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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용연사

by phd100 2021. 10. 15.

 

 

용연사(龍淵寺)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玉浦面) 반송동(盤松洞) 비슬산(琵瑟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914년(신라 신덕왕 3) 보양(寶壤)이 창건하였으며 그뒤 고려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419년(세종1) 천일(天日)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1603년(선조36) 탄옥(坦玉) · 경천(敬天) 등이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621년(광해군13) 범종각을 지었으나 1650년(효종1)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하였다.

 

1655년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1660년(현종 1)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1670년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되었으며 1673년에는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세웠다.

1722년(경종 2)에는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하였는데, 당시 절 규모는 2백 수십 칸에 이르렀으며 거주하는 승려수도 500여 명에 달하였다.

 

1722년 임수간(任守幹)이 지은 용연사중수비(龍淵寺重修碑)의 비문과 1748년 금곡 선청(金谷 善淸)이 쓴 「용연사사적」(龍淵寺事蹟)에 따르면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1년(912)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보양은 운문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바로 그 스님이다. 사적의 기록은 그 다음 고려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조선시대로 넘어간다.

세종 1년(1419) 해운당(海雲堂) 천일(天日)이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방화와 약탈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를 본 사명대사가 인잠 · 탄옥 · 경천 스님 등에 명해 절을 재건토록 하니 대웅전 등 다섯 동의 전각이 들어서고 20여 명의 승려가 살게 되었다.

그런데 효종 1년(1650) 어느 날 저녁 예불을 위해 등불을 켤 무렵 별똥이 떨어져 불이 나서 종각만을 남긴 채 절이 온통 타버리고 말았다. 이를 다시 10여 년에 걸쳐 복구하였을 때는 수십 채의 건물, 이백 수십 칸이 넘는 대가람이 되었으며, 절 앞의 시내에는 용문(龍門) · 천태(天台) · 무릉(武陵) · 방은(訪隱) · 홍류(紅流) 등 돌을 다듬어 만든 다리가 다섯 개나 놓였다.』

 

이렇게 큰 절의 규모를 갖추고 나서 용연사는 신앙의 핵심이 되는 불사리를 모시는 내실을 다지게 된다.

현종 14년(1673) 석가여래부도, 곧 불사리탑을 이곳에 세운 일이 그것이다. 용연사 또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갖춘 절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뒤 숙종 41년(1715)부터 7년에 걸쳐 대웅전 등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올렸으나, 불과 4년 만인 영조 2년(1726) 정월 초하루에 대웅전과 동서의 별실, 좌우의 승당이 다시 불에 타는 재난을 당했다.

당시 승통 혜조를 중심으로 대중들이 이를 복구하여 영조 4년(1728)에 중건을 마쳤다. 그러고 나서 29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모습으로 용연사는 우리와 만난다.

 

 

<이제 용연사로 들어 가본다>

그 옛날 도원경을 방불케 하는(武陵) 절에서 조용히 숨어사는 이를 찾던(訪隱) 길에 건넜을, 꽃잎과 단풍잎이 떨어져 흐르던(紅流) 무지개다리들은 간 데 없고, 비좁은 길만 남기고 옹색한 터에 다닥다닥 집들이 이어진 상가를 지나서야 주차장 앞에 용연사 일주문이 얼굴을 내민다.

 

여기저기 갈아댄 나무에 미처 단청을 올리지 않아 궁기가 흐르긴 해도 용연사가 영화롭던 시절에 어울릴 만큼 공포가 화려하고 복잡하다. 그대로 조금 더 올라 절의 약도가 그려진 안내판 앞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절의 본당 극락전으로 향하게 되고, 왼쪽으로 능선을 넘으면 불사리탑, 즉 석조계단이 있는 적멸보궁이 나온다.

 

먼저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넌다. 계단을 올라 사천왕문을 지나서 보광루 밑으로 통과하고 나면 극락전 마당이다. 좌우로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극락전이 서고 그 앞으로 요사채가 하나씩 양쪽으로 나뉘어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

법당의 중심선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난 자리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하나 놓였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탑이다.

