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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북

남원 실상사

by phd100 2021. 10. 19.

 

실상사(實相寺)

전북 남원시 산내면(山內面)의 지리산(智異山) 기슭 평지에 있는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었는데.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풍수지리의 자리인 것을 알고 실상사를 지어진 것이라 한다.

 

특히 증각대사 홍척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太子) 선광(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4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석장승(돌장승:石長栍):

실상사 입구에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解脫橋)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돌장승) 3기가 있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 때 떠내려가고 없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세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길게 수염이 표시되고 몸체에는 좌우 각각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대장군(大將軍),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다만 수염이 반대로 향하고 있어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은 대칭적인 한 쌍을 염두에 둔 조각인 듯싶다. 좌측 장승을 받치는 기단석(基壇石)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보광전: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주존불인 아미타불좌상을 좌우에서 협시(夾侍)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은 거의 같은 형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아미타불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대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 즉 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석등(石燈)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여덟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 형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실상사 동종(銅鐘)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는데,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강희(康熙) 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다.

 

실상사의 전설 :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약사전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중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철조 약사여래좌상

실상사 약사여래불상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철불(鐵佛)의 초기작품으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은 건장한 신체와 물결식의 옷주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양식이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 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믿어왔다.

보통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는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명부전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제3 송제대왕, 제5 염라대왕, 제7 태산대왕, 제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제4 와관대왕, 제6 변성대왕, 제8 평등대왕, 제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극락전

극락전의 옛 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극락전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

 

삼층석탑 :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 있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 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실상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의 기와 파편들을 모아 기와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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