그 후 200년이 지나 세상이 바꿔 숙종 때 순흥도호부가 부활하자 싹을 틔우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돌아보고 주차장에서 부석사, 선비촌 방면으로 조금 걸으면 죽계천에 다리이름이 죽계제월교인데 왼편에 보면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비석에 '죽계제월교 강희경인오월 일입(竹溪霽月橋 康熙庚寅五月 日立)'라고 적혀 있다.

'숙종 36년(1710) 오월에 세운 제월교'라는데...

 

이 다리이름이 분명 제월교인데, '청다리'로 불린다.

이 다리가 많은 사연이 있는 다리임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어릴 때 어른들이 놀린다고 '너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는 말의 유래를 낳은 다리가 이 다리이다.

소수서원에 공부하러 오는 유생들을 따라 온 종 등 많은 청춘남녀들이 이 다리를 중심으로 정분이 나고 한 모양이다.

그런데 처녀가 애기를 낳으면 큰일나던 시기에 유생이 처녀에게 다리 밑에 애기를 버리라하고 종을 시켜 안고 와서 본가에 안고 가서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애기가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고 했단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애기를 그곳에서 데리고 왔기에 그 진원지가 되었을까?

그 외에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인가 보다.

 

이 주변에 제월교건너에 선비촌이 있고, 소수서원, 봉서루, 초암사, 성혈사 등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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