기단부는 단층으로 바뀌고, 몸돌은 긴 대신 지붕돌이 두껍고 낙수면이 짧으며 층급받침이 넷으로 줄어드는 등 시대의 하강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뚜렷하다. 용연사에서 가장 오래 된 유물이지만 크기가 2m 남짓에 세장하여 극락전이나 다른 건물들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대웅전을 대신한 극락전>

극락전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얼핏 보아서는 고풍을 느낄 수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후불탱화, 삼장탱화, 단청과 벽화 등에 모두 세월의 무게가 차분히 서렸다.

 

후불탱은 극락전에 걸려야 할 미타탱이 아니라 대웅전에 있게 마련인 영산탱이다. 화기(畵記)에는 영조 7년(1731)에 영산대법회탱을 비롯한 5폭의 탱화를 그려 대웅전과 영산각에 봉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존불 또한 문수 · 보현 두 보살을 좌우에 거느린 석가여래이다. 그렇다면 이 법당은 극락전이 아니라 대웅전인 셈이다.

 

이 점은 삼장탱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그 화기에 법장암에서 그려 본사, 곧 용연사 대웅전에 걸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본다면 현재의 극락전은 본래 대웅전이었으나 어느 땐가 무슨 곡절 끝에 극락전으로 현판만 바뀐 듯하다.

 

<극락전에 있는 후불탱인 영산탱의 얘기>

후불탱화는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를 비롯한 몇몇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씨는 나이 열셋 되던 1727년에 아홉 살 난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되었다가 이듬해 그를 사별했다. 그러니까 세자의 3년 상을 끝내고 그의 천도를 위해 이 영산탱을 시주했던 모양이다.

 

평범한 여인으로 치자면 아리고 기막힌 사연이겠으나 아무튼 이러한 왕실의 뒷받침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 솜씨도 남달라 청록의 고운 색감, 양 보살의 투명한 두광 표현, 다양한 표정의 섬세한 얼굴 모습 그리고 다채로운 의복 표현 등이 짜임새 있게 자리잡은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삼장탱화 얘기>

법당 우측 벽에 걸린 삼장탱화는 영산탱보다 13년 뒤인 영조 20년(1744)에 그려졌다.

천장보살이 주존으로 가운데 앉고 그 오른쪽에 지장, 왼쪽에 인장, 곧 지지보살이 정좌했다. 삼장보살의 연화대좌 아래로는 각 보살의 두 협시가 좌우에 시립하고 있으며, 뒤로는 시왕을 비롯한 많은 하늘의 권속들이 오색구름 사이로 상반신을 내밀고 있고, 그 위쪽은 구름으로 채워져 있다.

세 보살의 법의 · 대좌 · 광배들의 색채가 서로 달라 산뜻하고 다채로워 보인다. 삼장탱화가 정형화되는 시기에 한 발 앞서 그려진 작품으로 삼장탱화의 편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밖의 불화>

법당 안에는 이밖에도 불화들이 많다. 공포 사이마다 생긴 공간에 부처나 조사의 다양한 모습을 빼곡이 그렸고 널찍한 벽면에는 벽화를 그렸으며 후불벽화도 그렸다.

특히 왼쪽 벽 상단에 그려진 백의관음도와 그 아랫단의 그림 세 폭이 눈길을 끄는데 범상치 않은 필치가 엿보인다.

 

단청은 화려했던 빛깔이 모두 날아가고 고색이 가득하다. 천장의 반자마다 금색 · 자주색으로 모란을 네 송이씩 그렸으며, 그 가운데를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또는 범어(梵語)로 메웠다.

법당이 북향이라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에는 내부가 어두워 벽화나 단청을 충분히 살펴보기가 어렵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을 비롯하여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호인 삼층석탑 그리고 용연사 극락전, 용연사 부도군 등이 있다.

