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논개(朱論介) 生家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위치한 논개생가마을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인 게야무라 로꾸스매를 껴안고 진주 남강 의암에서 투신한 논개. 열아홉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오로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그녀를 잉태한 마을이다.
이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대곡리 저수지를 지나게 되는데, 원래는 논개 생가가 저수지로 수몰되기 전에 이곳에 있었는데 1986년 대곡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위쪽으로 옮겨 지금의 마을로 복원하였다.
깊고도 깊은 산골, 장수에서도 깡촌에 속하던 대곡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년쯤 전이다. 논개의 부친인 주달문(朱達文)진사가 건너편 범바위골이라는 마을에서 이주해 터를 잡고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사람들은 이곳을 주 진사가 사는 곳이란 뜻으로 주촌(住村)이라 불렀다.
논개의 성은 주(朱)씨이며 관향은 신안(新安)이고 의암(義巖)은 예문관에서 내려진 사호(賜號)이다. 논개는 1574년(선조7년) 9월 3일 전북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부(父) 주달문(朱達文)씨와 모(母)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논개의 일생>
논개의 조부인 현(縣)이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리에서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주촌 마을에 이사와 학당을 차리고 아동들을 훈육하는 훈장이 되었다. 아버지 주달문은 부친의 대를 이어 훈장으로 가업을 삼고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장성하여 밀양박씨 가문의 규수에게 장가들어 단란한 가정을 꾸려 오던 중 남아를 출산하여 대룡(大龍)이라 이름지어 귀하게 길렀으나 나이 15세에 괴질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후자가 없는 주달문 부부는 명산 장안산(長安山)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주씨 가문에 대를 이어갈 자손을 점지해 줄 것을 천지신명에게 빌었으며 그 보람이 있어 박씨부인의 나이 40중년(甲戌年9월 3일)에 산기를 느껴 분만을 하였고 술시(戌時)에 여아를 낳았으나 아이의 사주가 아주 기이하게도 갑술(甲戌)년, 갑술(甲戌)월, 갑수(甲戌)일, 갑술(甲戌)시에 태어나 사갑술(四甲戌)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나서 장차 큰일을 성취할 것이 라며 위로 하였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에게 사갑술(개해, 개달, 개날, 개시)의 뜻을 개를 낳는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경상도 방언(方言)으로 "개를 낳다"라는 뜻이 담긴 논개(論介)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라면서 아동교육의 여가를 틈타 한문과 예도를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나이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이해하는 비범한 지혜가 있어 아버지 주달문을 기쁘게 하고 놀라게 하였다. 논개 나이 10여세가 되니 천성이 아름다움과 고상한 기풍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겨우내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 주달문은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효성이 지극한 논개는 약손가락을 깨물어 선혈을 아버지 위에 흘렸으나 소생하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주씨 가문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주색잡기와 행패를 일삼고 다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당시 지방의 토호 김풍헌(金風憲)을 찾아가 형 유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체하며 논개를 백치불구인 김풍헌 자식의 민며느리로 삼을 것을 계획하였다. 김풍헌은 황도길일을 택하여 혼례일을 정하고 박씨부인에게 전달하자 박씨부인과 논개소녀는 혼비백산, 청천벽력같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모녀간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피하기 위하여 박씨부인의 친정인 경상도 안의현 서하면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다.
김풍헌은 시종들을 논개의 생가인 주촌마을에 보내서 논개소녀를 데리러 갔으나 허탕치고 돌아오자 김풍헌은 노발대발하여 소장(訴狀)을 만들어 장수현감에게 제출하고 엄벌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최경회(崔慶會) 당시 현감은 조사를 하여 김풍헌에게 무고한 사람을 무고(誣告)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리고서 박씨부인과 논개소녀를 무죄방면의 영을 내렸다. 현감부인 나주김씨는 그 억울한 사정을 듣고서 의지할 곳도 없고 갈곳 없는 모녀를 병약하여 자리에만 누워있는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고 최경회 현감의 승낙을 얻어 내아에 머물면서 병시중을 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년에 숙질로 고생하던 모친 박씨 부인은 서하의 친정에서 사망하고 논개의 정성어린 간호의 보람도 없이 현감부인 나주 김씨 마저 세상을 떠났다.
선조 24년 논개는 최경회(崔慶會)현감의 척실이 되어 비로소 부부의 정으로 맺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선조 25년 신혼의 단꿈도 깨이기 전 임진왜란이 발생했고 최경회 현감은 소수의 관군을 이끌고 전라감사 이광이 영도하는 전라도 구원군에 편성되었고 장수, 진안, 무주등지에서 약 5,000명의 장정을 초모(招募)하여 막강한 군대를 조련하였다.
선조 26년 6월 최경회 현감은 병마 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로 부임하면서 부인 논개와 함께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다. 성이 함락되고 패하자 최경회는 국토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칠석날 왜적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회를 베풀고자 기생들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군 연회석에 참석 왜장 게다니무라 (毛谷村六助)를 진주 남강변 현재의 의암(논개의 충절을 기리어 새김)이라 불리는 바위로 유인하는데 성공, 함께 투신 순국한 기생이 아닌 엄연한 양가집 규수였던 주논개(朱論介)이다.
일부 기생이라고 기록된 것은 일제의 역사 왜곡과 식민사관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각종 문헌 및 고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진주에서 해전(海戰)하고 살아남은 장수의병들이 최경회 현감 시신과 주논개 부인의 시신을 거두어 운구하여 신안주씨(新安朱氏)선조들이 묻혀 있는 주씨의 집성촌인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마을 당산 뒤쪽 골짜기에 묻었다한다. 그리고 두 분의 산소는 현재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장수읍 남산기슭에 위치한 논개사당은 지방 문화재 46호로 지정하여 주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는 뜻에서 의암사라 칭했다. 또한 주촌마을의 원래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으며 이곳은 논개 할아버지가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2만평에 이르는 생가지를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