 

<비슬산은 어떤 산?>

비슬산(琵瑟山, 毘瑟山). 그 이름의 어감이 참 좋은 이 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다. 높고 귀하다는 의미가 담긴 우리말 ‘벼슬’ 또는 ‘솟을’에서 유래했다는 설명도 있으나, 비슬이란 말은 고대 인도 힌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Viṣṇu)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온 말이다.

 

신라시대엔 포산(包山)이라 불린 이곳에서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성인이 수행했다는 얘기가 『삼국유사』 권5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 실려 있고, 그 책을 지은 일연스님 또한 여기에 있던 보당암 · 무주암 · 인흥사 · 불일사 등에서 젊은 시절에는 예지를 벼리고 나이 들어서는 익힌 바를 베풀었다.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인 옥천사가 이곳에 있었으며, 고려 성종 때에는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한 결사(結社)가 이 산중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여러 절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사 · 용천사 · 용문사 · 소재사 · 임휴사 등이 지금도 흩어져 있고, 그중에도 이들의 앞자리에서 용연사(龍淵寺)가 비슬산을 대표한다.

 

 

<적멸보궁이 안고 있는 석조계단(石造戒壇)>

용연사 밖으로 다시 내려와 안내판이 있는 왼쪽 계단을 올라서면 적멸보궁이 나온다. 적멸보궁 법당은 여느 보궁의 그것처럼 안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고 뒷벽을 틔워 사리탑에 바로 예배할 수 있도록 내부를 꾸몄다. 법당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석조계단이 있다.

 

용연사의 이 석조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금강보계(金剛寶戒)로 일컫는 불사리(佛舍利)를 설해 놓고 수계의식(授戒儀式) 등을 행하는 곳),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 수계법회를 거행하던 장소로, 방등이란 계율의 정신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는 의미와 도솔천의 세계를 의미. 즉 미륵전이 미륵의 하생처라면 그 위에 있는 방등계단은 미륵상생처를 상징)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계단형 사리탑이다.

정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원형의 굄대가 겹으로 새겨진 정방형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맨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통이 넓어지다가 중앙부분을 지나면서 차츰 줄어들어 절에서 흔히 보는 범종을 그대로 닮았다.

윗부분은 구슬무늬를 한 줄로 빙 두르고 나서 겹으로 된 연꽃무늬를 한 바퀴 돌리고, 그 위로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봉오리를 봉긋하게 새겨 마무리했다.

 

상층기단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 면의 가운데 탱주를 새겨 사면을 여덟 칸으로 나눈 뒤, 칸마다 팔부중상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손에는 갖가지 무기를 든 채 구름을 타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눈을 부릅뜬 팔부중상은 사리를 지키는 수문장의 위세나 힘이 넘치기보다는 그 사리를 지키게 되어 마냥 즐겁다는 명랑한 표정이다.

 

하층기단은 아무런 무늬 없는 장대석을 상층보다 더 두툼하게 이중으로 단처럼 쌓아 마감했다. 하층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하나씩 서 있었으나 지금은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몇 차례 도난을 모면한 뒤 아예 극락전 안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이다. 이 사천왕들은 빼어난 조각솜씨도 솜씨려니와 그 표정과 자세의 명랑성과 다양함은 가히 조선시대 돌조각 가운데 가장 오른쪽에 나설 것이다.

아기들 체구에 가까운 4등신의 몸에 나이 든 얼굴이 벌써 웃음을 자아내는데, 앞니를 두 개만 내보이며 입을 앙다물고 콧등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험악한 인상을 지어본다든지, 세 살짜리의 그것만도 못한 주먹을 허리춤에 말아쥐고 있는 대로 힘을 주어본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상층기단의 팔부중상과 함께 단조롭고 무거워지려는 사리탑에 생기를 불어넣는 멋진 조각이다.

 

기단 주위로는 열두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팔모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워 연결한 위에 쇠창살을 촘촘히 꽂은 난간을 둘렀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설치한 것이다.

탑을 보호하고자 한 뜻을 모르는 바 아니나 기단에 너무 바짝 다가서 갑갑하고 쇠창살도 볼썽사납다. 탑 앞의 석등은 그 솜씨로 보아 난간을 만들 때 함께 조성한 듯하고, 상석은 그 두툼한 형태가 탑의 기단부와 닮아 보인다.

 

사리탑 양쪽 앞으로는 비가 3기 서 있다. 왼쪽 것이 바로 임수간이 비문을 지은 비슬산용연사중수비(琵瑟山龍淵寺重修碑)이다.

글씨는 남한명(南漢明)이 썼는데 가볍게 흘린 행서체의 글씨가 유려하다. 오른쪽의 작은 비는 석가여래중수비(釋迦如來重修碑)로 1934년 사리탑을 중수한 사실을 적은 것이다.

그 옆의 것이 1673년 사리탑을 조성한 뒤 그 내력을 밝힌 석가여래비(釋迦如來碑)이다. 탑을 만들고 3년이 지난 1676년에 세운 이 비의 내용으로 불사리가 용연사에 모셔지는 경위를 상세히 알 수 있다.

 

<비의 내용>

『신라 때 스님 자장(慈藏)이 ······ 양주(梁州=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 갈무리한 것이 두 함(函)으로 각 함에 2과(顆)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임진년의 난리 때 왜적이 (탑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꺼내었으나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이 격문을 보내 (사리에 따르는) 재앙과 복덕을 들어 그들을 설유하니 적들은 온전히 사리를 돌려보냈다.

송운스님이 그것을 받들고 금강산의 서산대사 휴정(休靜)에게 나아가 처분을 물었다. 휴정스님이 탄식하며 말하길 “자장스님은 신인(神人)이다. 그분이 처음 깊이 갈무리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끝내 파내어 짐을 면치 못했으니,

갈무리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으되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누군가 함부로 파내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함 하나는 문인인 선화(禪和) 등에게 주면서 태백산의 보현사(普賢寺)에 안치하도록 하고,

또 다른 함 하나는 송운스님에게 넘겨주며 통도사로 돌려보내 탑을 고치고 봉안하도록 했으니, 그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함이었다. 그 무렵 영남지방은 또 다시 병화에 휩싸여 대중들이 모두 새나 쥐처럼 뿔뿔이 흩어지니 (탑을 고쳐 세울) 일을 시작할 겨를이 없었고,

송운스님은 (사리를) 원불(願佛)로 모시고 어명에 따라 일본을 다녀온 뒤 곧 입적하게 되니 그 함은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남게 되었다.

그의 제자 청진(淸振)이 비슬산 용연사에 옮겨 모신 뒤 대중들과 상의하여 탑을 세워 모시기로 하되, (서산과 사명) 두 스님의 유지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1과는 통도사로 돌려보내 안치하도록 하고 1과는 용연사의 북쪽 기슭에 봉안했다. 계축년(1673) 5월 5일 탑이 이룩되니 높이가 5척 5촌이었다.』

 

사리탑의 3면을 두른 담장도 참하다. 막돌 허튼 층 쌓기 한 축대 위에 기와조각과 황토 흙으로 층층이 쌓은 담장을 올렸는데, 이끼 앉은 돌들의 빛깔도 차분하고 그 위의 담장도 수더분하다. 사리탑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게 이 담장이다.

 

석조계단이 들어선 자리는 용연사의 성소(聖所)다. 더구나 그것은 사람이 가까이하기 어려운 냉랭한 성소가 아니라 누구라도 따뜻이 감싸줄 안온한 성소다.

 

 

<석조계단이 세워지기까지>

용연사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전이다. 이곳에 봉안된 석가모니 사리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의 고승인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구법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와 두 함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1592)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되어 사리를 도난당하였다. 그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한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하였었으나 계축년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에 탑을 건조하고 봉안하게 되었다.

 

보궁은 석조로 된 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중앙에 안치한 형식으로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을 양각하고 하층기단의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했다.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나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 구조에 균형 있는 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석조 예술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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